올해는 우리 성당이 설립된 지 25주년이 되는 해다. 크고 작은 행사가 많은데 그중 지난주에 열린 ‘25주년 기념 전신자 체육대회’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다. 이 행사를 위해 우리 구역은 파란색의 단체 티셔츠를 구매했다. 반장인 나는 티셔츠를 배달하러 102동 86세 마리아 자매님 댁을 방문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최근 평택에서 이사 온 101동 88세 요세피나 자매님도 체육대회에 가고 싶다고 했다며 연락해보라고 했다.
우리 구역 반장을 맡은 지 4년째이지만 이 봉사를 원해서 한 건 아니었다. 전임 반장이 허리 수술로 갑자기 그만두면서 준비 없이 그 자리를 떠맡았다. 반장의 일은 주로 성당 청소나 성사표, 새해 달력 같은 자잘한 배달이다. 여기에 더해 새로 전입한 신자나 예비신자를 살뜰히 챙기는 일도 포함되지만, 코로나19 이후 신자 간 친목 도모는 자연스레 소홀해진 게 현실이다.
그나마 하는 토요일 구역 청소 날엔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짜증이 난다. 동과 동 사이를 오가야 하는 각종 배달은 늘 마지막까지 미루기 일쑤였다. 이번 티셔츠 배달도 얼른 끝내고픈 마음이었다.
요세피나 자매님께 전화를 걸어본 뒤, 여분의 티셔츠를 들고 자매님 댁으로 향했다. 흰 머리에 보글보글한 파마를 한 자매님이 맞아주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거실에는 선풍기가 더운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작년에 허리 수술을 받아 걸음걸이가 느릿한 자매님은 가려던 나를 붙잡으며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자매님과 어색하게 앉아 거실 벽을 바라보니 대못에 볼품없이 매달린 훈장이 눈에 들어왔다. 훈장에 관해 묻자 남편이 생전에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6.25 참전 용사로 백마고지의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고, 그 공로로 무공수훈자(武功受勳者)가 되었다. 이후 복부와 왼쪽 다리에 박힌 파편으로 평생 통증에 시달리며 고생하다 7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자녀가 어디에 사는지 묻자, 자매님은 시선을 피하며 자식을 가져 본 적 없다고 했다. 혹시 먼저 자녀분을 보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자식에 관해 물으면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아 원래 없던 것처럼 대답한다고 했다.
가난한 집 6남매 중 맏이였던 요세피나 자매님은 학교에 다니던 동생들과 달리 한글도 모른 채, 어머니에게 배운 삯바느질로 집안을 도왔다. 스무 살이 되자 고모가 중매에 나섰고, 그때 만난 총각은 인상이 날카로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 그녀의 집에 와서 구애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스물한 살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얼마 후 자신이 속아 결혼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멀쩡히 걷던 남편이 다리를 심하게 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는 몸에 박힌 파편으로 인한 통증을 잊기 위해 날마다 술을 마셨고 생계에도 나서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나에게 자신의 가시밭길 같았던 삶을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자매님에게서 오래된 외로움이 느껴졌다. 내가 가고 난 뒤 혼자 밥을 먹을 그녀를 떠올리자 짠한 마음이 들었다.
“자매님,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인데 저 밥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아이고, 되고 말고요. 반장님! 기다려 봐요. 내 당장 상을 차릴게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허리춤을 부여잡고 조심조심 걷던 그녀는 내 말에 잽싸게 주방으로 향했다. 평소엔 두어 가지 반찬을 꺼내 드신다더니 냉동실 생선까지 꺼내어 예상치 못한 진수성찬을 뚝딱 차려냈다.
밥을 먹으며 조심스럽게 자매님의 딸에 관해 물었다. 요세피나 자매님은 딸이 살아있었다면 60대 초반이라고 했다. 남편의 건강 문제로 인해 그녀는 힘겹게 딸을 얻었다. 글을 모르는 자신이 어렵게 얻은 금지옥엽 딸이 1990년대, 누구나 부러워하던 조흥은행에 입사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빨랫줄에 널린 은행 유니폼만 봐도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딸은 직장 동료와 연애 끝에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준비하던 중, 어금니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결혼한 지 10개월 만에 통증의 원인이 밝혀졌다. 후두암이었다. 암 진단 당시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고 치료를 위해 아이를 포기해야 했다. 딸은 점점 말이 줄고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해 울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 병세가 깊어져 정신이 흐려진 마지막에는 엄마 대신 사위 이름만 불렀다. 자매님의 비통함이 서운함으로 변했다.
딸을 보내고 매일 방안에 누워 있던 그녀를 성당으로 이끈 것은 동네 친구였다. 그 후 한글도 배우고 남편과 함께 요셉, 요세피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도 받았다. 자매님은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성당에 다녔다. 남편은 임종 직전 자매님에게 평생 속 썩여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였을까.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모습은 그렇게도 편안해 보였다고 했다. 그의 장례미사는 많은 신자의 참여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냐고 물었다.
“나는 딸아이가 암 진단받은 그 날부터 오늘까지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자요. 남편은 맨날 술 먹고 속 썩이지, 정말 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쥐약을 사서 죽으려고 했는데 막상 먹으려니 겁이 나서 못 하겠더라고요.”
요세피나 자매님은 티셔츠를 갖다 주고 같이 저녁도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자매님은 내가 도움을 준 거라 여기시겠지만, 정작 위로받은 쪽은 나였다. 고난 앞에서도 담담했던 그분의 삶이 나를 깊이 어루만졌다.
티셔츠 하나를 전하러 갔을 뿐인데, 뜻밖에도 한 사람의 깊은 생을 선물 받았다. 전에는 성사표나 달력을 우체통에 얼른 꽂고 돌아섰던 나였다. 이제 아무리 작은 배달이라도 구역 분들의 얼굴을 보며 안부를 묻는 반장이 돼야겠다.
그때 자매님의 휴대전화에서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렸다. 무공수훈자회에서 온 문자였다.
“허리가 아퍼서 갈 수가 없는데 뭘 가져가라고 자꾸 연락이 오네”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문자 내용은 기념품 수령 안내였다.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거기가 제 근무지 근처예요”
내 대답에 부탁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며 연신 미안해하는 자매님을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다음 날 퇴근길에 무공수훈자회에 들러 바디케어 선물세트를 받아왔다. 자매님은 미안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주말에 맛있는 점심을 사주시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자매님과 시원한 냉면을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