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 남다른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길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의 옷차림이나 생김새까지도 세밀하게 기억했다. 이러한 특성은 직업에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학생들은 물론이고 아이 엄마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보면 그들은 진심으로 좋아했다. 오산에 있는 유엔군 초전 기념관에서 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지금, 사람을 기억하는 이 총기(聰氣)가 예전 같진 않지만, 불현듯 반짝반짝 빛날 때가 있다.
주말이면 기념관은 가족 단위 관람객들로 북적이지만, 주변에 사는 초등학생들의 방문도 이어진다. 8월의 더위로 에어컨을 최강 풍으로 틀던 어느 날, 똘망똘망한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 두 명이 들어왔다. 한 아이는 토끼 이빨에 휴대폰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통통한 볼살에 까만 뿔테 안경이 눈에 띄었다. 두 아이는 똑같이 크록스 샌들을 신고 있었다. 주로 대화는 토끼 이빨 친구가 주도했다.
“어휴, 시원하다! 밖에 진짜 더워요!”
“어서 와. 어른들은 안 오셨니? 너희 둘만 온 거야?”
아이들은 기념관 근처에 산다며 자신들끼리 왔다고 했다. 2층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불러 세워 기념관을 비롯해 옆 건물인 체험관, 평화 공원, 그리고 전망대 등이 표시된 팸플릿을 펼쳐 보이며 코스를 설명해주었다. 아이들은 전시실을 둘러본 후 경쾌한 인사를 남기며 사라졌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토끼 이빨과 뿔테 안경 두 아이가 전시장 후문으로 들이닥쳤다.
“아, 죽을 것 같아요!!!”
깜짝 놀라 후문 쪽으로 가보니, 세상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정수기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아이들은 내가 알려준 팸플릿 속 모든 장소를 다녀온 참이었다. 당시 기온은 3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 평지를 걷기도 힘들 터인데 75년 전 스미스 중령이 수원 쪽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을 바라봤다는 반월봉 전망대까지 찍고 온 것이었다. 나는 삼복더위에 아이들이 그곳까지 오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기특한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L자 파일과 스미스 중령 기념 코인을 쥐여 보냈다.
가을이지만 여전히 대낮엔 여름의 흔적이 남아 있던 지난주 토요일. 밀려드는 관람객에 분주한 오후였다. 아이들 소리에 문 쪽을 보니 토끼 이빨과 뿔테 안경 두 아이가 킥보드를 탄 새로운 친구 한 명과 함께 들어왔다.
“어머, 너희 또 왔네?”
나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
“우리 생각나요?”
토끼 이빨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럼, 그럼! 당연히 기억하지. 오늘은 새 친구도 데려왔네?”
자신들이 친구에게 기념관을 설명해주려고 데려왔다며 어깨에 힘을 주어 말했다. 처음 방문한 킥보드 친구에게도 L자 파일을 건네주고 돌려보내려는데, 그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는 갖고 있던 두유를 주고 세 아이에겐 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별것 아닌 사탕에도 아이들은 고맙다고 연신 꾸벅꾸벅 인사했다.
아이들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토끼 이빨 아이가 다시 들어왔다.
“왜? 뭐 두고 갔니?”
“아니요. 선생님, 여기 그만두지 말아요.”
“왜?”
“우리 기억해줘야 하니까요.”
“알았어. 오래오래 여기 있을게!” 나는 웃으며 약속했다.
엄마는 어릴 적 나에게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내 기억력이 귀한 상을 받은 것 같다. 수많은 관람객이 밀물처럼 들고 나는 기념관에서 그 아이와 나는 기억으로 이어졌다. 내 기억력은 쓸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