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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Oct 19. 2021

쓰러져도 자라는 나무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도스토옙스키-         


 작년에 형제들과 엄마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각자 기억이 맞지 않았다. 언니 오빠들의 나이가 있고 임의대로 이야기에 살을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정자 엄마는 우리에게도 잊히는 그것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들에게 잊히는 건 시간 문제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두려웠다. 그러다 작년에 우연히 유튜브로 이슬아 작가의 세바시 강의를 듣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 하는 일”     



엄마를 불멸화하고 싶었다. 엄마의 삶을 써 내려가고 후손들이 우리 안에 이정자 엄마의 강철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글을 써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글쓰기는 방송대 교육학과 편입 후 3년 동안 과제와 논문으로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으니 글쓰기 기술을 조금만 더 배우고 매일 쓰는 연습을 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를 찾다 모 작가가 운영하는 글쓰기 유료 카페에 가입해서 3개월 동안 매일 글을 썼다.      


시간은 흘러 2021년이 되었다. 글쓰기 카페에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글쓰기 카페를 떠나 혼자 글쓰기를 하려면 또 다른 곳에 나를 매어두어 글을 쓰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기로 했다. 브런치는 네이버 블로그와는 다르게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없다. 브런치 측에 내 글 세 편과 자기소개, 향후 자신의 계획을 간략하게 써서 보내면 심사를 거쳐 합격 또는 불합격 메일로 온다. 그동안 카페에서 써놓은 글을 퇴고해서 글 세 편을 준비하고 브런치에 도전하는 이유를 ‘엄마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브런치 작가에 응모했다. 올해 3월에 합격 메일을 받았다. 너무도 뿌듯했다. 내가 작가라니! 일주일 정도는 여기저기 자랑하며 우쭐대며 지냈다. 그러나 작가로서 글을 매일 쓰기로 다짐했지만, 일주일에 한 편이라도 글을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강제성이 사라진 뒤 나의 일상은 집안일과 딸아이 뒤치다꺼리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시간을 정해서 꾸준히 하는 습관을 잡기가 처음엔 무척 어려웠다.     


그러다 오산시 양산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내 인생의 첫 책 쓰기’라는 강좌에 참여했다. 엄마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핑곗거리만 만들며 미루던 내게 이 강좌는 구세주였다. 5월 10일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고 있는 이 강좌는 첫 5주 동안은 강원국 작가님께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배웠고 이후 홍승완 작가님께 출판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배우고 매주 과제를 올리며 11월까지 열심히 달리고 있다. 이 강좌에서 내 글과 내 출판 기획서의 장단점을 작가님과 동료 선생님들에게 합평을 받은 일은 다시없을 소중한 기회였다. 우리는 서로 힘을 북돋아 주고 이끌어주며 여름에서 가을로 향하고 있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엄마가 살았던 곳을 기준으로 크게 화순, 부산, 오산으로 나누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화순, 부산 이야기는 부산 둘째 언니의 공이 컸다. 아마 부산 둘째 언니가 없었더라면 엄마의 이야기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오산 이야기는 두 올케언니와 셋째 언니 그리고 나의 기억에 기대어 썼다. 재밌는 것은 딸들의 기억 조각과 두 며느리의 기억 조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언니들의 두리뭉실한 기억과는 달리 큰 올케언니는 숫자에 날카로웠고 작은 올케언니는 내가 전화를 하면 어색함에 모르쇠로 버텼지만 일단 말이 터지면 정교함이 살아있는 기억력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오빠들은 어릴 적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빠들은 묻는 것조차 질색했다. 아마도 그들에게 극복이 안 되는 상처가 있는 듯했다. 이렇게 엄마의 이야기는 엄마의 자식들과 두 며느리의 기억으로 퍼즐 조각처럼 꼭 맞아 들어갔다.      


그러나 초반에 둘째 언니에게 전화하면서 질문을 대충 하면 언니의 기억 창고는 열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지만 좀 더 그 상황에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자 기억의 문은 활짝 열리고 노다지가 쏟아지곤 했다. 일단 한 기억이 터지면 다른 기억의 창고를 건드리는 건 시간문제였고 이야기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질문만 잘 준비된다면 시간이 많이 지나도 글은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생전에 형제는 한 나무의 가지라고 늘 얘기했다. 이 글을 쓰기 전 우리 형제들은 우애로 똘똘 뭉친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가 돈 문제로, 해묵은 오해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는 쓰러진 나무의 가지였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선 하루에 적어도 세 번, 많으면 대여섯 번 전화 통화를 해야 했다. 엄마의 이야기와 언니들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구술하면서 언니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스스로 치유되기도 했다. 또 몰랐던 언니 오빠들의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들으면서 눈물로 글을 쓰기도 했다. 언니 오빠들의 희생으로 내가 2021년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고 그들이 오늘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글이 한편 한편 완성될 때마다 같이 읽으면서 형제이면서도 알지 못했던 서로의 상황과 감정을 알게 되자 미움과 오해는 점점 누그러지고 연민과 사랑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사랑’이라는 유산은 남아 우리 육 남매를 지탱해주고 있고 그 사랑이 이 쓰러진 나무를 계속 자라게 했다. 어쩌면 우리 6남매는 앞으로도 삶의 곳곳에 숨겨진 엄마의 유산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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