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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an 19. 2022

미안해요, 전 짝사랑만 해요

12살과 13살 그 어디엔가 있는...

12살의 나는 조숙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탑재된 ‘눈치’ 센서 때문이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언니 오빠들의 생각과 말이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는 메커니즘 때문이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공부도 노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해야 했던 자력갱생의 환경 탓에도 있었다. 변변한 직업이 없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빴던 엄마는 내가 뭘 공부하는지 뭘 하며 노는지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교가 끝나면 캄캄해질 때까지 학교, 집 주변 골목, 친구 집 가리지 않고 놀았다. 고학년이 되면서 골목 곳곳에 핑크빛 기류가 피어오르던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6살 차이 나는 언니와 드라마를 보다가 야한 장면이나 남자 주인공이 바람피우는 장면에 대해 언니에게 물으면 “크면 알게 돼” 하는 대답을 그즈음부터 자주 듣게 되었다.      


그러다 우리 옆집 1층 다세대 주택에 누나와 셋방살이하던 나보다 2살 많은 종인이 오빠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종인이 오빠는 우리 골목의 인기남이었다. 오빠는 조각 미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작은 키에 장난기가 자글자글한 눈웃음이 귀여웠다. 오빠는 옷도 잘 입었고 늘 친구들을 이끌고 다니며 뭔가를 신나게 떠들어대곤 했다. 오빠의 목소리는 허스키했고 열을 올려 말할 때는 자전거에 기름칠 안 끽끽 대는 소리가 났다. 일요일이면 종인이 오빠는 누나와 교회에 가곤 했는데 내가 볼 땐 여학생을 꾀려고 가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이 이층 집 이어서 집 앞에 나와 난간에 서서 옆집을 내려다보면 종인이 오빠 집이 보였다. 오빠 집 나무 미닫이문이 열리면 좁은 부엌까지 훤히 볼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 종인이 오빠를 그리워하며 오빠네 집을 내려다보는 것은 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비극은 종인이 오빠가 내 친구 은경이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은경이는 부잣집 딸이었다. 친구들의 부모님은 대부분 집 근처 공단에서 일하고 다세대 주택에서 다닥다닥 사는 것과 달리 은경이 부모님은 근처 도축장에서 가게를 했고 은경이네만 초여름이면 장미 넝쿨이 아치형 대문을 예쁘게 장식하던 이층 집에 살았다. 은경이 얼굴은 하얗고 마론 인형처럼 갈색에 긴 생머리는 숱도 많았다. 은경이는 셈은 빨랐지만, 상황 파악엔 어두웠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우리 앞집 1층에 살던 연화 언니 집에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이 모여 이불을 덮고 전기 놀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인이 오빠는 은경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전기 놀이를 하면서 둘이 시시덕대는 것을 보니 질투가 나서 은경이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또 어느 날은 은경이와 은경이 집 앞 슈퍼에서 갤러그 오락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종인이 오빠가 친구 두어 명과 함께 우리 쪽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종인이 오빠 친구들이 자꾸 오빠를 밀면서 하는 말이 들렸다.

“빨리 말해. 어서 가봐. 저기 있잖아.”

나는 직감했다.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상상하기 싫은 그 상황이 내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해맑은 은경이를 재빨리 끌고 은경이 집으로 들어갔다. 가까스로 오빠가 은경이에게 고백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은경이는 종인이 오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은 지나 6학년이 되고 2학기를 앞두고 우리 집은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 이젠 종인이 오빠를 못 보는 것이다. 나는 상사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아도 종인이 오빠, 눈을 떠도 종인이 오빠만 생각났다. 방안에 공기처럼 종인이 오빠 얼굴이 동동 떠다녔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슬픈 노래만 들어도 모조리 나를 위한 노래였고 누가 건들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급기야 나는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렇다. 종인이 오빠 교회에 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종인이 오빠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살 것 같았다. 이사 간 동네에서 새로 사귄 친구 선경이에게 같이 가달라고 사정해서 같이 교회에 가기로 했다.

드디어 일요일이 밝았다.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머리를 감고 언니의 새 옷을 훔쳐 입고 집을 나섰다.

지루한 예배가 끝나고 친구들 한가운데서 바쁜 종인이 오빠가 보였다. 드디어 오빠가 나를 보고 아는 척했다.

“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

“어, 친구가 하도 교회 가자고 해서. 그럼 갈게. 다음 주에 봐.”

나는 바쁜 척하며 친구와 쌩하니 뒤돌아 나왔다. 오빠를 향해 타오르는 마음과는 달리 오빠 앞에선 관심없는 척하는 메서드 연기가 나왔다. 미칠 노릇이었다.

“야! 내가 언제 가자고 했냐? 저 오빠야? 귀여운데??”

종인이 오빠가 귀엽다고 하던 선경이는 몇 번의 동행을 끝으로 교회엔 죽어도 안 간다고 선언했다.      


혼자서 교회를 다니며 어느덧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후부터 이상하게 종인이 오빠가 자주 나와 눈이 마주치기 시작했다. 어느 때엔 오빠가 먼저 나를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럴 리 없어…. 설마….’

종인이 오빠 친구들은 나를 보면 괜히 히죽히죽 웃으며 “종인아! 종인아!” 하며 오빠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러고 보니 종인이 오빠는 전엔 나에게 말도 잘 걸곤 했는데 몇 개월 전부터는 나만 보면 고개를 숙이며 말도 못 붙이고 줄행랑을 쳤다.

아! 오빠가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저렇게 안 하던 짓을 티 나게 하면 동네 똥개도 눈치챌 것이다. 그런데 나는 썩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빠가 징그럽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오빠가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 상황에 감사해도 모자랄 텐데 갑자기 변한 오빠의 태도에 뜨악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모두가 기다리던 여름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여행 가는 게 흔하지 않던 그 시절 교회에서 가는 수련회는 우리에겐 최고의 낙이었다.

수련회를 가면 선생님들은 조를 짜서 경쟁심을 부추겨 게임을 하게 하거나 성경 암송을 시키곤 했다. 종인이 오빠와 나는 같은 조는 되지 않았지만, 우리 조가 회의를 할 때면 오빠는 늘 나를 보고 있었다. 식당에 가서도 나는 종인이 오빠가 어디 앉아 있는지 훤히 보였다. 어찌나 그의 눈에서 강렬한 레이저가 나오는지 내 얼굴은 구멍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련회 둘째 날 오후 나는 남학생 방을 지나다 종인이 오빠를 보았다. 아니 종인이 오빠의 엉.덩.이 를 보았다. 오빠는 바지를 갈아입고 있었는데 문을 아주 활~짝 열고 갈아입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의 뽀얀 엉덩이를 본 순간 나는 얼어붙었고 눈앞이 캄캄했다. 놀란 가슴을 저녁밥으로 달래며 낮의 엉덩이 사건을 생각하니 오빠에 대한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사탄의 수작이 아니고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 계곡에서 물놀이할 때도 캠프파이어에서도 종인이 오빠의 애절한 눈빛을 마주하면 오빠의 그 뽀얀 엉덩이가 떠올라 몹시도 괴로웠다.

수련회가 끝나고 교회에 가니 수련회 사진들이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사진을 한 장씩 A4 용지에 붙여놓고 인화하고 싶은 사진 밑에 자신의 이름을 쓰라고 알려주셨다. 물론 내 사진도 몇 개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있는 사진 밑에 종인이 오빠 이름이 다 쓰여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다음 주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교회를 그만둔 후 내 짝사랑은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치던 남학생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그 뒤로도 종인이 오빠는 계속해서 느닷없이 튀어나와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곤 했다. 오빠의 엉덩이 때문이었는지 오빠를 향한 순수한 짝사랑의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가끔 종인이 오빠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수련회 마지막 밤 캠프파이어 때 내 정면에 앉아 있던, 모닥불 때문에 더 환했던 오빠의 미소가 떠오른다.

오빠는 나를 기억할까. 기억한다면 어떤 모습의 나를 기억할까.





사진: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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