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연길모 Feb 13. 2022

내 생애의 수호천사 2

옥심 언니를 찾습니다 ①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아는 언니는 사주명리학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번 모임에서 그 실력을 선보였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도사(?) 언니의 표현에 따르면 내 초년 운은 한마디로 ‘산중 험로’라고 한다. 험하디 험한 끝없는 산길을 가는 운이니 고달프고 고독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부산에서의 나의 20대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대학 친구들은 모이면 우리의 20대가 그립다느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만 나는 죽어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 내 사진을 보면 화가 잔뜩 나 있는 독사 같다. 짙은 메이크업 탓도 있지만 세상을 향한 분노에 찬 눈빛은 ‘오늘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 봐!’ 하는 것만 같다. 차라리 40대인 지금이 훨씬 젊어 보인다.

나의 노안과 분노의 원인은 힘든 회사 생활과 가난 때문이었다.

20대의 어느 날 아침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돼지가 이런 기분일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졸업과 함께 시작된 회사 생활에선 그 어떤 성취감도 맛볼 수 없었고 그저 티 나지 않는 일을 하는 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하찮은 여직원이었다.

집에 가면 부모님은 50대를 넘긴 나이였음에도 혈기 왕성한 20, 30대처럼 살림을 부수며 부부 싸움을 했다. 가난은 공기처럼 퍼져 있었고 등에 달라붙어 우리 골수를 뽑아먹는 것 같았다. 모름지기 20 대란 물기를 한가득 머금은 한 떨기 꽃 같아야 할진대, 나는 매사 회의적이고 호전적이었으며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노인 같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의 위태로운 20대의 멘털을 꽉 잡아주는 노처녀 언니들이 많았다.

노처녀라고 해봐야 서른을 넘지 않은 20대 후반 언니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의 여성을 노처녀라고 말한다면 기함할 일이지만 26년 전 그땐 정말 노처녀라고 불렀다. 20대 초반의 내가 20대 후반 언니들하고 어울리다 집에 늦게 들어가면 엄마는 “너도 똑같이 노처녀 된다. 어울리지 말아라!” 하고 질색하곤 했다. 나는 서른이 넘어 결혼했으니 엄마의 예언은 적중했지만, 결코 언니들 탓이 아니라는 건 엄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많은 노처녀 언니 중에 옥심 언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실도 없이 도급 순위 최하위였던 건설회사 총무과에 있을 때 옥심 언니는 사장님 비서로 입사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사장님은 철저히 두 얼굴의 인간이었는데 지역 사회에서는 덕망 있고 신앙심 깊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회사에서 사장님은 저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우렁찬 고함과 욕설, 물건을 던지는 기행을 일삼는 사이코패스였다. 그 루틴으로 직원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어야 월급을 주는 보람을 느끼는 자였다. 그러니 비서실 여직원은 하루가 멀다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 사장님이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서 소개받아 비서실에 새로 온 여직원이 옥심 언니였다.      


촌스러운 이름과 달리 언니는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의 여주인공 '오드리 토투'를 닮았었다.

언니는 2대 8 정도의 과한 옆 가르마를 해서 앞머리가 좁은 이마 전체에 드리우게 하고 파마기가 살짝 있는 어두운 갈색 커트 머리를 늘 귀 뒤로 야무지게 꽂았다. 뽀얀 피부에 맞게 숯댕이 눈썹과 날렵한 콧날이 이목구비의 중심을 이루며 짙은 쌍꺼풀과 기다란 속눈썹은 언니의 맑은 눈매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160센티 정도의 키에 군살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몸매의 언니는 목소리가 아주 특이했다. 언니를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으면 할머니 같았다. 언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면 곧 뒤집혔기 때문에 ‘전원일기’의 일용엄니를 연상케 하는 그 목소리만이 언니의 이름과 유일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옥심 언니는 공주교대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언니가 그런 회사의 그런 사장의 비서로 일한다는 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최선을 다해 일했고 사장님도 옥심 언니한테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일 잘하지, 똑 부러지지 그리고 싹싹하기까지 한 언니가 사이코 사장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둘까 봐 다른 직원들은 노심초사했다.

옥심 언니와 어떻게 친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1층, 언니는 2층에서 근무했는데 언니가 헐레벌떡 출근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시절 여직원들은 거의 회사에 출근해서 화장했다. 언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장님이 오기 전 청소를 대충 해 놓고 빛의 속도로 화장을 했다. 먼저 파우더 파운데이션을 급하게 두들기면 언니의 땀구멍이 도드라졌다. 입술은 라인을 그리고 튀지 않는 색의 립스틱을 입술에 대충 얹고 마지막은 마스카라다. 아무리 바빠도 마스카라만은 포기하지 않던 언니였다. 이렇게 순식간에 화장을 끝내는 언니를 나는 옆에서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일용엄니 목소리의 오드리 도투, 옥심 언니가 드디어 연애를 시작했다. 남자 친구는 결혼식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즈음 옥심 언니 여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게 되었는데 결혼식 이벤트는 언니의 남자 친구가 맡고 내가 축가를 부르게 되었다. 

축가 부탁을 받고 나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신부가 꼭 팝송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동네 노래방에서나 노래 좀 불러 본 내가 사천 시골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그것도 팝송을 부르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혼식장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노래를 시작하자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하객들, 특히 시골 노인분들은 아주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눠서 결혼식장은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언니 커플과 같이 차를 타고 사천까지 가게 된 나는 언니 남자 친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인상은 날카롭고 언행이 경망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언니를 귀히 여기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설날을 코앞에 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옥심 언니는 설날 연휴에 경기도 현리에 간다고 했다. 그곳엔 대학 때 친했던 신부님이 군종신부님으로 사목하고 계시는데 그분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나는 현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신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나도 데려가 달라고 언니한테 매달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도 힘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멀리 떠나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언니는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부님을 만나러 ‘현리’라는 곳으로 향했다.      




상위 사진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미안해요, 전 짝사랑만 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