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그와 함께 걸어가네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까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 앞에서 열심히 선교를 하시던 여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선생님은 날씬한 몸매에 파마머리가 어깨까지 왔고 하얀 피부에 눈은 까만 초승달 같았으며 목소리는 맑고 높았다. 선생님은 일요일이면 우리 집에까지 오셔서 아직도 이부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린 나를 깨워 교회로 데려가시곤 했다.
선생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학장제일교회’였다. 내가 살았던 삼정송림맨션에서 아이 걸음으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로터리를 건너 학장 시장을 지나 고가 도로 아래에 넓게 자리한 공장지대 입구에 있는 곳이었다.
교회에 가면 먹을 게 넘쳤다. 초코파이며 사탕에 때론 삶은 달걀까지 달콤하고 든든한 간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한결같은 집념(?)으로 일단 교회를 다니게 되자 그다음부터 사탕과 과자의 힘으로 다녔던 것 같다.
그다음 교회를 다니게 되는 계기들이 하나둘 생겨났는데 첫 번째가 연극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의 탄생과 목동들, 동방박사, 스크루지 이야기 등으로 무대에 연극을 올렸다. 선생님의 지도로 몇 날 며칠 동안 연습을 하고 공연 당일에는 진하고 촌스러운 화장을 덕지덕지 칠하고 몸에 맞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의상을 입고 열연을 펼쳤다. 깜깜한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중요한 배역이든 작은 배역이든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신기한 것은 내 옆에 있던 친구들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계기는 찬송가나 캐럴을 배우던 일이 무척 좋았다는 점이다. 얇은 전지에 정성껏 써 내려간 악보들이 묶여 있는 찬송가 괘도 앞에서 우리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제비 새끼들처럼 입을 모아 목청껏 노래 부르면 선생님은 짙은 갈색 지휘봉 같은 매끈한 막대기로 가사를 연신 짚어 주셨다. 그때 좋아하던 찬송가는 ‘오 주여 나의 마음이~’로 시작하는 곡으로 후렴 부분에는 ‘멜~로디~멜~로디’하는 곡이었는데 뜻은 잘 헤아리지 못한 채 속절없이 경쾌한 이 곡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러다 학장제일교회를 그만 나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만 어린 내겐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어린 나는 내가 그토록 따르던, 나를 한없이 사랑해주던 선생님을 화장실도 안 가는 선녀인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와 함께 간 공중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그것도 나처럼 언니처럼 빨가벗고 열심히 때 미시는 선생님을 본 것이다. 나는 충격에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재밌는 사실은 목욕탕 사건 이후 선생님도 더는 우리 집에 오시지 않았고 나도 교회에 가지 않았다.
30년이라는 굽이치는 세월은 흘러 40대가 넘은 나이에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교회가 아닌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다. 6개월의 새 신자 교육을 받고 ‘루치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아직 어색하던 어느 날이었다. 토요일 저녁 중등부 미사에 가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가 들렸다. 그 곡은 바로 “오 주여 나의 마음이”라는 성가였다.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주께로 정해졌으니
나는 주 찬양하리라
깨어라 나의 영혼아
비파와 수금 들어라
이 새벽에 내가 찬양하리라
멜로디 멜로디
예수님은 나의 노래
예수 예수
예수님은 나의 노래
그 곡을 듣는 순간 소름이 돋고 눈물이 쏟아졌다. 내 신체 반응에 너무도 당황스러웠지만 발끝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따뜻함을 느꼈다. 초등학교 시절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찬송가 괘도 앞에서 열심히 노래 부르던 그 시절 생각이 났다. 어리고 어리석어서 알지 못했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분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이 성가는 그분과 나 둘만 아는 ‘사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늘 공기처럼 내 곁에 있어서 알지 못하는 그분을 알아차리게 되는 ‘사인’ 말이다.
요즘도 이 성가의 전주만 들으면 자동으로 눈물 꼭지가 열린다. 그리고 그와 함께 웃으며 열심히 노래한다.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주께로 정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