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웠어요.
-돌봄이 가능하고 혜택이 있는 곳으로 이사가면 되잖아요.
-주변에 친구들 없어요?
-직장은 또 구하면 되잖아요.
-한부모 혜택 없어요?
나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조언은 고마웠으나 하나하나 설명하는 건 곤란했다. 그것보다 더욱,
뼈져리게 느낀 고통은
아이에게 나 하나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현실이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
그리고 그 결정이 끝난 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다녀온 청수리 곶자왈에서의 견학 이후였다.
-어머니. 이런 말씀 드리긴 곤란하지만 아이가 떼를 쓰고 말을 듣지 않아요.
-말을 못하고 스티커를 스스로 떼지 못해요.
-아이를 위해서 생각을 좀 해보시지 않겠어요?
갚아야 할 빚이 많았고 하루하루 벌어 살았으며 갑작스러운 변화조차도 숨이 찰 만큼 힘들었으나
그 날 밤, 나는 바로 떠나자고 생각했다.
결정은 오래 걸렸으나 막상 섬을 떠나기로 마음 먹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단 직장에 이 사실을 알리자 예상했던 대로 핀잔을 들었다.
이래서 애 엄마는 쓰면 안된다는 래퍼토리는 여전했다.
-근로계약서까지 다 써놓고 이러기에요?
새로운 프로그램을 교육받았는데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까 날벼락이었을 부장님은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남편이 없으니까 함부로 대한다는 착각이 날카롭게 가슴에 박혔다.
그 시절에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다 그 이유, 라고 생각할만큼 바보였다.
-누군 연휴때 일하고 싶어요? 그동안 이주임만 봐주셨는데 이번엔 안되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여자대리가 또 태클을 걸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형평성에 어긋난다는데 나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앞에 있는데 대놓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나누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다.
-아, 저 이번에 출근할 수 있어요.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봐줄 사람도 없으면서.
-그래. 너도 어차피 갈 건데 마지막엔 연휴에 일 좀 해.
여자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불쌍한 척 하며 동정심으로 먹고사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책임감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적당히 일해. 네가 이것저것 일을 벌리니까 나까지 힘들어지잖아.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여자대리는 내가 미웠을 것 같다. 상황이 안좋은데도 불구하고 취직을 시켜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에 이것저것 의견도 내보고 서류정리를 다시 작성한 것은 나의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여자대리는 해왔던 대로, 아무런 변화없이 지냈을 지도 모른다.
-거봐. 어차피 몇 년 다니다 그만둘 걸 왜 이것저것 바꿔보겠다고 그 난리를 쳤니? 무책임하게.
그 말이 맞았다. 할 말이 없었다.
-어머, 오늘은 웬일로 혼자 왔대?
오랜 시간 나를 미워했던 여자대리는 아이 없이 회식자리에 온 나를 보고 놀란 듯 했다.
처음으로 아이가 없이 참석한 자리. 정말 우습지만 마지막 회식자리에서야 나는 비로소 제대로 음식을 입에 넣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래. 잘 살아라.
-이주임, 그동안 고생했어요.
누군가는 진심어린 인사를, 누군가는 그냥 지나가는 인연에 대한 아무렇지 않은 인사를 했다.
그 인사를 뒤로 하고 음식점을 나와서 일주도로를 운전했다.
한림에서부터 협재 해수욕장, 그리고 신창리를 지나 모슬포까지 하염없이 운전했다. 낡은 중고차에서 덜덜 소리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내 가슴속에서 튀어나오는 언어가 더 크게 들렸다.
-그래도 고마웠어요.
땀 흘리며 열심히 청소했던 직장 내 화장실은 내가 없어도 누군가 청소할 것이고, 수많은 서류가 정리되어있는 컴퓨터 역시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정리해놓을 것이었다. 직장은 그런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한 날들이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연장근무를 할 수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기면 꼬박꼬박 반차를 써야 하는 나를
일하게 해주어서 고마운 곳이었다.
행복했던 순간순간을 기억했다. 이것만큼은 잊어버리지 말자고 마치 사진을 찍듯이 꼭꼭 가슴으로 찰칵찰칵 찍었다.
헉, 하고 놀랠 정도로 가끔씩 뱀이 출몰했던 오솔길의 낙엽들.
클래식 음악이 나오다가 갑자기 광고소리에 놀라서 허겁지겁 관리실로 뛰어들어갔던 오후.
계절이 바뀌는 걸 시시각각 모든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곳.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참 많이 울었던 작은 동굴.
예쁘게 차려입고 들어오는 관광객들에게 사진 찍어주면서 남겼던 인** 후기들.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수많은 계절들이 거짓말처럼 낱장낱장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스쳐지나갔던 인연들과 풍경, 그리고 애처로웠던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면서 표현하기 힘든 애절함이 솟아올랐다.
-결국 떠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