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퇴근 후 연수를 듣기로 했다. 연수 날이 되자, 나는 평소보다는 약간 다른 옷을 입었고, 소프트렌즈 몇 개와 안약을 주머니에 주워 담았다. 그것은 혹시라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 알량한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렌즈를 끼웠다. 오른쪽 눈에는 끼웠는데, 항상 왼쪽에 끼우는 게 어려웠던 것 같다. <무간도 III: 종극무간>에서 유덕화는 렌즈 하나 끼우는데 굉장히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데, 그 고통과 일그러짐은 나 역시 못지않았다
왼쪽에 끼우는 건 몇 번 넣었다 뺐다 하다가, 어떻게 들어갔지만 눈이 점점 아파 와서 그냥 빼내려 했다. 그런데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흰자에 손끝을 대고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동공 쯤에 있는 것 같아 거기 손을 대 봤는데,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점점 말라붙어 가는 듯했다. 안약을 넣어 보고, 눈에 물을 끼얹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봤지만 렌즈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동료 교사들이나 학생들이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나는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만 했다. 렌즈 끼우다 이렇게 됐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학생들은 왠지 신나 보였다. 혹시나 렌즈가 빠졌나 해서, 렌즈를 끼우던 싱크대 앞 바닥은 물론, 음식물 찌꺼기가 엉겨 붙은 싱크대 거름망까지 뒤졌으나 렌즈는 없었다. 그것은 내 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오른쪽 눈은 멀쩡했다. 그것으로 운전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하게도 왼쪽 눈은 감았다 떴다가를 반복했다. 기어이 연수에는 갔었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로 가독했으나, 나 역시 이제는 아저씨 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평소보다 더 집중하기 어려웠던 건, 한쪽 눈이 점점 더 아파 왔기 때문이었다. 피카소의 스케치와 채색 기법을 배우는 연수였는데, 제법 그럴싸한 그림까지 그려 놓고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도 렌즈를 빼려 낑낑댔다. 손에 묻은 물감 때문에 잘못될까봐 손을 빠득빠득 닦아냈지만, 눈시울에서 뭔가 덩어리 같은 게 보여 렌즈인가 건드렸다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튀어올랐다. 그것은 아마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었겠지만, 어쩌면 핏덩어리라도 나올 것 같았다. 동공 쪽에 잘 보니 렌즈 같은 게 있다. 그런데 그게, 끄트머리에 주름이 잡혀 있다. 렌즈가 말라붙은 것이다.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떼어지질 않아서, 결국 말라 붙은 것이라 여겼다. 그러다 문득, 나는 그게 렌즈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저것은 각막이 아닐까?구글이나 위키 등에 각막을 검색해 봤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손상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더 두려워졌다. 그렇게 나는 그리던 그림 한 장만 북 찢어 챙기고, 물통, 붓 등은 모조리 놓아둔 채 강의실을 떠났다. 그 후 연수에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오른쪽 눈의 렌즈를 빼고, 안경을 썼다. 이미 시력이 손상된 건지, 평소에는 분명히 보였을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수위는 내가 연수받으러 온 교사일 게 뻔한데, 왜 여기 있냐, 연수를 어디서 했냐, 몇시까지냐 등을 물으며 다그친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몇 번이고 나는 되물었으나, 나중에는 그냥 무시하고 가버렸다. 연수원을 내려가던 길엔어둡기까지 한 데다 머릿속도 복잡하여, 어둠 속을 좀비처럼 걸어오는, 연수원에 놀러 나온 동네 주민들을 칠 뻔했다. 광주 시내 큰 병원 응급실이라면 어디든 전활 걸었으나, 진료 과목에 안과는 없었다. 대학 병원 응급실은 왠지 막막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119에 전화했는데, 렌즈를 잘못 끼우다 눈을 다친 것 같다고, 이런 걸로 전화해도 되느냐 물었다. 의료 상담은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은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는 수밖에 없으며, 국립대 병원은 대기환자가 많으니 사립대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이미 내비게이션이 그리 안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순간, 시력 손상보다도 이 소식에 놀랄 가족들이 걱정됐다.
병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도, 혹시나 렌즈가 들어 있나, 각막은 괜찮나 하고 눈을 부릅뜨고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왼쪽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눈꺼풀이 쳐져서 잘 안 떠지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눈꺼풀 수술권 당첨됐을 때 써먹을걸.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결국, 수납하러 들어오며 천장을 본다. 언젠가 큰 수술을 앞두고, 이동식 침대로 수술실에 옮겨지며 병원 천장을 바라본 적이 있다. 푸른 하늘이 아니라 하얀 천장이라니, 끔찍하군. 하고 생각했는데, 다시 왔다. 대학병원에 올 때마다 항상 죽음을 떠올린다. 대기 순번이 많이 밀렸다. 중풍으로 쓰러져 중년 아들이 데려온 듯한 노인이, 이동식 침대에서 중얼거리고, 방역복 입은 사람들이 구급차 대여섯 대 주위에서 응급실에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