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기:일본의 신화-2. 서문(2)
세상의 시작에 관하여
<고사기>에서 표현한 세상의 시작은, 이것저것 뒤섞여 혼돈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것과 저것을 나눌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이름도, 모습도, 움직임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다, 라는 말조차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갈라진 뒤로, 점차 여러 신들이 생겨났다. 신들은 처음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점차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성서>에서는 절대적인 신이 의지를 갖고 혼돈스런 세상에 온갖 만물을 수 일간에 걸쳐 만들어낸다. 이것은 신이라는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신화에도 물론 신이라는 것은 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무질서한 혼돈 그 자체가 세상을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혼돈이라는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중국 신화에서는 혼돈에서 거인 반고(盤古)가 생겨나고, 일본 신화에서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나서야 신들이 깨어난다.
이렇게 고대 일본의 신화는 세상이 신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졌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혼돈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과학에서도 역시 세상을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 본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일본인들이 고대부터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우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닮아 있을 뿐이다.
한편, <고사기>에 서술된 이야기들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보편성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국가 권력이 이 이야기를 공식으로 채택했으므로, 적어도 여기서부터는 보편성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 일본인들의 종교관에 대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졌으며 신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이미 혼돈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혼돈이란 것은 뭔가 대단한 의지를 갖고 있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고, 어쩌다가 그것들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리는 철저한 의도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만들어지는 것들에 경이로움을 느끼곤 한다. 이것은 <성서>의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우연이란 것이 만들어내는 것들에 더더욱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그것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도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더 놀라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고사기>의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세상을 만드는 것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질서일까, 아니면 혼돈일까? <고사기>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질서가 자리잡으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혼돈 속에서 생겨났다. 고대의 일본인들에게는, 혼돈 그 자체가 신이었다. <고사기>는 우리에게 세상의 기원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