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8일, 일본국 전 총리 아베 신조가 나라 시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 중이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학교에서도 일본사나 중국사에 관해 자주 언급하긴 하지만, 학생들은 내게 아베의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기도 하였으며, 내가 아베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묻는 ‘후미에(踏み絵)’이기도 했다. 그중 두 번째 물음을 생각한다면, 내가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다. 아베가 없었더라도 다른 일본 정치인이 그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도 최고급 요인인 국왕 및 왕세자, 대통령, 총리 등에 대한 암살 및 그 미수는 존재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일어난 이번 총리 암살은 일반적인 사건이기도 하나, 일본적인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선거에 미칠 영향이라든지, 국내에서 지탄받은 일본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총리 암살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암살의 역사는 아무래도, ‘추신구라’로 유명한 아코 낭사 사건(1703)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에도 막부 시기, 아코 번(오늘날의 효고 현 일대)의 다이묘(영주) 아사노와 막부 직속 신하 기라는 쇼군의 거성에서 시비를 일으켰다. 이에 아사노는 절대로 칼을 뽑아서는 안 되는 곳에서 칼을 뽑았으나 기라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아사노는 쇼군의 거성에서 감히 칼을 뽑은 죄, 그리고 칼을 뽑고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한 죄로 비난받으며 할복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 아사노의 영지는 몰수, 그의 가신들은 낭인 무사, 즉 낭사가 되었다. 오이시 요시오를 비롯한 낭사들은 1년 동안 암살을 준비, 마침내 기라를 습격하고 그 머리를 잘라 옛 주군 아사노의 묘소에 바쳤다. 그 뒤 막부의 명령으로 낭사들은 모조리 할복을 강요받았다. 그로부터 157년 뒤, 사쿠라다몬 밖의 변(1860)이 일어났다.
1858년, 에도 막부의 실권자였던 다이로(오늘날 일본에서 내각관방장관 정도의 지위일까?) 이이 나오스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도록 하면서,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반대파를 탄압했다(요시다 쇼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반대파 중 한 명이었던 미토 번(오늘날의 이바라키 현 일대) 영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영지를 몰수했다. 이 조치로 미토 번의 무사들 역시 낭인이 되었으며, 무사들은 원한을 품고 에도 성에 입성하는 이이 나오스케를 사쿠라다 문 밖에서 습격,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잘랐다. 낭사들은 이이 나오스케가 거느린 히코네 번 무사들의 반격으로 대부분 쓰러지고, 남은 이들은 할복 명령을 받거나 처형되었다.
이 두 사건을 총리 암살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이 두 사건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아코 낭사 사건은 막부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것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었으면서도, 무사는 칼을 뽑았으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려야 했으며 시대에 일어난 비극이고, 영웅담이었다. 아코 낭사 사건은 쇼군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주군의 원수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런데 사쿠라다문 밖의 사건은 막부의 중신을 살해하는 것으로,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 사건을 계기로 그러한 상황은 점차 가속화된다. 덧붙여,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는 근대식 권총이 사용되는 등, 근대 문물의 영향 또한 미치고 있었다.
두 사건의 암살자들은 흰 다스키(たすき)를 묶은, 무사의 정장을 갖춘 모습으로 표현되곤 한다. 이는 자신들의 행위가 무사의 도리라는 것을 정면으로 내걸어, 사회적으로 정당한 행위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명예를 추구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 암살의 역사에서 두 사건은 모범으로 여겨졌고, 암살자들은 의사, 열사, 그리고 지사로 추앙되었다. 이후 일본 역사에서 총리 등을 암살한 이들이 일각에서 의사, 열사, 또는 지사로 추앙받는 것 역시, 아코 낭사 사건과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의 정서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