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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남 Sep 28. 2022

33. 살아남은 자의 슬픔  :도망시悼亡詩(2)

_옥 같은 너를 차마 어찌 묻으랴  

올해 한가위는 어수선하였다. 차례음식을 준비 중인데 포항의 한 아파트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집중호우를 동반한 태풍 ‘힌남노’로 인해 침수 피해가 우려되자 주차된 차를 옮기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주민 7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것이다. 특히 쉰이 다 되어 낳은 중학 2학년 아들의 마지막 인사,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엄마!” 그 사연이 전해져 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다.     


박완서 소설가는 26세 의사 아들이 사고로 앞서갔을 때 묵주를 집어 던지며 신을 원망했다. “그애 없는 세상의 무의미함도 견디기 어렵거니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나 하는 회답 없는 죄의식은 더욱 참혹하다. 참척慘慽을 당한 어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다.”라고 썼다.      


옛말에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이치에 어긋난다 하여 참척慘慽 또는 역리지척逆理之慽이라고 했다. 또 자식은 부모를 선산에 묻고,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다. 앞쪽에서 죽은 아내를 애도하며 쓴 도망시悼亡詩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우리 선조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과 형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남긴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다산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 형님 정약전이 세상을 떠났고 또 막내아들 농아를 잃었다. 유배지에서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정약용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걱정이 많아 너에게 農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나중에 집안에 화가 닥치면 너는 농사나 지으며 살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렇게라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나에게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 나는 죽는 게 나은데도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게 나은데도 죽어 버렸구나....  

    

다산은 비통한 마음과 함께 막내아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네 모습은 깎아 놓은 듯이 빼어났단다. 코 왼쪽에 조그마한 사마귀가 있고 웃을 때는 양쪽 송곳니가 드러났지. 아, 나는 오로지 네 모습을 그리면서 꾸밈없이 내 마음을 너에게 알리노라.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묘-

이덕무의 누이동생은 18살에 서씨에게 시집갔으나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다가 28살에 죽었다. 다음은 이덕무가 죽은 누이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전날 저녁부터 그날 아침까지 집안 식구들은 모두 굶었다. 네가 그것을 알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그 때문인지 병이 더욱 심해지더구나. 아이를 네 시댁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러고 나서 네가 곧 숨을 거두었다. 늙은 아버지는 슬피 울고 다른 식구들도 따라서 통곡을 했다. 하늘 아래 이처럼 슬픈 소리가 또 있을까?....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형제가 몇이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과 4남매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겠구나.... 컴컴한 흙구덩이에 옥 같은 너를 차마 어찌 묻겠느냐? 아아, 슬프구나.   


연암 박지원은 죽은 누님을 그리며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떠나는 이 정녕 뒷기약을 남기지만/ 오히려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보내는 이 하릴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학자 조성기(1638~1689)는 죽은 며느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문을 썼다.     


아아, 우리 새아가,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서너 번이나 이런 슬픈 일을 만났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 며느리의 죽음의 가장 큰 아픔이구나. 더구나 늙은 이 몸이 나이가 들수록 병이 더 깊어지니 어찌하랴. 늙은 나를 보살피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 며느리밖에 없었는데 이제 며느리마저 나를 버리고 가 버렸구나. 며느리를 잃는 아픔을 세상에 누군들 겪지 않으랴만 오늘 내가 만난 이 아픔만 하겠는가?

홀로 빈 집에 누워 눈물만 쏟는다. 하늘이여, 사람들이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처럼 혹독하신가.     


슬픔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적이다.

정종한(1764~1845)은 “아내를 잃고 나자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비통하고 그리운 마음에 정신이 멍해지고 눈이 침침해져서 붉은 것이 푸른 것처럼 보였다.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지고 마침내 늘 외우던 책을 덮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다 홀연히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객사(客邪:질병의 원인이 되는 귀신을 이르는 말)라는 것이구나. 마음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틈을 타서 침입하여 맞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예전에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 것으로 일과를 삼자 광대의 환영이 점차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객사를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저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 한다.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며 울며 매달리는 여인에게 부처가 말했다.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움큼만 얻어오시오.” 여인은 성안을 돌아다녔지만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여인은 크게 깨달았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는구나!’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만 죽음의 고통에 쌓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나가보니 죽음이란 삶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아들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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