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스토리 컨퍼런스 2025 :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
바야흐로, 아니 명실상부 AI 시대. 챗GPT가 등장한 지 만 3년이 채 안 되었지만 대한민국 2030 중에 챗GPT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지브리 프사 정돈 만들어 봤을 테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소재만 던지면 문장을 뽑아내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썩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챗GPT 등장 초기에 'AI에게 직업을 뺏기면 어쩌지?'하는 해묵은 우려에 대한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AI에 인간이 직업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AI를 잘 활용해야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스스로 무언가를 잘 하기보다, AI에게 일을 잘 시키는 사람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
그런 시대에서 인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클로드와 같은 글쓰기에 특화된 AI에 특정 작가의 문체를 학습시키고, 'OO작가 스타일로 한국 현대문학 경향에 맞는 문제적인 주제의 단편 소설을 써줘'라고 시키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는 AI 작가가 신춘문예에 등단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차, 롱블랙이 주최하는 2025 롱블랙 스토리 컨퍼런스에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이 지닌 '대체불가능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김초엽 작가님의 세션에 대한 후기다.
(*본 아티클은 김초엽 작가님이 세션 중에 발표하신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김초엽은 포항공대 화학과 석사 과정까지 공부한 이공계 엘리트이자,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SF 소설을 쓰는 소설가다. SF작가인 만큼 AI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여러 매체에서 AI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동안 AI라는 주제를 기피해 왔다고 한다. "SF 작가에게 중요한 건 과학 지식이나 미래 예측이 아니라 상상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세돌vs알파고 대국이 성사되는 등, 당시 AI 열풍이 불면서 너도 나도 AI 관련 소설을 발표했는데 김초엽의 인생 신조가 '남들이 잘하는 걸 나도 잘하려고 하지 말자'라서, AI 소설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한다.(ㅋㅋ)
인간은 하나의 개체로서 살고 기억이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근본적인 고립감을 갖고 사는 존재다. 인간이 감각할 때 느끼는 순간의 기분인 '감각질'은 공유될 수 없고,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감각 거품(*움벨트)에 갇혀 살아간다고 한다.
*움벨트 : 인간이나 동물의 감각기관과 정보처리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환경 세계
인간은 하나의 몸에 갇혀서 다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편협한 스토리텔러다. 김초엽 작가는 인간의 이러한 '근본적인 고립'이라는 특성 때문에 인간이 이야기를 갈망한다고 했다. 우리가 서로의 감정을 완벽하게 공유하는 인공지능이라면, 다른 이의 주관적인 세계, 즉 '이야기'를 갈망하지 않을 테니까. 타인과 분리되어 다른 삶을 경험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를 부여한다는 것.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결핍과 한계가 인간만의 고유성과 개성을 만든다.
김초엽은 "하나의 이야기가 완전하게 전달되어서 하나의 이야기만으로 해석된다면 좋은 이야기로 부르지 않는다. 불완전하게 전달돼서 수천 명에게 수만 개의 의미를 가질 때 좋은 이야기라고 부른다"고 덧붙였다.
나의 경우에도, '좋은 이야기'로 오래 기억되는 이야기는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서 표면적인 의미 그대로 읽히는 쉬운 책이 아니라, 해석의 여지가 다분해서 상상의 꼬리를 무는 이야기다. 생각을 더 이어 나가거나 어딘가에 적으면서 정리하지 않고는 못 참겠는 흥분과 설렘은 대부분 그런 다분한 해석의 여지가 열려있는 이야기에서 나온다.
반면, AI가 만든 이야기는 굉장히 보편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성형 AI는 확률에 기반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쓰이고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 안전하고도 일반적인 이야기를 뽑아낼 것이다. AI가 늘 정답에 가까운 대답을 제시하는 게, 스토리의 측면에서는 약점이 될 수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모든 인간 창작자들은 AI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가치를 증명해내기 위해 모두에게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창작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하고 철학적인 이야기만이 좋은 이야기란 뜻이 아니다. 타인은 절대, 죽어서도 이해하지 못할 나만의 움벨트에서 벌어지는 생소하고, 매력적이고, 신기하고, 때로는 충격적이기까지한 자신만의 서사를 꺼내보일 수 있는 창작자만이 보편적인 이야기와 대치되는 '인간다운' 창작자로 존재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1인칭 시점이라는 우리의 한계가 곧 가능성이다
김초엽은 내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설득과 고군분투의 과정이 곧 인간의 고유성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온전히 그의 몸으로 부딪힌 고유한 그의 삶과 서사는 그 자체로 모두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한정된 삶에서 직접 얻지 못하는 다양한 경험과 정보, 지식을 간접적으로 습득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김초엽 작가는 이러한 설득과 고군분투의 과정이 곧, '동시대의 이야기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김초엽 작가의 멘트를 그대로 옮기면서 롱블랙 스토리 컨퍼런스 후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각자의 세계는 몸에서 시작돼서 몸에서 끝난다. 타인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갈망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궁금해 한다. 한계와 불완전함 때문에 이야기가 기쁨을 준다. 이러한 점이 이야기를 읽고, 쓰는 우리의 자부심이 되었으면 한다.
사실 세션을 듣기 전에는 특정 작가의 문체와 집필 스타일을 챗GPT에게 학습시킨 뒤 이야기를 쓰게 한다면 언젠가는 어떤 작가라도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션을 듣고 난 뒤에는, 인간으로서의 창작자들이 만드는 가치 있는 이야기의 핵심은 단순히 문장, 문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만의 시선과 태도로 겪으며, 살아낸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하고도 강력한 서사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한 스토리텔러가 되기 위해선 되도록 많은 문장을 읽거나 필사를 하는 등 기술적인 인풋을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야기의 원천이 되는 창작자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 시대의 이야기꾼들에게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도저히 나는 따라해낼 수 없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하고 이마를 탁 치게 하는, 난생 처음보는 '관점' 그 자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