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식하게 지켜가는 고유의 멋
이탈리아의 북부, 밀라노의 경우, 요즘 말로 돈 맛을 좀 본 덕분, 그러니까 공업화의 혜택을 좀 본 덕분에 나름대로의 고층 건물도 있고, 일반 주거지역의 경우에도 미국 냄새가 난다. 여기서 미국 냄새라는 건, 바람직한 냄새는 아닌데, 가령, 건축의 경우에도 일단 크게 짓는 등의 다소 막 자란 졸부 냄새가 나는 경우를 뜻한다. 보통의 유럽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래도록 아웅다웅 거렸던 그들만의 문화가 건축에도 녹아있기 때문이다. 단지, 관광객들 깃발 들고 쫓아다닐 궁전, 성당 등의 유적지(Historical spots)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론리 플래닛’에서 굳이 찍어주지 않은 골목을 만나도 경이로울 때가 있기 때문인데, 시칠리아가 그랬고, 트라파니가 그랬다.
칼바람 느낌의 선선한 바닷바람의 무한 공격 이후에, 집업 자켓을 가지러 되돌아가던 해안 도로의 산책로는 해변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미 아름답고 설레긴 했지만, 그 길 중간에 시가지로 들어가는 골목 모두 아름다웠다. 얼굴에는 미열이 몰리고, 온 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으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이고 걷는 와중에도, 골목 골목 마다 조금씩 다름 생김새의 매력에 빠져,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모든 것을 한 번에 갈아 엎는 서울 출신의 관광객에게 유럽은 항상 답답한데 멋진 남자친구 같다. 그 골목, 그 벽돌길, 한 번에 갈아 엎어 아스팔트 깔자는 주장이 있었을 법도 하지만, 하나 하나 원래 있던 그 돌, 그 자리에 잘 있을 수 있게 보수공사 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 더 눈에 띄는 간판 세우자고, ‘나 혼자 튄다’ 인테리어로 이목을 끌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보다는 건물 전체, 그 보다는 골목 전체, 그 보다는 동네 전체와 어우러지는 칼라와 소재를 선택해주는 사람. 답답하지만, 멋질 수 밖에 없는,엄청나게 고집 세지만, 미워하기 어려운 남자친구 같다.
길을 걷다 보니,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작은 마을 공원에서 저녁에 오페라를 공연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꽤나 대단한 레파토리였다. ‘라 트라비아타, 토스카, 아이다’. 그래, 이건 얘네들의 고향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오페라 공연이라니. 오페라를 공연하기에는 공원의 theatre객석 규모가 너무 작았다. 200석 정도가 고작일 것 같던 곳. 학예회도 아니고, 소극장인데, 이게 가능할까. 동네 음악학교에서 무료 잔치를 벌이나. 나는 티켓 오피스까지 슬금슬금 걸어갔다. 내용을 보니 동네 잔치 학예회가 아니었다. 나는 짐짓 더 놀랐다. 티켓 오피스 아저씨는 내게 신이 나서 말했다. 오늘은 공연이 없고, 다음 주에 다시 시작한다고. 나는 꼭 오늘 볼 필요는 없지만, 저기서 정말 공연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분명히 공연한다고. 여름 밤, 야외 공연은 오랜 전통이라고.
예술의 전당 야외 극장에 간 적 있다. 그것은 꽤나 마음 먹고 간 공연이었다. 일단 문화생활은 마음 먹고 해야 하는 환경이고, 날 잡고 방문해야 하며, 근거리에 다양한 프로그램도 없다. 내 서울살이에 비해, 시칠리아 동네 사람들은 참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택 계단을 내려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야외 극장으로, 여름 밤이면 찾아가 노래를 듣는다. 생각만해도 부러운 그림이었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여름 밤, ‘라 트라비아타’를 함께 즐기는 노부부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다음생을 기약해야지.
걷기가 버거워질 때쯤, 나는 ‘바비브라운’ 여사라도 된 마냥, 이탈리아 약국’Pharmacy’들을 들렀다. 유럽의 약국이 대부분 그렇다지만, 특히 이탈리아의 약국은, 그 지역에서만 만드는 천연 화장품 라인들이 약국 마다 다르게 구비되어 있다고 이름이 나 있었다. 실제는 비타민이나 좀 사볼까 들어갔지만, 명불허전 이탈리안 천연 크림들의 다양하고 난해한 컬렉션을 보니,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한국에는 4-5배 비싸게 팔리는 수입 화장품 가운데, ‘산타마리아노벨라’의 경우에도 거칠게 말하면 동네 수도원의 고유 제조 방식에 따라 소량 생산에 적합한 레시피였다고 들었다. 아직 차마 한국 수입업자들의 눈에 띄지 않은 ‘잠재적 산타마리아노벨라’들은 여전히 동네 약국 찬장마다 그득했다.
자켓 가지러 간 사이에 두 어군데 둘러보니, 열감이 가라 앉질 않았다. 발걸음을 보채, 가리발디 동상으로 내달렸다. 항구 앞, 우리의 1일 집, 예쁜 주택으로 내달렸다. 작지만 알찬 테라스 문을 한껏 열어두고, 뜨겁게 땀을 흘리며 한 숨 자야겠다. 트라파니의 오후가 너무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