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없이 만난 아름다운 도시, 트라파니 (Trapani)
트라파니는 작지 않은 도시다. 듣자하니 오랜 시간동안 군사적 요충지였고, 실제 이탈리아 해군 기지 중에서도 트라파니 상주 부대 규모가 꽤 된다고 한다. (지도를 놓고 보면, 아프리카와도 가깝고, 몰타는 물론, 약간 멀리 코르시카 섬도 있다. 그러니까 '걱정인형' 안보 담당이라면 프랑스의 동태까지 생각해야 할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입지는 입지.)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소금의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유럽 3대 천일염인가, 뭐 그렇다는데, 모든 것을 차치하고, 트라파니를 구글에 검색하면, 일단 '소금'이 나온다. 소금 연구가, 요리 연구가였으면 아주 좋은 역사 박물관이었을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양은 가득히' 한 번 찍어보려고, 이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소금이고 해군이고 아무것도 모르겠고, 일단 아무 정보 없이, 할머니가 쥐여준, 아날로그 지도 하나 가지고, 파라솔 그려져 있는 그놈의 해변에 가서, 못 다한 Beach Holiday를 하고야 말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해변으로 가는 길이었다.
누구의 말이었던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말.
가득 담긴 가지 각색의 초콜릿마다 어떤 맛일지 설레긴 해도 걱정반 기대반 한 입 물기까지 불안불안한 초콜릿 상자. 그런 나를 그저 고개 끄덕이게 할, 최강 단 맛의 초콜릿이 걸렸다. 트라파니가 그랬다.
트라파니 구 시가지는 심지어 파리에서도 뱅돔 광장 같은 느낌, 그러니까 기품있고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정말 귀족들이 노닐었을 것 같았다. 옛 시대 소금을 생산했다고 하면, 무역이 일찍이 발달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그 동네는 돈이 돌았을 것이고, 그래서 트라파니는 꽤나 부유했을법 하다. 그런 도시 폼새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직전 떠나온 깡시골 산 비토 로 카포와의 비교는 의미가 없고, 그나마 최근까지 휴양지로서 돈을 잘 벌었음직한 몬델로와 비교해도 트라파티가 더 돈 많은 집, 진짜 잘 살았을 것 같은 맛이 있다.
"야, 여기 너무 예쁜 거 아니냐?"
"어, 심지어 커피도 이탈리아 온 것 중에 제일 맛있어."
우리는, 돌이켜보면 강남역에서 선릉역까지 거리도 안 될 거리를 정말 이 카페에서 홀짝, 저 카페에서 홀짝 거리며 유랑했다. 누가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느려터지게 온 골목을 휘저었다.
중세부터 한 번도 재개발 업자들의 공격을 받아본 적 없을 법한 아름다운 구 시가지. 유럽을 가면 항상, 저들 일하고 먹고 자는 신시가지와 그래도 옛날 모습 그대로 남겨둔 구 시가지의 구별되고 상반된 매력이 부럽다. 특히나, 백색 대리석 으리으리한 트라파니 구시가지 골목들은 무지하게 부러웠다.
우리는 약간의 신시가지 골목맛을 좀 보고 나서야, 해변도로, 해변 산책로를 발견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중해성 허리케인님이 어지간히 몰고오신 바람이었다. 바람이 차진 않았으나, 바람의 강도는 약하지 않았다. 은근히 모랫바람 날려대는 해변길을, 비치 홀리데이 특공대, 두 여자가 저벅거리며 걸었다.
곧 이름도 멋진, 리도 레스토랑 과 해변 (Restaurante Lido & Beach)가 나타났다. 프라이빗 비치란, 돈 내고 입장하는 곳이다. 음료나 식사도 팔고, 해변 앞에는 선베드들이 놓여있었다. 이미 선탠 중이신 어머니, 아버지들이 보였다. 우리도 자리값을 내고 서서히 누워보았다. 머리당 5유로. 산 비토 로카포에 비하니 정말 착한 가격이었다.친구는 묵묵히 책을 읽었다. 나는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지럽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한이 몰려왔다. 나만 그런지 확인해야했다.
"너 괜찮아? 난 좀 추운 거 같아."
"난 괜찮아. 난 여기 계속 있으려고."
"그래, 그럼 내가 숙소에서 옷을 가져오겠어."
나는 그렇게 두꺼운 옷을 입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를 줄 몰랐다. 함께 걸었던 친구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나는 운전도 안 했는데 이유가 뭘까. 독서 분위기를 망칠라 살금살금 일어났다. 홀로 다시 트라파니 구 시가지를 걷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