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된단다.
항구 바로 앞, 항구가 보이는 오래된 건물 3층. 항구와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정한 소박한 B&B. 몇 없는 게스트들때문에 일어나는 시간을 양보하기 싫었던 할머니 호스트는 우리에게 8시 45분까지 올 거냐고 재차 확인했었다. 그런데 우리는 8시 10분에 도착했다. 정말이지 배 한번 타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조금 일찍 도착하니, 올라갈 재간도 없었다. 호텔스닷컴(Hotels.com)에서 알려준 전화번호는 그저, 자동응답으로 넘어가길 수 차례. 너무나 미안하다는 표정의 잠이 덜깬 할머니가 문을열어주었다. 8시 25분이었다.
일단, 친구는 할머니가말해준 주차장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복잡한 구 시가지 한 켠의 B&B의 위용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잘 방 손님더러 다른 손님이 왔으니 일어나라며 노크했다. 흡사 하숙집 할머니처럼 미주알 고주알 잔소리를 늘어놓던 할머니의 노크 뒤, 우리 방에서는 누가 봐도 말끔한 노신사가 나왔다.
"본 죠르노(아침 인사)"
흰머리 희끗희끗한 노신사는 아주 말끔한 양복을 입고 단정한 슈트케이스를 밀며 나왔다. 10만원이 채 안되던 B&B의 가격과는 정말이지 매칭이 잘 안되는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잘 배웠음직한 영민한 눈망울로, 할머니와 몇 마디 더 나누던 노신사는, 친구가 주차장을 찾으러 나갔다는 말을 듣고, 나를 안심시키려 몇 마디 더 거들었다.(아주 고급스럽던 그의 영어를 최대한 반영한, 의역 대화로 기재하겠음.)
"금방 찾을거예요. 아침에는 교통량이 좀 있지만, 그래도 공용 주차장이 잘 되어 있어요."
"아, 네."
"여기 창문 밖을 좀 보세요. 경치가 참 예쁘지 않나요?"
그는 여즉 호스트가 정리하기도 전, 자신이 이미 말끔하게 정리해둔 방 발코니로 나를 안내했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3층 방. 친구가 제대로 시간을 맞출지, 배 타러는 어딜가야하는지, 온갖 걱정에 머리가 아팠던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조용하고, 아늑한 풍경. 창문 밖, 발코니의 코딱지만한 테라스 의자에 야자수 잎사귀가 손에 닿도록 넘실 거렸다. 나는 잠시나마 넋을 놓을 뻔했지만 얼른 정신차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흉내를 냈다.
"아, 사실 지금 배를 타러 가야하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언제 올지 걱정이에요."
"배를 타러 나가요? 파비냐냐 섬?"
"네."
"정말 좋은 선택이에요. 그리고걱정 하지 말아요. 친구는 곧 올거예요."
그 때, 정말 친구가 전화왔다. 문 앞이니 내려오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잘 다녀와요."
노신사는 제 집 손님 배웅하듯, 할머니와 둘이 문밖에 서서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시계를 보니 8시 45분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항구의 페리 선착장으로 내달렸다. 마음 한 켠에는 불안감이 몽글몽글 피어 올랐다. 트립어드바이즈(Trip Advisor)에서 말해준 번호로 전화했다. 또다시 자동응답으로 넘어갔다. 9시에 출발이라면, 어디든 여행객 같은 무리가 보여야 하는데, 어시장 사람들만 눈을 굴레굴레, 왠 동양여자 둘이 서성이고 있으니, 말을 걸고 싶어 입술만 옴찔거리고 있었다. 결국 전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Gmail로 메일을 썼다. 오늘 9시 출발인데, 어떻게된거니. 1분이 지나자 아래와 같은 답 메일이 왔다.
'오늘 바다에 지중해성 허리케인이 있어서, 출항할 수 없다. 오늘 프로그램은 취소되었다. 미안하다.'
"안 돼!!!!!!!!!!!!!!!!!"
"하하, 괜, 괜찮아."
"야, 미안하다. 내가 새벽에 깨워서 여기까지 왔는데."
친구는 멍한 기분 애써 감추며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절대 편치 않았다. 일단, '비치 홀리데이'를 외치는 그녀에게 1시간씩 운전시켜 도착한 것이 너무 미안했다. 늘어지게 잠이라도 재웠어야 할 것 같고, 아침에 비온다던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싶어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니, 구글이며 네이버며 온갖 곳을 다 뒤져 왔는데, 추석 무렵 시칠리아에 지중해성 허리케인이 온다는 말은 듣고 보도 못했다. 세상에, 이것은 무슨 일인가 말이다. 나는 어시장 어귀에서 주저 앉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나마 그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동행해준 친구에게 오늘 하루를 잘 보내도록 최선을 다해야했다. 아까 받은 지도를 펼쳤다.우리 숙소는 구 시가지의 한 끝이었고, 구 시가지를 가로질러 걸어가면 해변이 두 개나 있었다. 지도를 쥐어주며 , 할머니가 거기서 놀라고 두 번이나 콕 찝어주지 않았던가. 나는 눈을 번뜩거리며 말했다.
"트라파니 해변으로라도 가서 놀까?"
"그래, 일단 가자."
우리는 뛰어 오던 길 다시 되돌아 터덜터덜 걸었다. 다들 괜찮은 척 했지만, 몹시도 아쉬웠다. 마르셰이유나 모나코에서나 봤었던 고급 보트들이 정박해있던 작은 선착장이 원래 고향땅인것처럼, 고향 등지고 떠나는 사춘기 소녀처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나왔다. 횡단 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려니, 옆 건물에서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옆에 섰다. 해군 같았다. 해군 기지가 있었던가 잠깐 궁금하던 찰나, 신호가 바뀌었다. 그리고 어디서 본 것 같던 남자가 나에게 손짓했다.
"오, 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남자는 노신사였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우리와 길을 같이 건넌 하얀 제복이 노신사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악수를 하는 도중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신사 옆에는 한 무리의 하얀 제복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한 10초간 세상 바보같은 표정을 짓다가, 그제야 그가 아침에 본 그 노신사라는 것을 기억했다.
"지중해성 허리케인때문에 오늘은 배가 나갈 수 없대요. 슬퍼요. (So sad를 무척이나 칙칙하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돼요. (Don't worry. If you cannot do today, you can do it tomorrow.)"
해군 아저씨들도, 내 친구도 둘다 어안이 벙벙한 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우리는 뭔가 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잘 가라는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그의 손에는'WHO, Geneve' 라고 쓰여있는 가방이 들려있었다.
말끔해보이던 그는 아마,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의사나 그 쯤 되는 모양이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사람에는 귀천이 있다. 사람의 귀천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저렇게 높은 사람도, 10만원짜리 B&B에 묵고 나와 볼 일을 본다. 그리고, 나에게 정말 금쪽같은 말을 해주었다. 조바심 내지마라, 걱정하지마라,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단다. 이 말은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내게 엄청나게 큰 울림을 주었다. 사실 별 거 아닌 말이다. 그저 발 동동 구른다고 무슨 말을 하겠나. 하지만, 그것은 남의 일은 쉽기에, 남 일이니까 쉽게 말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짧은 찰나였지만, 내가 겪은 그의 행동거지로 미루어보아, 그는 정말 내가 오늘 배 못 탔다고 슬픔에 겨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 같았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그거 오늘 못했다고 죽지 않는다고, 마음 편히 가지고, 내일 해도 되는 일이라고 해 준말이다.
"뭐야? 넌 뭐냐? 저 사람은 뭐냐?"
친구가 묻자, 나도 정신이 들었다.
"그게 우리 방 쓴 사람이야."
"뭐?"
"하하하하하, 나도 누가 너무 반갑게 손짓하며 인사해서 깜짝 놀랬어."
'와따, 이게 뭐냐. 하하하하하하."
우린 정말 배가 터지게 웃으며, 걸었다. 그래, 그까짓 럭셔리 보트 투어. 내일 하면 된다. 우리는 힘찬 발걸음으로 구시가지를 가로질렀다. 일단, 진한 커피한잔 마시고 시작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쥐여준 지도 우리는 위쪽 파란 바다 두번째 파라솔까지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