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만날 사람은 만난다더니

이렇게 만나게 되어 행복했다, 트라파니

by Nima

독서를 마친 친구와 중간 지점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일단, 워낙 디저트가 빵빵한 이탈리아인지라 간식을 적당히 먹고, 저녁을 멋지게 Dinner Out 하기로 했다. 해가 기울며, 햇볕이 오렌지 색으로 물들어가면 갈수록, 오전에는 미쳐 보지 못했던 '도시의 예쁨'이 차올랐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다니는 백팩 아이들 사이를 헤집으며, 우리는 정말 거대한 아이스크림콘과 케익위에 한껏 올린 아이스크림과 완전 달달한 커피를 먹어치우기로 했다. 열심히 독서를 마친 친구는 샐러드도 시켰다.

유럽이 아니어도, 요즘엔 어디든 노천 카페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은 유럽이다. 오래된 돌 도로를 사이에 둔 대리석 건물들 사이에서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메론 맛 아이스크림을 먹다니. 한숨 푹 자고 원기를 회복한 탓인가. 시간 되었다고 울리는 성당 종소리에 무지하게 행복했다.


몇 시까지 뭘 해야된다는 일정의 압박 없이, 오로지 '삘'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유. 휴가는 이렇게 메론맛 아이스크림처럼 달았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오래도록 아무 생각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 답답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그 쳇바퀴가 주는 안정감, 예측 가능한 일정이 주는 안도감이 몹시 좋다. 한동안은 자신의 작은 완장의 최대치를 끌어쓰려는 사람 덕분에 아랫 사람에게 예측가능한 사람을 허락해주기 싫다는 말, 본인이 겪은 만큼 나도 고생해야 한다는 논리도 없는 말 덕분에 시달린 적 있어서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 오랜시간,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지 못해 떠다니다가, 이제서야 찾은 적성이 천상 회사원인가. 이유는 모호하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한 번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큰 변화 없는 내 일상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적 없다.


그랬던 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가가 비로소 진짜 휴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휴가 계획이 뒤틀리면서.


"오늘 배 못 탄 거, 하나도 후회 안된다."

"나도. 여기 맘에 들어."

"다행히다. 둘 다 일정에 목 메지 않아서."

"야, 우리가 한 두번 다니냐. 이 나이에 웬 일정."

우리는 그렇게 간식을 챙겨 먹고 다시 동네를 돌았다. 숙소를 예약할 때는 몰랐지만, 가느다란 손가락 같이 길게 뻗은 구 시가지는 하나의 작은 마을처럼 촘촘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자라온 모습이었다. 우리 숙소 앞 항구에서 두어 골목 걸어가면, 손가락의 위쪽에 해당하는 옛날 부두가가 있었다. 버려진 나무배, 길게 이어진 작은 요새 유적지, 그리고 자갈 해변 앞 성모 마리아 상까지. 굳이 타임슬립 영화를 보지 않아도,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지는 억만 시간 전, 사람 사는 모습들. 요란해서 더 촌스러운, 이정표나 유적지 설명 팻말같은 것 없이, 담백하게 남은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던 옛 부두가는 오래도록 눈에 선할 것 같다.

해가 지고 네온 사인 대신, 레스토랑 불빛이 밝혀지는 구 시가지 골목에서 우리는 반나절 사이에 이미 익숙해진 여러골목들 사이에서, 식당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걷고 또 걷다보니, 해변으로 가던 길목, 신 시가지 초입의 꽤나 미국스러운 신식 인테리어로 힘을 준,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동네 손님들이 몰려왔다. 정말이지 간발의 차였다.


시칠리아 3일째. 근처에는 그 흔한 중식당도 없는, 시칠리아. 시칠리아 사람들의 자부심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그만큼 잦지 않아서인지, 시칠리아의 식당가는 모조리 이탈리안 퀴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프렌치도 없고, 중식당도 없다. 공항이 있는 대도시가 아닌 이상, 100% 이탈리안이다.


요알못인 나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메뉴판은 꽤나 읽어본 적 있는데, 이탈리안 퀴진에서 무엇이 한국인에게 가장 아쉬운지는 생각해볼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국물 요리가 없다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스프, 그나마 맑은 콘소메 스프같은 것은 프렌치(혹은 벨지안)이라고 한다. 나름 퓨전을 하는 집이 아니면, 스프는 빵을 찍어먹기 좋게 약간 되직하고 뭉근하게 끌여나온 것. 그나마도 각 집마다 1-2종류 있으면 다행이다. 스프는 없었다. 친구는 3일째에 이미 이탈리안 백반에 질리기 직전이었고 나는 따끈한 김치칼국수 같은 것이 무지하게 먹고 싶었다. 우리의 염원을 담아, 오징어 스프를 시켰다. 이게 웬걸. 약간 묽은 오징어 된장국같은 맛이 났다.


"은혜로운 스프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맥주 두 어잔 걸치니,다시금 기분이 끌어 올랐다. 우리는 그 집에서 요리만 4접시를 해치운 것 같다. 한껏 기분이 솟구친 우리는 낄낄거리며 밤거리를 배회했다. 미인의 본판은 못 속인다더니, 낮에도 예쁘던 트라파니는 밤에도 아름다웠다. 나즈막하지만, 위엄있는 시청 건물 앞, 투박하지만, 우아한 오렌지빛 야간 조명이 켜졌다. 계획에도 없던 도시, 트라파니의 한 복판. 언제 심겼을까 가늠하기도 어려운 아름드리 나무들을 가로수로 가진 트라파니. 말 안해도 길가에 늘어선 나무의 둥치만 어림짐작 500년 된 나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않을 것 같던 아름다운 골목길들.


모두가 축구 중계때문에 카페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거나, 오래된 요새 앞 바닷가에서, 들어주기 민망할정도로 아마추어 같은 록 밴드 공연을 즐겼다. 나도 행복했다.


언젠가, 내 인생이 바닥 같을 때, 10년 만에 만난 선배가 날 위해 여러가지 조언하다 이렇게 말했다.


'만날 사람은 만난다, 너 나한테 미안해하지마라.'


궤를 같이 할수있는 얘기인지는모르겠지만, 나는 트라파니의 한 골목에서, 선배의 그 말이 생각났다.

아마, 내게 트라파니는, 그런 느낌이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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