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life

맥심 모카골드 스틱과 밤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는 것이 인생이겠지

by Nima

난 이상한 정리벽같은 것이 있는데, 안 쓰는 물건은 두고 보질 못하고 일을 만들어 한다. 가령, 서랍이나 옷장의 구석 구석을 불시에 몽땅 뒤집어, 우르르 버리고, 텅 비워 낸 뒤 희열을 느끼는데, 오늘은 찬장이 걸렸다.


그런데, 찬장의 두번째 선반에서 맥심 모카골드 20 pc 박스가 나왔다.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남의 회사 탕비실에 놓인 맥심 스틱을 보고 정말 반가워했다. 몰래 주머니에 한 포 넣어둔 걸 들킨 그가 무안할까봐 일단 '나도 노란 스틱만 먹는다'고 얘기했다. 물론, 나도 국민 커피의 노예이기도 하고.


그는 겸연쩍은 듯, '맥심'이 너무 먹고 싶은데 집에는 '카누'만 있어서 챙겼다고 말했다. 나는 '맥심의 깊은 맛을 왜 몰라주냐'고 말했다. 그 때는 그냥 무안할까봐 그랬다.


그를 만나면서, 그는 내가 좋아한다는 커피집으로 무던히도 다녔다. 나는 일부러 달콤한 쪽을 시켜줬다. 그래놓고 '맥심은 안 땡겨?'라고 묻곤 했다. '차가운 도시 남자'가 되고 싶어졌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편해져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거 맛있네' 정도로 대충 얼버무렸다. 나는 놀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가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했다. 그래놓고도 또 가끔, 맥심 타령을 하곤 했다.



그는 지금의 내 집에 온 적 없다. 우리가 헤어진 뒤, 이사온 곳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항상 '거기 좋냐?' 뭐 이런 말로 쓸데없는 전화를 하곤 했다. 어느 날에는 정말 오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나는 아주 단호한 척, 매번 그를 무안하게 했다.


한 동안 그에게 정말 모질고, 정 떨어지게 굴었는데, 그 와중에 마트에서 굳이 이 스틱 박스를 샀던 것이 기억난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 그가 나를 끈질기게 졸라, 내가 그에게 못 이긴 척 문을 열어줄 순간을 몹시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 자기 합리화도 했다. 아침에 마시고 갈거다. 편하게, 물 만 끓이면 되니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이 박스를 뜯은 적 없었다.


에곤 쉴레, 연인

그가 몹시 그리워 못 견디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온 사방에 그가 있다. 내 책 뒤에 끄적여 놓은 작은 낙서에 움찔거린 날은 대수롭지 않은 척, 무심한 여자처럼 일찍 자리에 누워버렸었는데, 이놈의 맥심 상자는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하지만, 그는 잘 지나가고 있다.

그를 위해 흘릴 눈물은 이제 없다.

찬장이 거의 텅 비어버렸으니, 다시 채울 일이 남았다.

나는 다시 기억을 채울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다른 시간의 기억으로, 두 눈을 감을 때, 오래도록 생각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기억들을 한 가득 채울 것이다. 맥심 상자같은 건, 치워버리자.


오후에 전에 있던 회사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를 그렇게 학대하며 즐거워했던 그 여자가 매일 울며 지낸다는 것이다. 거대한 사고를 쳤는데, 수습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이 소식을 전해준 동료가 고마워 최대한 신나게 대답했다.


"착하게 살아야지. 시간이 좀 걸려도, 벌은 받나봐."

"그게 제대로 된 벌이야? 너한테 한 짓 중에 한 가지만이라도 이유를 달아서 벌을 받아야 권선징악이지, 바보야."


내가 그 여자를 용서한 것은 아닌데, 살다보니 그 여자한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어졌다고 변명하려다, 나 너무 바보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오늘 밤,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 여자에 대한 기억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맥심 상자와 같이.



인생은 짧고, 내 시간은 부족하다.

나의 내일은 더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야지.


맥심 커피 한 잔 무지 땡기던, 겨울 밤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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