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 아니길 바라기도 했건만
며칠 전, 다들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냈냐며 안부를 물었다. 나는 별 거 안하고, 집에만 있었다고 둘러대는 중간에 문득 깨달았다.
너를 떠올리며 몸부림치던, 너를 처음 받아들였던, 나름 우리의 첫 기념일이라 부름직한, 그래서 떠올리기만 해도 몹시 괴로웠던, 그 날짜가 이미 지나가버렸다.
아, 이래서 다들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가.
크리스마스 안부는 묻는 둥 마는 둥, 나는 한동안 말 못할 서운함과 거부하고 싶은 안도감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의 모진 마지막은 그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아무 소리나 하던 그에게 '내 알바 아니니 전화를 끊으라'며 퍼붓던 무렵, '아, 정말 지금은 좀 떽떽 대지 말아줄래?'라고 하던 것도 생각난다. 그의 약한 모습들이 생각난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려는 찰나, 나의 모진 모습의 기저에 깔린, 그래도 나를 잡아달라던 나의 처절한 구걸에 신경쓰지 않던, 아니 신경 쓸 줄 모르던, 그의 이기적인 얼굴이 같이 떠오른다.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웃음이 났다.
그 모든 것이 아득하다.
아주 오래된 일 같다. 혹은, 아주 오래전 보았던 영화같다.
가물가물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남의 기억마냥, 남일처럼 흐릿하게 오는 둥 마는 둥한다.
작년 이 맘때가 생각난다.
작년 12월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매일 매일 피를 토할 것 같았다. 혈관 안에 바늘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온 몸이 따가웠다. 하루 종일 슬펐다.
그 때는 재작년 12월을 떠올리며 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2-3시간 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어도, 하늘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던 그 시간. 그와 함께였던 시간. 그 시간을 떠올리며 추스르는 작년, 나는 정말 혼자였다. 마음 편하게 소주나 한 잔하며, 그런 놈 잊으라고 훈수 둘 친구도 없었다. 그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모습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내가 제 전화를 차단해두었기에, 언제 차단을 해지할 지 모르면서, 술만 마시면 한 두번 시도했을 법한, 그의 황당한 문자를 받고, 나는 정말 실성한 사람처럼 울며 불며 보냈다. 마침, 망할 놈의 '라라랜드' 노래가 온 겨울 재탕 되던 작년 12월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나는 정말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만큼, 가여운 척이란 척은 다 하며 타들어갔다.
올 해의 시작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 1월에도, 2월에도 나는 뼈에 사무치는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그 때마다, 함께 보낸 그 추운 겨울을 떠올리며, 울부짖었다.
가장 혹독했던 시간은 지난 2월 28일, 입원하면서였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누워지낸 그 시간 동안, 나는 정신이 들 때면 온전히 그를 기억했다. 그를 떠올리며, 그를 복기하며, 다시 가질 수 없는 그의 빈 자리를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그를 놓는 일에 번번히 실패하며, 진통제를 맞고 쓰러져 자다가, 꿈에라도 그를 보면 꿈에서 깰까봐 꿈 속에서도 걱정했다. 올 봄은 그렇게 그를 온 몸으로 기억하느라, 지극히 고통스러웠다.
봄이 지나, 우연히 연락이 이어지면서, 나는 더 괴로워졌다.
이게 아니다.
우린 아니다.
힘차게 고개를 저을 수록, 폐부 깊숙히 그가 파고 들었다.
내 안의 모든 신경은 다시 그에게 집중되는 것 같았다.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나는 지난 가을 이후, 그를 훌훌 털어내고 있다.
남자는 남자로 잊으라던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올 한해 나는 낯선 남자와 밥 한끼 먹은 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곧잘 털어낸 것 같았다.
비록, 여즉 울컥 그의 미소가, 그의 목소리가, 그의 등 한 복판이 떠오르곤 하지만, 길 가다 그가 사무쳐 눈물을 펑펑 흘리는 일은 없다. 이만하면 다 나았다 싶었고, 다 아물었다 싶었다. 이제, 내 인생하고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굳이 되뇌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와 상관 없어진 것 같았다.
그러다 오늘, 어쩌다 지우지 못한, 폐기해버린 아이폰 한 구석에서 나왔음직한, 백업 파일을 보았다.
차를 탈 때면, 그는 내 손을 잡고 운전했는데, 그런 그의 손을 찍어둔 그 사진을 발견했다.
한동안, 눈물이 흘렀다.
다만, 작년 이맘때의 쓰라린 눈물은 아니었다.
이제, 완전히 내 인생에서 비껴나간, 완전히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받아들였다.
이 대단한 사실을 이제사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조금 눈가가 촉촉해졌을 뿐이다.
작년과는 다르다.
그래도 가여운 기억 한 조각은 위로하자.
BGM은 가브리엘 포레의 <꿈꾸고 난 후에 Après un rêve>
-음악 속 가사 중-
아..꿈에서 슬프게 깨어나다니
나는 너를 부른다
오 밤이여 돌려주렴 너의 환상을,
돌아오라 돌아오라 아름다운 이여,
돌아오라 오 신비로운 밤
우리는 이제 각자 제 인생을 살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작년부터 제 인생 사느라 나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 나도 그럴 것이라는 점.
영원히 마주보지 않는 평행선처럼,
그 어떤 고비에서도 다신 만나지 않길.
굳이 다시 만난다면, 이미 내가 엄청나게 행복할 때 만나지길.
올 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밤.
뒤척이며 쓴 밤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