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life

인맥과 너

너를 빼놓은 내 인생

by Nima

대학교 1학년 1학기, 요상한 동아리 소개 모임에서 만나

흔한말로 남사친, 여사친으로 지내던 그는 누가 봐도 좋은 친구였지만,

우리는 사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오랜 시간 '사귀는 사이'라는 공증으로부터 비껴가면서,

우리는 정말 오래도록

최소한 너는 정말 오래도록

나를,

나라는 사람을,

모든 것으로부터 최우선으로 생각해줬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너는 내가 '괜찮다'고 보낸 문자를 받은 뒤, 마음이 힘들다고 했다.

그런가보다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회사원이 된 너는

갑자기 가방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같은 그 핸드폰을 꺼냈다.


"이것봐, 이거 너가 보낸 메세지.

너는 이렇게 씩씩한 척하고 돌아다녀서 마음이 안 놓여."


스마트폰이 시작된지 한참이 되어서도 버리지 않고 있던 그 피처폰.

그 고물덩어리를 버리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이 메세지가 없어지잖아. 난... 이걸 버릴 수가 없었어."




우리가 남녀관계의 당사자가 된 이후

그리고 안타깝게도 헤어진 이후

벌써 몇 해동안 너와 연락을 하지 않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가방에서 그 은빛 고물 피처폰을 꺼내던 널 떠올린다.


내 20대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너.

지금의 내 직업과

지금의 내 업무와 매우 가까운 직군에서 잘 하고 있는 너.

그러나, 나는 너를 내 '인맥'이라고 말할 수 없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그 기억이 너무 아까워서.

나는 한번도 너를 내 인맥으로서 카운트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전,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던 중,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의 인맥론 때문이었다.

요약하자면, 그녀는 그녀를 좋아함이 분명한, 요즘말로 '썸남'인 아는 의사친구와 종종 데이트를 즐기는데, 그는 가끔 피부과 진료도 해주고, 늦은 밤 응급처치 카운셀링도 해준다고 했다. 그것도 무료로.


나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냥 친구인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냥 친구라기는 좀 애매하네. 걔가 날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썸 좀 타다가, 대쉬도 받긴 했고, 가방도 받긴 했지. 호호호."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얘기거리를 고민했다. 그러나, 예민한 그녀는 나로부터 뭔가 듣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너는 옛날 남자친구랑 다시 친구로 지내는 건 없어?"


생각해보니 남자로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은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깝지 않니? 그러니까 너가 인맥이 나보다 없는거야."


그 뒤로 나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내 인맥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 필요하다고, 우리 사이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잘 지내지? 근데 말이야..."

라는 통화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인맥은 뭘까.

나는 인맥이 없어 일을 못할까.

그런 인맥을 관리하기 위해, 정말 사랑했던 남자에게 내 일을 턱하니 맡길 정도의 뻔뻔함이 필요할까.


커리어와 퍼스널 라이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도 싫지만,

이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걸까.

하지만, 어디까지 섞일 수 있을까.

그 둘을 분리하지 않을 때, 나는 너에게 뻔뻔하게 내 업무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내가 진짜 어른이 되는 길일까.


문득, 2년 약정을 미처 채우지 못한 아이폰을 해지하려고 연락처를 정리하다가, 너를 기억했다.


지우지 못하는 연락처.

하지만, 연락하지 못하는 연락처.


이것은 나의 인맥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만의 은빛 고물 피처폰이 되어도 되는 것일까.


어느 에세이 집에서 이런 말을 보았다.

'인맥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거나, 권력 확장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는 사람들, 제대로 된 인맥이 형성될리 없다. 인맥이라는 것은 인맥을 이용하지 않았을 때 만들어지는 특성이 있다.'


이 부분은 마음에 든다.

다만, 너는 내게 만들어진 인맥으로 굳이 당겨 넣지 않고 싶다. 너가 버리지 못한 피처폰처럼 너는 내게 남아있다. 그 어떤 목적도 없이 너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그 기억자체만으로 너는 나를 구성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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