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1시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KT의 안내 언니가 내게 미안해하면서 오빠 전화기에 신호음만 울린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나는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뱉고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여기까지 했으면 이 남자는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설사 다른 일을 하느라 전화를 잠깐 못 받았을 뿐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를 탓할 수 없다. 나는 그에게 그가 안 받아도 되는 전화를 건 사람이므로 나는 그에게 서운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중에는 전화를 다시 한 번 걸긴 해야겠지. 되는대로 어서 몸을 추스르고 오빠에게 걱정 말라는 안부 전화 정도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화는 너무 늦지 않아야 한다. 이상호는 ‘제3자’이다. 제3자인 오빠가 자신이 나설 필요 없는 일에 오지랖을 떨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게 미안해하면 안 된다. 따라서 괜히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타이밍을 적절히 잘 맞춰서 전화 한 통은 꼭 해 줘야 한다. 그래야 아까의 그 민폐를 무마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될 테니까. 이 생각을 해 놓고도 나는 전화기 부스에 주저앉은 채 오래도록 일어나지는 못했다. 무슨 일부터 어떤 순서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감이 없었다. 추웠고, 불안했다.
내가 그 전화 부스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오지랖 넓은 어느 스페인 할머니 덕이었다. 나는 길 가는 백발의 할머니가 ‘Que pasa?(무슨 일이야?)‘ 라고 물었을 때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는 못 일어날 사람처럼 넋 놓고 있던 나는 그 할머니에게 웃으면서 ’De nada (괜찮아요.)‘를 대답하면서 일어났다. 민망함과 창피함이 나를 일으켰고, 머릿속에서는 멀쩡하게 보여야 더 이상 길에서 봉변을 당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조금 다부지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시계를 보았다. 한시 반. 전화를 걸어 놓고 30분을 저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었구나. 나는 제정신이 들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근처 길을 배회해보았다. 걷다가 마주치는 한국인이 있으면, 어저께의 ‘지대범’처럼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구해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인간들은 단체로 모두 어딜 갔는가. 길 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스페인 사람들같았다. 하다못해 ‘아시아사람들’도 거리에 없어보였다. 아시아인들은 모두 프라도 미술관에 가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걸까. 섭섭하지만 섭섭하다고 말할 수 없던 나는 길 잃은 승냥이처럼 계속 걸었다. 앉아 있는 것보다는 걷는 편이 덜 추웠고, 덜 불안했다. 앉아만 있다가는 또 정신 나간사람처럼 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누군가 거지인줄 알고 동전은 던져 줄 수는 있겠구나.
사실, 내가 이렇게 기가 죽어 홀로 걷기로 결정한 이유는 ‘한국인이 길에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몇 시였던가. 지나가는 한국인에게 구조를 요청하겠다던 의지가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그 ‘대사관 여자’에게 모질게 ‘거절’ 당하면서였다. 길 가에 보이던 공중전화를 또 붙잡고 하염없이 전화를 걸다보니 나는 어렵사리 ‘스페인 주재 한국 대사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대사관의 위치가 ’마드리드‘라는 말을 듣자 행복했다. 이미 지갑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 번호를 알려준 KT 교환원에게 너무나도 고마웠던 나머지, 나는 아무도 없는 공중전화박스에서 혼자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내게 마법의 양탄자를 대령해 줄 것 같은 그런 번호였다.
“대사관이죠?”
“말씀하세요.”
“저 지금 소매치기를 당해서요. 돈도 없고 다 잃어버린 것 같은데요.”
“대사관에 오셔서 이야기 하세요.”
“저기요. 제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고요…….”
“그러니까 대사관에 오셔서 말씀하시라고요.”
“아니, 대사관이 어디라고 걸어서 가요? 제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가요?”
“여보세요. 지금 위치가 마드리드이시잖아요? 한국 대사관 전화번호도 아셨잖아요. 그러니까, 천천히 찾아서 오시고 나면 그 때 절차 진행하실 수 있어요.”
“돈이 없다니까요.”
“저기요, 이런 전화 너무 많이 옵니다. 한두 분도 아니고 제가 갈 수는 없겠죠? 오셔야 해결을 해드리죠. 여권이랑 다.”
듣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재수 없던 그 상황에서 내가 말 못하고 쌓아만 둔 울분 같은 게 있었던가, 나는 애먼 직원에게 주제넘게 퍼붓고야 말았다.
“나 약 올려요? 이러니까 외교부가 욕 먹는 거야. 내가 지금 거길 어떻게 가요?”
“이 전화 녹음 되요. 욕 하시려거든 마음대로 하세요.”
“……너 두고 봐. 너…… 대단해.”
바보 멍청이.
나는 ‘나홀로 집에’의 악당도 안 할 것 같은 병신 같은 협박만 되뇌고 말았다. 널 어떻게 두고 보는가. 나는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지만, 속으로는 너무 창피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맨홀 구멍 안으로 입수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거구나. 대사관 같은 곳에 당당하게 전화하려면 ‘이름 석 자’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이어야 사람 취급 해주것인가. 나는 비겁하게 전화를 끊은 뒤, 한동안 너무 창피했다. 엄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구박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 없이 혼자 버려지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 게 없었다. 멋지게 대사관에 전화걸 때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나는 ‘병원장’ 엄마 잘 만나 돈만 쓸 줄 알았던 나이 많은 만년 학생, 무능한 백수였던 것이다. 나는 정말 먼지만도 못한 내 존재감 덕분에 허탈해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냥 정처 없이 걷는 것만이 유일하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언제였던가. 내가 ‘공부하는 것이 너무 귀찮고 지겹다’고 말하자 엄마는 거의 길길이 뛰셨다. ‘다 너 좋으라고, 너 잘 되서 나중에 대접 받으라고 이러는 거다. 공부하는 게 귀찮다니, 배가 불러도 너무 불렀다.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애들을 너무 편하게 해 준 게 업보다.’
나는 그렇게 화를 내시는 엄마를 보고 엄마는 ‘멋대가리 없는 속물’이라고 욕했었다. 하지만, 엄마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나는 전화 한통으로 대부분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엄마와는 달리, 내 힘으로는 지척에 있을지도 모르는 대사관까지 찾아갈 방법도 없는 사람임이 확인 되었으니까. 내가 잃어버린 돈은 엄마 돈이지 내 돈이 아니다. 엄마가 마련해 준 카드, 엄마가 환전해준 현금, 엄마가 선물해준 지갑을 잃어버리고 나니 나는 오갈 데 없는 사람일 뿐이다. 지대범에게 내가 잘난 척하며 ‘스페인 집시들’을 가르치던 순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지금의 내 모습은 바보 같고 덜 떨어졌다. 내 바닥은 아까 만천하에 드러났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지금 당장 가진 돈이 없다고, 기차에서 한 번 본 남자에게 수신자부담 전화를 걸어 울고불고 어리광을 부렸고, 대사관으로부터 냉대 받았다.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머릿속에는 ’마요르 광장‘이라는 단어만 생각났다. 이정표를 보기도 했고, 길 가는 바쁜 사람을 붙잡고 수줍게 ’마요르 광장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묻기까지 하면서 정처 없이 터덜터덜 오래도록 걸었다. 그 놈의 ’마요르 광장‘은 내게 너무 먼 당신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가거나, 너무 멀다며 손사래를 쳤다. 혹자는 남쪽을, 혹자는 서쪽을 가리키며 이 길로 쭉 가라는 지랄을 해댔다. 두어 명에게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한 뒤, 나는 그냥 나 혼자 걷기로 했다.
한 동안은 춥고 배고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추위도 배고픔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생각하며 의미 있게 굶는 것도 아니었지만, 굶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고프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콕’ 찍어 설명 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나도 별 게 아닌 내 자신이 창피하고 시시해서 배고프다는 생각은 할 겨를 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일견 좋은 일이었다. 한 가지 생각만 하니 걷는 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살아 돌아가려면 오빠가 오든 말든 나는 우선 ‘마요르 광장’을 가야 했다. 마요르 광장 가운데 서 있는 동상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뻗은 통로에 길게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을 따라 걷다보면 나오는 그 좁은 골목을 찾아야 한다. 그 골목에서 우측으로 돌아보면 나오는 녹색 대문 집, 그 집으로 걸으면 그 길의 끝은 민박집이었으니까, 거길 가면 다 해결된다.
그래서 그렇게 걸었다. 다리가 아프면 벤치에 앉았고 걸을만하면 다시 걸어갔다. 그렇게 거의 8시간을 온 마드리드를 걸었다. 도저히 더는 걸을 수 없을 것 같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나는 드디어 ‘마요르 광장’에 도착했다. 그 때 나는 이미 눈 뜬 시체 상태였다.
“지원아.”
도대체 누구인가. 누군가 분명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목 뒤에서부터 귀 끝까지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 너무 못 먹어 헛것이 들리나.
“지원이 맞지? 세상에.”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저 남자. 혹시 저 사람이 오늘 하루 죽도록 걷던 내 머릿속에서 유일한 위안이었던 그 ‘수신자부담 콜렉트 콜‘의 남자일까. 아니다. 그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 난 죽은 걸까. 저 사람은 나를 데리러 온 천사일까. ’시티 오브 엔젤‘의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나오는 ’천사 미하엘‘처럼, 내가 죽었다며 이제 저를 따라 하늘로 가자는 천사일지도 모른다……. 천사가 맞는 것 같다……. 영화 속 천사들처럼 그 역시 검은 코트를 입었다……. 저 남자는 천사구나…….
“그 쪽, 천사인가요.”
“지원아.”
‘쿵’
나는 세 걸음 더 걷다 주저앉았던 것 같다. 돌 뿌리도 없었고 아무와도 부딪히지 않았지만 난 더 걸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
눈을 떠보니 낯선 방이었다. 퀸 사이즈 침대의 하얀 침대시트 위로 하얀 린넨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긴 어디인가. 몇 시인가. 나는 또 얼마나 늘어지게 잔 것일까.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직까지도 눈꺼풀을 힘차게 말아 올리기는 좀 버거웠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어나려는 내 노력을 비웃듯 내 육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에 총이라도 맞은 것인가, 내가 무심결에 다리에 힘을 주자 온 몸에 쓰라린 통증이 퍼졌다. ‘악’소리가 절로 났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제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아아아아아아아.”
내 작은 절규 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나는 목이 잠겨 소리마저 시원하게 지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문 밖에서 들린 모양이다. 인기척이 났다. 나는 눈을 비볐다.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남자, 민박집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아가씨 깨우지 말라기에 실컷 자게 뒀는데. 일찍 일어난 거 같구만?”
“…… 누가 깨우지 말래요?”
“아가씨 어제 강도당했다더니 몸은 괜찮아요? 어제 일은 기억나나? 근데 아가씨 스페인에 아는 사람이 많다?”
무슨 소린가. 아는 사람이라니.
갸우뚱 머리를 흔들자, 멍해진 머릿속으로 검은 코트의 남자가 지나갔다. 그래, 난 어제 검은 코트의 천사를 만났지.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아무 기억이 안 난다. 온 방이 화이트로 꾸며진 이 방은 천사의 방인가. 원래부터 아저씨는 천사의 하수인이었나.
“이 방, 뭐에요?”
“이거 성수기에만 쓰는 스페셜 방, 독방, 비싼 방. 학생들 쓰는 도미토리 방(Dormitory)에서 옮겼어. 아가씨 거기서 자면 푹 자는 거 방해될 것 같다고 옮기라던데? 그 총각이 큰 방 없냐고 어찌나 그러던지 여기 안 쓰는 방인데 옮겨 왔어.”
“여기 민박집이에요?”
“나 몰라요? 아직 잠이 덜 깼나?”
“아, 아뇨.”
“허허. 강도를 만났으면 나한테 전화해야지. 고생 많이 했다면서.”
“여기 연락처를 지갑에 둔 것 같은데 지갑을 가져 갔어요.”
“스페인에는 잡범은 있는데 강도범 같은 거는 진짜 없거든? 미국하고 달라. 근데 아가씨는 강도를 당했다며? 어째 잘못 걸린 거여.”
“아니에요. 칼 강도 같은 거 아닌데.”
“지갑만 없어진 거 맞아요? 여권은 있다는데……. 그것도 이상혀. 소매치기들은 사실 가방 채로 다 가져가는 데, 언제 지갑만 알고 뺐지?”
뭐야. 무슨 소리야. 나는 아저씨가 수상했다.
“어떻게 아세요? 누가 여권을 찾아 봤어요?”
“어제 아가씨 업고 들어온 총각이 봤어. 여권 없어졌으면 대사관 가야 된다고, 나 보는 앞에서 가방 열어본다고, 나보고 보고 있으라데? 나는 여자 가방 보는 거 싫은디.”
총각. 천사.
내 가방을 보았다는 사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단어가 생각이 안 났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몇 번을 입을 뗐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리고 자느라 말을 안했는데, 어제 그 지범인가 지대범인가가 미리 아가씨한테 주라고 60유로(Euro) 맡긴 거 있어. 거기다가 같이 온 총각이 돈을 또 보태고. 그래서 아가씨는 이 방에 삼 일 더 있어도 되요. 계 탔네? 허허허.”
무슨 소리인가. 지대범이 나를 위해 돈을 맡기고, 천사가 나를 위해 돈을 썼다고. 아직 내가 꿈속인가. 아니면 난 정말 죽었나.
“어제 온 사람 이름이 뭐죠? 어디 있어요?”
“아니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야, 아니면 기억이 안나? 어제 아가씨 쓰러졌다고 업고 들어 오길래 나는 당연히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름이 뭐냐고요.”
“이름?”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또 다리가 말을 안 들었다. 어제 많이 걷기는 많이 걸었다. 이렇게 아픈 걸 보니 나는 천사한테 잡혀온 것은 아니다. 꿈은 아니다. 나는 온 얼굴을 찡그리며 아저씨를 다그쳤다.
“이름, 아니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잠깐 나갔어. 뭐 볼일 있다고. 아가씨가 일어나믄 주라고 과일하고 영양제하고 다 해놓고 갔구먼.”
“다시 와요?”
“온다던데? 짐도 있어요. 아가씨 내가 잠 깨운 거 알면 총각이 나한테 화낼 거 같다. 더 누워 있어. 내가 그 총각 오면 알려줄게.”
아저씨는 두둑이 받은 방 값 덕분인지 나한테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근하게 구셨다. 나는 일어나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잘까. 사실 몇 마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몰려 왔다. 피곤해서 침대에 녹아버리고 싶었다. 나를 업고 온 ‘총각’은 다시 온다면서 나갔다고 한다. 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다시 올 것이다. 조금 더 누워 있어도 될까. 드러누워 천정을 찬찬히 살피니 여기는 아는 곳이었다. 하얀 벽지가 아닌, 하얀 회벽. 나는 유럽의 건물 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천국으로 와 버린 건 아니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이지만 눈이 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여기가 천상의 어느 곳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천국은 아니다. 하얗고 밝은 이 빛은 내게 익숙한 햇빛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은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또 잠이 들었던 내가 다시 일어난 것은 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면서였다.
“저녁은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디.”
“환자 식단은 얼마죠?”
“죽 먹게? 쌀이 있나 몰라.”
“한인 마트 가까운 곳에 있나요?”
간간이 들리는 저 목소리. 나의 천사인가. 나는 그를 잡아야 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여전히 뒷다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천사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몸을 굴려 떨어지기로 했다.
‘쿵’
“어이구, 아가씨.”
조금 굴린다는 것이 의욕만 넘쳤다. 나는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후손’답게 침대 밑 맨바닥으로 내 몸뚱이를 굴렸다. 아픔도 잠시, 문을 열고 들이닥친 두 남자를 마주보자 ‘쪽팔려서’ 자는 척, 아니 죽은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술 사이로 신음이 쏟아졌다.
“으으으으으으.“
“자원아, 괜찮아? 아저씨 제가 마트 다녀올게요. 죽 좀 부탁드려요. 약도 좀 그려주세요.”
마트는 무슨 마트. 나는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저기.”
아. 아. 아. 입에서 맴돌던 그 말을 뱉자. ‘오빠’다. 넌 오빠다.
“오, 오오 오빠?”
“지원아, 괜찮아?”
“오빠. 오빠, 오빠 맞아?”
난 떨어진 내 육신 가까이 쭈그리고 나를 일으키려는 남자에게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이름을 뱉자 속이 시원했다. 어제부터 하고 싶었던 말.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 배가 고파 실신하는 바람에 미루어 온 말, ‘너 오빠맞아?‘를 드디어 뱉었다. 나는 거의 씩씩거렸고, 천사는 웃었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 오빠.”
“오빠…….”
“응. 이상호 오빠. 정신이 들어?”
“오빠, 나 나갈래. 나 죽 안 먹어도 되요.”
“안 먹어도 된다니 무슨 말이니. 걷지도 못하던데.”
“배가 고파서 그랬어. 정말이야. 아저씨, 저 일어날 수 있어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내가 힘을 주자마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사극에서 사람을 고문하며 ‘주리를 트는’ 장면이 스쳤다. 형틀에 앉은 사람들의 느낌은 이런 것일까. 나는 정말 뒷다리 근육의 통증 때문에 오른쪽 눈에서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러면서 걷겠다고?”
“오빠, 가지마. 어디 가지마. 응? 나 화장실만 갔다 올게. 어디 가지마. 응?”
“그래. 어디 안 가. 그런데 너, 화장실은 갈 수 있겠어?”
“어디 가지마. 응? 어디 가지 말고 나랑 나가.”
“어디로, 어디 가고 싶어서?”
“일단 나가. 나랑 같이 나가자. 응?”
어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왜 들었을까. 나는 무의식중에 아저씨가 있으면, 하수인이 있으면, 천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사람, 도망가지 않게 해야 했다. 당신이 이상호가 맞다면, 당신은 어젯밤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달려온 것이다.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우리 확인을 하자. 당신이 바르셀로나에서 내 전화 한통을 받고 달려온 그 이상호가 맞는가. 당신과 나. 둘 만 있는 장소에서 당신의 정체를 밝혀라. 그래야 내가 백배 사죄하고 당신에게 진 이 엄청난 빚을 갚을 기회를 달라. 내가 어제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이 작은 민박으로 당신이 나를 업고 왔다는데, 어째서 나는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다만, 나가서 말하자. 우리 둘. 둘 만 있는 장소에서 당신은 당신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금엉금 기었다. 가방을 찾으러 일어났다. 지갑도 없으면서 나는 그 가방을 움켜쥐러 일어났다.
**
욱신거리는 내 뒷다리는 상관없었다. 오빠와 나는 내 가방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으며, 민박집을 좀 벗어났다. 절룩거리며 걸으면서도 정신은 맑았다. 오빠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어제, 어떻게 왔어요?”
“어디?”
“민박집으로.”
“너 기억 안 나는 구나. 너가 이 골목으로 가라, 저 골목으로 꺾어라. 다 말해줬어.”
“그럴 리가. 나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데.”
“작게 말하더라고. 녹색 문. 세르반테스. 뭐 이런 거.”
“세르반테스는 어떻게 알았어?”
“스페인에서 세르반테스가 산 집은 몇 개 있어. 그 집마다 건물에 문패를 붙여두지. 너희 민박집에도 붙어 있었어.”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빠도 따라 멈추었다.
“오빠, 정체가 뭐야?”
“뭐? 하하하”
“오빠. 솔직히 말해봐. 오빠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어떻게 영국 유학 온 사람이 스페인 건물을 다 알아?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어떻게 하루 만에 와.”
“그래서, 천사로 보여? 너 어제도 여러 번 그러더라.”
“뭐 꼭 아니라고 해야 하면 나도 비밀 지켜줄게요. 사람은 아니라는 거, 나 믿어줄게.”
오빠의 얼굴에서 조금 웃음기가 가셨다. 좋다. 이제 정체를 밝히시라,
“왜 그러니?”
“영화에서 봤어. 그거, 니콜라스 케이지 나온 거, ‘City of Angel’ (시티 오브 엔젤) 알아? ‘베를린 천사의 시’ 알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상하지? 나도 이상해. 근데 마드리드랑 바로셀로나를 하루만에 오는 사람은 없어. 그 정도 지리는 나도 배웠어. 여기 사람들도 그 구간 이동하는 데 ‘이틀’은 잡아. 오빠가 날아오지 않은 이상 여길 그 시간에 올 수가 없다구. 그리고 세르반테스 집이 스페인에 여러 개 있는 거, 영국 유학생이 무슨 수로 알아? 응?”
“지원아.”
“응.”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가 정말 나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 아니 ‘천사’여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시츄에이션이다. 이렇게 날아올 일이 없는 사람이, 이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기적적으로 날아와 은혜를 베푸는가. 일개 유학생 주제에 이런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빠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어제 날아오긴 했어. 택시 탔어.”
“뭐? 바르셀로나에서 택시타고 왔다고? 여기가 바르셀로나 옆 동네인가보지?”
“나 너 덕분에 어제 평생 못해볼 짓을 많이 한 것 같아. 사실, 기차표를 알아봐야 하는지 버스를 알아봐야 하는지 검색을 잠깐 하느라 룸메이트 책상에 있었는데 내 방에서 전화가 울렸어. 뛰어갔지만 끊어지더라고.”
기억난다. 그건 어제 1시쯤이었다.
“근데.”
“다시 걸려올 때쯤에는 내가 이동하고 있어야 너 마음이 편할 것 같았어. 그런데 기차보다는 버스 시간이 빨랐고, 버스면 7시간이 걸리더라구. 그런데 출발시간이 너무 애매했어.”
“그래서……, 택시를 탔다고?”
“응. 너한테서 다음 전화가 올 때는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너는 강도를 당한 상태였잖아. 얼마나 무섭겠어. 택시 아저씨한테 마드리드까지 가자고 했어. 미쳤다고 하길래 돈 다발을 흔들었지. 얼마면 되, 이런 거 내가 해볼 줄은 몰랐어. 하하.”
“정말……, 거기서 택시를 탔다고? 나 때문에?”
“그래. 아저씨가 머뭇거리기에 내가 500유로(Euro)를 보여줬어. 그랬더니 타라고 하더라.”
“말도 안 돼.”
“나한테 승용차가 있었으면 더 빨랐을 거야. 그런데 나 사는 아파트에서 AVIS (렌트카 업체) 사무실까지 가는 길이 좀 애매했어. 시간이 촉박해 보이더라구. 그래서 그냥 택시 아저씨와 협상했어. 그 분도 자기 어차피 마드리드 올 일이 있었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얼이 빠지려고 했다. 500유로(Euro). 65만원. 버스 10번은 넘게 탈 돈. 정말 그 돈을 주고 온 걸까. 밤 기차 한 번 탔던 나를 도와주러. 나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 믿을 수 없어. 믿는다 쳐도 어떻게 그렇게 큰 돈을 쓰면서 날 도우러 와. 아무나 도와줘? 응?”
“강도당했다는 사람을 아무나라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강도.”
“그래……. 지원아, 울어?”
“으앙. 말이 안 돼.”
나는 우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제 나는 전 세계적으로 버림받은 몸, 하찮은 인간으로 평가받은 몸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돕겠다며 나선 사람이 없었고, 대사관 직원은 ‘너 같은 거 떠들어봤자‘라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혼자 버려졌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나를 단 한번 만나놓고, 나를 돕겠다며 500유로를 썼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말이 되면 나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하. 너 왜 울어. 하하하. 나 천사여야 마음이 안정 되겠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안해서 우는 구나? 그럴 필요 없어. 어제 강도당했다고 제일 먼저 전화한 건 나였잖아. 넌 날 뭘 믿고 전화했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너무 미안하잖아. 강도가 아니라 소매치기였는데, 말을 잘 못했단 말이야.”
“그게 그거야. 너 돈 한 푼 없이 하루 종일 굶었다가 나 보고 실신했잖아. 나 어제 얼마나 놀랐는줄 아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나는 너무 미안해서 더 크게 울었다. 강도라는 말, 그 말은 적잖이 놀랠 말이긴 했다. 보통의 강도는 피해자에게 칼자국 내주거나 피멍을 선물하니까. 난 어제 협박당한 적도 없고 맞은 곳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스페인어를 못 하는 벙어리도 아니고, 내가 정신만 차렸으면 내 힘으로도 순리대로 풀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민폐를 끼쳤다. 나는 길 한복판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나 하나 편하자고 내가 그런 말을 했어어어어어어. 어어어어어어어엉 미안해애애애애애.”
“울지마……. 야! 사람들이 내가 너 때린 줄 알겠다. 하하하하.”
“어어어어어엉. 미안해, 그냥 소매치기라고 말 했어야 되는데. 어어어어어어엉.”
“아가씨, 미안하면 조금만 더 걸어볼래요? 사실 나 배고파.”
주책맞게 울고 있던 나는 땡깡 부리며 더 울려고 하는 떼쟁이 같았고, 오빠는 노련한 베테랑 어머니 같았다. 그런 나에게 ‘나 배고파’라는 말은 떡장수 어머니가 떼쟁이 아이에게 ‘호랑이 온다’고 한 말처럼 순식간에 땡깡표 눈물을 그치게 하는 영험한 말이었다. 더는 민폐를 끼치면 안된다. 나는 흐르는 콧물을 삼키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으로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오빠는 계속 웃었다.
“그게 그렇게 미안해? 당황하면 그럴 수도 있지. 덕분에 나 ‘제이슨 본’ 영화 찍었어. 500유로(Euro)짜리 택시도 타보고, 마드리드도 와보고.”
“어어엉. 오빠아아. 내가 저녁 살게요.”
“하하하하하하. 너 돈은 찾았구?”
“아. 아…….”
“하하. 지원아. 눈물부터 그치고. 걸을 수는 있어?”
“네에. 흑흑.”
“씩씩해서 좋다. 날씨도 좋고. 어제보다 덜 추운데?”
오빠는 검은 코트의 단추를 조금 풀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내 눈에 오빠의 코트 사이로 검은 브이넥이 보였다.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십자가 목걸이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빠 옆을 절뚝거리며 걸었다. 오빠는 갑자기 또 웃었다.
“지원아. 근데, ‘베를린 천사의 시’가 재미 있었어? 그거 정말 재미 없지않아?”
“오빠도 봤어요? 흑흑.”
“응. 시티 오브 엔젤은 안 봤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는 봤어. 하하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다. 어떻게 내 코트를 보고 그 영화에 나온 천사를 생각하니. 너무 귀엽잖아. 나 평생 잊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것은 진짜였다. 건물 위에 서 있던 검은 코트의 남자. 나에게는 그 장면과 어제 마요르 광장의 동상 밑에서 나를 부르던 오빠의 모습이 완벽하게 오버랩 되었다. 그건 진짜다.
“바르셀로나에서 오빠가 올 거라는 생각 안했어요. 내 이름을 부를 만한 사람이 그 광장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오빠가 이 세상 사람처럼 안 보였고요.”
“마드리드에 도착할 시간이 아니긴 했지. 그 아저씨가 축구 보러 여길 드나들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좀 헤맸을 거야. 어제 정말 광속으로 달렸어. 고속도로 전체에서 우리가 제일 빨랐어. ‘아우토반 저리 가라’로 달렸거든.”
“오빠, 아우토반 가봤어요?”
“응.”
“오빠 진짜 정체가 뭐에요?”
“난 미하엘 천사는 아닌데,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대천사) 천사는 천사야.”
난 또 잠시 긴장했다. 오빠는 진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가브리엘.”
“세레명인가?”
“잘 아네? 지원이도 가톨릭이야?”
“아뇨. 우리 집 모두 가톨릭이지만, 난 아니에요.”
“하하, 나도 세례명은 있지만 성당을 가지 않아. 그러니까 난 천사가 아니야. 믿어줘. 영화광 아가씨.”
우리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단란하게 걸었다. 어제 우리가 함께 왔다던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내 나는 절뚝거렸지만 마음이 편했다. 자꾸 미안한 일을 만드는 사람, 너무 미안해서 울게 하는 사람, 이 사람의 곁에서 걸으니 절뚝거려도 마음이 편했다. 도대체 이 평온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난 당신을 모르고, 당신 역시 나를 모르고. 우리는 이렇게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이 평온함이 설명될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는 여전히 콧물을 훌쩍거렸지만, 오빠의 발걸음을 다부지게 쫓았다. 오빠가 옆을 돌아보았다.
“너 어제 굶었으니까 잘 먹어야겠다. 먹고 싶은 거 말해봐.”
“많이 안 걸으면 좋겠어.”
“아, 너 다리 아픈 걸 까먹었네. 걷기는 무리겠지?”
오빠가 주춤거렸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또 업어주려고? 나 무거운데, 어제 날 왜 업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 너가 날 보자마자 뒤로 넘어가는데 어떻게. 목소리는 들릴 듯 말듯 고개는 완전히 제끼고……. 나 눈 풀린 여자 처음 봤어. 하하하하.”
추했겠다. 창피하다. 가만히 이불속에서 자는 척 하고 싶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확 느껴졌다.
“진짜 창피하다.”
“아냐. 어제 고생 많았어. 지원아, 저기 중국집 가자. 길만 건너면 되겠다.”
“나 사실 배가 너무 고파서 접시도 먹을 것 같아.”
“그래. 꼭 나오는 거 다 먹기다? 하하하하 ”
우리는 홍등이 새침하게 걸린 그 중국식당으로 조금 신나게 뛰어 들어갔다. 창가 자리의 ‘로얄석’은 마침 비어 있었다. 나는 천사와의 만찬에 모든 근심을 잊을 것만 같았다. 돈이 없어진 것도, 내 다리를 절게 된 것도, 모든 근심 걱정이 레스토랑 입구에서부터 내 머릿속을 떠났다. 오빠가 메뉴를 이것저것 물어봐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평온한지가 궁금할 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빠는 차분하게 말했다.
“어머니 하고 통화했어. 어머니 놀라시지 않게 너 카드하고 수표 들어있는 파우치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고 했고.”
“…… 고마워요.”
“그리고 가방 보니까 여권은 있더라. 근데, 지갑 말고 없어진 것은 없어?”
“아이패드가 안 보이긴 하던데.”
“돈 되는 물건이네. 지갑은 어떻게 생겼어?”
“프라다 지갑.”
“경찰서에 신고를 해 두면 나중에 좋아. 보험 처리도 되고.”
“아, 보험처리 하려면 신고해야 되는 거에요?”
“응. 여행객들은 잘 모르더라. 나도 들었어.”
경찰서를 찾던 지대범이 생각났다. 역시 변호사인가. 괜히 말렸다는 생각에 미안해진다. 나대신 방 값도 내 줬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를 짜증나 했던 것이 새삼 미안했다. 모두모두 미안했다.
“미안해요.”
“이제 그 말은 그만. 그리고 너 학교, 어학연수가 어느 학교인지 몰라서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학교 이름을 모르시더라구. 그래서 본의 아니게 너희 대학에 전화했어. 그랬더니 이쪽 대학에 말해 준다더라. ‘Al cala de Henares’ 맞지?”
“네.”
“그 쪽에서 너 등록증 없어도 여권만 가지고 오면 다시 만들어 준다고 했어. 어머니가 재발급 비용은 송금하신다고 하고. 학교 알아보고 한 거, 실례였더라도 용서 해줄 거지?”
‘고려대학교 학생이면서 왜 아는 척 안 했냐‘던 지대범이 생각났다. 자꾸 비교하면 안 되는데, 지대범에게도 신세진 게 있는데.
“용서는 무슨. 너무 고마워요.”
“너 A 반이던데, 그 담당자분이 Maria Jesus (마리아 헤수스)라는 교수님이셔. 카드랑 수표는 어머니가 특급 우편으로 Al cala 대학 Maria 교수님께 보내기로 했어. 일주일 안 걸리는 걸로 보내시기로 하셨으니까 어학연수 프로그램 시작하고 나면 도착할 거야.”
“고마워요, 정말.”
“그 말도 이제 그만.”
오빠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앗, 저 아름다운 코. 나는 아까 스쳐지나온 입구의 홍등처럼 붉게 물들고야 말았다. 더웠다. 몸이 더워졌다. 내가 갱년기는 아니니까, 이 홍조는 피곤 때문이어야 한다. 저 오빠 때문일 수는 없다. 그래야 한다.
“이것은 현금. 원래는 더 많이 가져왔는데, 택시비로 많이 날려서 이것뿐이야. 400유로(Euro)야.”
“왜 돈을 줘요? 지금 이렇게 해주는 것도 돈 드는데.”
“어머니가 카드 보내시기 전에 쓸 돈이 없잖아. 민박집 숙박비는 이미 해결했으니까 여기서 낼 필요없구 이건 그 때까지 여비야.”
“너무 돈 액수가 많은데요? 엄마한테 계좌 말해요.”
“어머니한테 내 계좌로 송금하라고? 백 만 달러 송금해 달라고 할까? 이번 기회에?”
“이걸 그냥 받을 수는 없어요. 오빠도 유학생이고 무슨 돈이 있어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난 영국에서 이제 곧 일을 시작할거야. 대학 졸업하고 회사 입사 확정 받았어. 내가 일 하기 전 몇 달만 기타를 배워보며 휴가를 즐기려고 준비했고 휴가 보낼 돈 벌어 뒀어.”
싫다. 정도껏 도움을 받아야 고맙지, 과하게 받는 것은 불편하다. 빚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타 배울 돈은 아니라고 해주세요. 나는 절박하게 말했다.
“나 때문에 등록 못 했다고만 하지 말아요. 나 죽고 싶을 거 같아요.”
“커리큘럼마다 등록하면 되고 그건 카드로 해도 되는 거야.”
“그럼, 이거 진짜 다 등록비였구나? 어? 엄마한테 송금해달라고 할게요.”
“너 스페인에 계좌 있니? 그런 거 만들고 하지 마. 카드 잃어버리거나 하면 더 위험해.”
“오빠 계좌로 쏘라는 거는 왜 안 돼요? 저보고 남의 등록비를 날름 먹으란 얘기에요? 불편해서 어떻게 해. 그건 안 돼요.”
“난 유럽사는 사람이잖아. 택시비는 내가 선택한 사치였고, 이 400유로(Euro)는 내가 너한테 보내는…….”
오빠가 잠깐 말을 멈춘 순간, 나는 이유없이 속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나의 천사 가브리엘이 ‘벨라 니가 좋아서 벌이는 일’이라며, 흡혈귀 딸을 낳는 순간까지 옆을 맴도는 제이콥처럼 좋아서 벌인 일이라고 수줍게 고백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 짧은 찰나에 소망했다. 아름다운 판타지, 이 동네에서 벌어지면 난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붉어진 내 볼을 부여잡고, 천사처럼 착한 척 하는 이 오빠가 내게 니가 좋아서 벌인 일이라고 해 주면 얼마나 흐뭇할까 잠시 소망했다.
“너한테 보내는 ‘위로’야. 어제 그런 봉변을 당하고, 제일 먼저 전화한 사람이 나였으니까, 나는 최선의 위로를 보내주고 싶어.”
젠장. 위로라니. 그런 건, 홍수로 집을 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인데, 난 왜 아쉬워지는 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칙칙한 아쉬움을 던지기 위해 멋진척 목소리를 높였다.
“바보, 받을 돈은 받아야죠, 그래야 나도 위로가 되든 뭘 하든 하지. 기다려요. 내가 바르셀로나 갈 테니까. 그 때 빚 갚을게요.”
“그래. 와줘. 그 때는 편하게 받을게. 그래도 프로그램 시작하면 그거 열심히 하고.”
“엄마한테 세뇌 당했죠? 언제부터 나한테 공부하라는 말을 하기로 마음 먹은 거예요?”
“하하하하하. 그런가.”
따뜻한 누들을 후르륵거리며 나는 천사가 아닌 남자, 이 남자, 이상호에게 어떻게 빚을 갚을지 생각해보았다. 마드리드 여행을 시켜주겠다고 할까. 제가 쥐어준 비상금 400유로(Euro)를 탕진하는 철없는 여자처럼 보일까. 그것은 싫었다. 그러면 이 남자에게 나는 무엇을 해줘야 할까. 나는 어떻게 빚을 갚아야 할까. 맥주도 없고, 와인은 더더욱 없었던 우리의 중국식 디너에서 나는 따끈한 국물에 취했는지, 날카로운 콧날 밑으로 살짝 돋아 올라온 오빠의 수염들에 취했는지, 그 저녁은 몽롱했다. 알 수없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에 다리가 욱신거리는 줄도 몰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