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말

by Nima

나의 어학연수는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의 스케줄은 한국에서 '뺑뺑이' 돌던 내 스케줄에 비하면 완전히 휴가 같았다. 오전 9시에서 12시 반까지 출석해서 하는 시늉을 했고, 그 다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학교 가까운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지, 아니면 장을 봐서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다음 또 남는 시간은 친구들끼리 시내를 돌기도 했고, 저녁에는 와인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 마디로 오전만 잠깐 앉아 있으면 그걸로 하루 할 일이 '끝'이었다.


게다가 나는 운이 좋았다. 오빠 덕분에 어학연수의 A 반 담당, 마리아 교수님은 나를 이번 프로그램의 '특별보호대상자'로 생각하신 것 같았다. 학생증, 교통카드 재발급, 모두 스페인에서는 있을 수 없는 '빛의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 뿐이 아니다. 난 기숙사도 끝내주는 곳에 배정받았다. 오전만 바짝 공부하는 어학연수 프로그램의 특성상 기숙사 사람들이 꼴사나우면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를 할 수 없다. 별 신경을 다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경우는 나를 공부 못 시켜 안달난 사람들을 만났다. 기숙사는 6인 빌라로, 라틴 문화권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칠레에서 온 법률 전공의 프란체스코 (Francesco), 프랑스 남부에서 온 법률 전공의 마리 (Marie), 의학을 공부하는 이탈리아 여자 안나 (Anna), 컴퓨터를 전공하는 스페인 남자 이야고 (Iago), 칠레의 일본 이민 4세인 후안 (Juan), 그리고 '나' 이렇게 6명이었다. 나를 빼고는 모든 사람들이 시끄럽고 정 많은 라틴 사람들이므로, 나는 유일한 '100% 외국인'이었다. 누군가 내게 시끄러운 라틴계 사람들과 한 빌라에 사는 것이 왜 좋았는가 묻는다면 나는 ‘따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정말 따뜻했다. 서로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고, 서로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Hi?'하고 반가운 척 해 놓고 언제 봤냐는 듯 ’쌩‘하게 구는 영미 지역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진득한' 맛이 있다. 한 마디 스페인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웃고만 앉아 있던 나도, ’여기 앉아봐라, 오늘 수업은 재미 있었냐?‘ 등등의 사소한 대화에 자꾸 초대되면서 어느 덧 조금씩 스페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새로운 일상 속으로 천천히 들어왔고, 반 벙어리 같았던 나는 아이가 '엄마'를 외치듯, 정말이지 힘겹게 책 속에서만 보던 단어를 읊기 시작했다. 나는 신이나야했다. 그런데, 마냥 신나지는 않았다. 그냥 이유 없이 힘이 없었다. 숨 쉬는 소리까지 섹시한 이야고의 친구, 브라질 출신의 브루노 (Bruno)가 말을 걸었을 때에도, 언감생심 다시 안 올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한 사람때문에 브루노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천사 코스프레의 남자, '이상호'때문이었다.


그 날, 오빠는 거짓말을 했다. 마드리드의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나는 직감적으로 오빠가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수기에만 열어준다는 비싼 독방 문을 박차고 거실로 뛰어 나왔다. 아저씨는 또 과잉친절이 준비된 얼굴로 상냥하게 인사했다.


“여독은 이만하면 풀렸지? 내리 며칠을 12시 넘어까지 자는구먼.”

“……갔죠?”

“총각? 아침에 갔지. 깨우지 말라고 알람시계도 빼라고 했어. 나 들어갈 때 사람 소리 못 들었지? 내가 고양이처럼 앞발을 들고 들어갔으니까.”


아. 이럴 줄 알았어. 가버릴 줄 알았어!! 허탈한 내 마음을 모르는 아저씨는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받을 거 받아 놨어. 그거 때문에 찾지? 가방 전해주라고 쇼핑백 주던데.”

“어디요?”

“방 침대 옆에 잘 놔뒀지. 걱정을 마요.”


끝도 없이 길어지는 아저씨의 수다를 뒤로 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가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불안했다. 잡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아쉬웠다. 이제보면 언제보나. 아쉬운 마음에 쇼핑백을 받아들고도 바로 열어보지는 못했던 나는 얼마가 지났던가, 용기를 내 쇼핑백을 열었다. 백에는 상비약이며 지도, 마드리드에서 Al cala 대학 가는 방법, 그리고 작은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마지막까지 '마드리드의 천사' 노릇을 하려는 이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원,

깨우기 싫어서 그냥 가. 나 바르셀로나 집에서 너무 정신없이 나와서 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약속 못 지켜 미안해. 공부 열심히 하고, 친구 잘 사귀고 재미있게 지내. Al cala 대학은 유서 깊은 곳이야.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대학 중의 하나거든. 정말 좋은 기회니까 재미있게 공부하렴. 바르셀로나에 들리면 연락해. 너는 언제나 환영이야.


그럼, Buena Suerte (행운이 있기를).


Gabriel.


p.s. 지도에 바르셀로나 주소 적어놓았어. 바르셀로나 올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줘. 룸메이트 방의 전화번호도 적어놓았으니까, 공중전화에서 바로 걸면 될 거야.'


간단한 듯 간단하지 않은 그 메모를 보고 나는 당장 또 ‘수신자 부담 콜렉트 콜’을 걸고 싶었다. 아침에 출발해봤자 아직 마드리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저 벌었다는 돈은 다 나 주고 무슨 돈이 있나.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면 저는 등록비도 없는 거 아닌가. 남은 돈 가지고는 저 하고 싶다던 기타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갔는가. 다짜고짜 또 전화를 걸어 징징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참기로 했었다. 또 전화를 걸어봤자, 천사는 날아갔다. 나는 그 메모를 쥐고 한참을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뭐 하는지, 잘 갔는지, 무슨 생각 하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고, 물어보고 싶고, 보고 싶고, 보고 싶고. 보고 싶다!! 나는 도대체 이 남자에게 왜 이러는가. 그는 더 '엮이기 싫어' 도망갔을 수도 있는데, 나는 왜 이 낯선 남자에게 자꾸 '보고 싶다' 하는가. 이 순간, 나는 친오빠가 한 말이 생각났다.


자칭 타칭 연애 달인, 우리 친오빠. 방학이면 무조건 서울에 있는 반만 미국 학생인 우리 오빠가 여느 방학처럼 한국에 나왔던 어느 여름, 그 때 오빠는 정말 여자 하나 때문에 무지하게 바빴다. 눈치 없이 자꾸 따라 다니는 여자가 있다며 두 달 내내 징징거리던 오빠는 그 여자를 떼어 내려고 난리를 쳤다. 우리 집에 몰려온 오빠의 친구들은 언니더러 '멍청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언니는 오빠보다 멍청하지 않으신, 무려 '의사'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빠들은 하나같이 '멍청이'라고 노래를 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뭐가 문제야?”

“그 멍청이가 못 알아들어.”

“뭘?”

“내가 지 싫다거.”

“싫다고 말 했어?”

“야, 누가 '나쁜 남자' 영화 찍냐? 니 오라버니가 그렇게 병신 같아?"


아니, 오빠는 ‘날라리’ 같아. 나는 오빠를 쏘아보며 말했다.


"싫다고 얘기를 안 하면 모를 수도 있지, 너가 비겁한 거 아냐? 싫다고 딱 얘기도 안 하고."

"지원아, 너 걱정되게 왜 그래. 너 오빠 말 잘 새겨들어. 남자가 연락이 안 되잖아? 그거 너 싫다는 거야.“

“알아."

“뭘 알아. 계속 어디냐고 문자 보내고 연락하지 마. 특히, 연락이 안 되다가 어쩌다가 연락이 닿더라도, 그건 다시 받아주는 게 아니야. 그런데도 막 여자가 보자고 난리 치잖아? 그 때 남자가, '어, 그래. 다음에 보자.' 이러면 무슨 뜻인줄 알아?"

"뭐, 뭔데?"

"다시 연락하면 죽여버린다는 거야. 알았어?"

“뭐, 죽여?"

“어. 귀찮아 죽겠으니까, 제발 꺼지라는 거야."

“재수없어."

“원래 남녀문제는 냉정한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거, 내 동생이니까 특별히 알려줘야되는 게 있다."


오빠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는 씩씩거리는 척은 했지만, 귀에는 제대로 안테나 꼽고 바짝 긴장하여 ‘대기’했다.


“어쩌다가 말만 하던 그 남자를 진짜 만났다 쳐, 횡재 했잖아? 좋겠지? 얼마나 티 내겠어? 그렇게 들뜬 여자 앞에서는 웬만큼 남자가 못되먹어도 싫은 척 못하거든? 그 때 남자가 헤어지면서 다음에 언제 딱 보자는 말을 안 하면 진짜 꺼져 줘야 돼. 옛다 얼굴 한 번 봤으니 각자 인생 살자, 이 뜻이야.”


평생 싸우기만 한 우리 오빠에게 전화라도 해야하나. 메모를 들고 앉아 해석을 하자니 자신이 없었다.


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의 남자가 남긴 메모를 찬찬히 읽었다. 여기에는 나더러 언제 명확히 다시 만나자는 말이 없네. 그저 네가 바르셀로나에 오면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만 있다. 언제나 환영이라는 말, 이거 참 싫어하는 말인데. 미국식으로 '언제나 환영'은 '우리 언제보니, 잘 살아라' 아니었나. 천사 역시 남들 그냥 하는 인사말이나 쓰려고 갖은 자상함을 다 보여준건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뱉은 빈말 인사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을 핑계로 진짜 찾아왔다고 생각해보자, 땀이 나네. 정말이지 지구를 떠나고 싶을 것 같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미운 사람일까. 아니야, 그러면 마드리드까지 날아왔을리가 없잖아. 나는 이상호가 한국어로 남긴 간단한 메모 한 장을 해석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이 언어를 속 시원히 해석해줄 친구들인데. 아니지, 이런 생각하는 내 자신이 우스웠다. 이 패턴은 소개팅이나 했을 때의 내 모습인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가. 눈을 부릅뜨고, 마사지 열 번 받고, 특수 메이크업 반나절씩 공들여서 마스카라 무게 때문에 눈 깜빡 거리는 게 천근만근 같을 때 만나는 소개팅의 낯선 남자. 알듯 말듯한 이야기만 나누다 다음에 보자고 돌아서놓고, 애꿎은 주선자만 며칠을 들들 볶았던 나의 별 볼일 없는 시간들. 그 순간들에나 어울리는 상상이다. '곧 봐요'는 '잘 살아라, 너만의 세계에서' 아닌가. '언제든 환영'도 그런 뜻일 거야. 잘 있으라는 인삿말도 없이 언제든 환영이라는 빈말 같은 메모만 남기고 돌아간 사람, 그런 인사인 것이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왜 이리 떨쳐 내지 못하는가. 그렇게 많은 조언들이 증명해주고 있는데, 이 메모는 그저 인삿말일 뿐이라고. 하지만, 온 몸이 따끈해지도록 생각을 해도 멈추어지지 않는 생각은 하나였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내 천사가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 이렇게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 작별 인사는 인사로 받아들이기 싫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이렇게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다니 정말 천재지변이구나.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밤마다 나는 애꿎은 침대만 꿀렁대며 불면의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언제였던가 도저히 잘 수가 없던 어느날 밤부터 나는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하루 일과를 적고, 그 날 떠올린 내일의 계획을 적고, 오빠의 안부를 묻는 착한 말들을 적어 매일같이 메일을 보냈다.


그것은 일종의 ‘일기’이기도 했지만, 우리 친오빠가 제일 싫어하는 '알아들어주지 못하니 똑 부러지게 나쁜 남자가 되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이 메모를 혼자 해석할 수 없으니 물어라도 보고 싶었다. 그 여름의 언니처럼 내가 징징대면, 다시 연락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메시지가 돌아오면 좋겠다. 너무 보고 싶은데,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들으면 정신이 차려지지 않을까. 아닐지도 몰라, 아니라는 말을 문자로 확인하면 내 마음은 산산조각 날까. 나는 도대체 왜 일생에 두 번 만난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일은 나름 일과가 되었다. 매일 같이 보내는 메일의 말미에는 늘 다짐처럼 다음에 만나면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적어 보냈다. 다음에 오빠가 마드리드에 오면 레티로(Retiro) 공원에 가서, 브리짓 존스와 다니엘이 그러했듯 호수위에 배 띄우고 노를 저어주겠다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고, 가까운 근교라도 같이 가주면 기타를 놓고 나와도 후회 되지 않는 맛있는 저녁를 사 주겠다고도 했다.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할 때 내걸만한 요상한 제안들을 매일같이 보냈다. 그렇게 해 주겠다는 공수표가 스무 장 정도 남발되었을 때, 우리 빌라의 거실에 있는 하얀 전화기에 처음으로 한국 여자를 찾는 전화가 왔다. 거실에 앉아 있던 나는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Hola (여보세요.)"
”지원이 아니니?"

“네. 네? 어어어어어어?”

“하하, 나야. 이상호.“

“오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간 한 번도 이 집의 하얀 전화기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 적은 없었다. 빌라 사람들이 모두 ‘외계어’로 소리를 지르는 나를 둘러쌌지만, 나는 한국어를 멈출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놀란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오빠가 꼬박꼬박 제대로 답장을 해 준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 친오빠의 레슨에 나오는 '남자와 제대로 연락이 안 되는' 상황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연락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무서운 상황이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의 그 남자는 내가 남긴 번호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었다. 연애달인', 현씨 집안의 장남 말은 이 나라 스페인에서는 안 먹히는 것인가.


“너가 적어준 게 일반 번호 같아서 어학연수 담당하는 사무실 번호는 아닐지 고민했어."
"오빠아아아아아아아."

"아이고, 전화 목소리만 들으니까 너 술 마신 것 같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

"하하하."


나는 그렇게 괴성을 지르는데만 꽤나 시간을 보냈다. 반갑다는 것으로는 표현이 다 안 되는 흥분 때문에 우리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대화 같은 것은 빌라 친구들이 기다리다 지쳐 제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제대로 나눌 수 있었다. 오빠는 나에게 다짜고짜 주말에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주말? 이번 주말요?"

“그래? 어디 가고 싶은 거 많던데?"

"정말 가 주게요?"

"어학연수 프로그램에서 단체로 가는 exclusion (소풍 같은 것) 없었니? 어쩜 그렇게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오, 잠깐. 지금 주말 근교 나들이 스케줄을 물어보는 겁니까. 제 메일에 늘어 놓았던 그 끝도 없는 명승지 플랜을 지금 실천에 옮기시겠다는 겁니까. 혹시 당신 마드리드 올 일이 생기신 겁니까. 아니면 이게 뭡니까. 아니지 아니지, 이게 무슨 떡이든 나는 가릴 필요가 없지. 도대체 이게 무슨 행운이냐. 스포츠 신문의 오늘의 운세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왜, 왜, 왜요? 왜애애애 요오오오오?”

“음, 그러니까.”

“오빠가 알려주려고? 좋아 좋아!!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너무 좋아하는데?”

“진짜 가주게요?”

“응……, 안 가본 데에서 제일 가고 싶은 데는 어디야."


나는 우리 친오빠에게 '강한 니킥'이라도 날려주고 싶었다. 엉터리 박사. 난 오빠 너님의 말도 안 되는 가설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이며 이 남자에게 메일을 보냈는지 상상은 할 수 있니. 이 자식, 집에 가기만해. 가만 두지 않겠어. 아니지. 너 한국에 오기만 해, 군대 보내야겠다. 나는 이빨을 갈며 좋아했다.


"제일 가고 싶은 건 그라나다!"

"음, 그건 안달루시아 아닌가 (스페인 남부. 꽤 멀다) 며칠 잡아야 될 것 같은데."


아, 그랬나? 그라나다가 마드리드에서 그렇게 먼 곳이었나. 나는 지도가 가물가물했다.


"그럼, 세비야. 세비야도 멀었나?"

"그라나다보다는 좀 나아도 거기도 밤차를 한 번 타야 될 거리야. 며칠 일정일 거야."


오오, 흥분해서 망치지 말자. 남자가 어렵게 꺼낸 주말 나들이를 결국 ‘우리 머니까 가지 말자’고 마무리 해야 되겠니. 성공한 연애사가 희박한 나로서는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해야, 남자가 ‘언제를 딱 찍어’ 다시 만나자는 말이 나오게 될지 감도 안 왔다. 솔직해 지기로 했다. 실수를 줄이려고.


"주말에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지도가 가물가물해서요. 하도 전공 수업을 제대로 안 들었더니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하하하하. 알았어. 마드리드 근처에서 안 먼 곳, 너희 프로그램에서 단체로 안 가는 곳 중에 세고비야나, 톨레도 중에 골라볼래?"


세고비야. 귓가에 확 꽂히는 이 익숙한 이름. 공주님이 살았다는 그 예쁜 성. 분명히 exclusion 목록에 없었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 세고비야 가 줄 거예요?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하하하하하. 세고비야가 좋아?"

"응."

"일단, 렌트를 알아봐야 되겠네."

"안 돼. 절대 차 몰고 여기로 오지 마요."

“왜?"

"버스 타고 가서 터미널에서 만나. 내가 들어보니 스페인은 버스비가 참 싸."

"하하하하, 돈 아직 송금 많이 못 받았니?"

"아뇨. 아껴야지, 길바닥에 너무 뿌렸어요. 오빠 말이에요."

"난 괜찮아."

"됐고요, 버스타고 와요. 주말에 버스 각자 예약하고 도착시간을 봐, 그리고 터미널에서 헤어지는 거예요. 어때? 좋죠? 그리고 이번엔 제발 버스표만 들고 와요, 내가 물 한 방울까지 쏠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쏜다고? 그게 뭐지?"

"아, 산다는 말이에요. 헤헤헤."

"음, 버스 타고 만나기……, 좋아. 재미있겠다. 가서 못 만나면 또 나한테 전화해. 핸드폰 가져갈게."


우리는 그렇게 원래 잘도 함께 돌아다녔던 사람들처럼, 약속을 잡고 주말에 보기로 했다. 원래 자주 통화하던 사람들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안녕까지 했지만, 정작 전화를 끊고 나서는 쉽게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잡은 이 약속이 너무 설레어서. 그리고 내가 지금 막 발을 들여 놓는 '오빠'라는 이 낯선 사람이 궁금하고, 두려워서. 새로운 사람을 금방 알고 금방 친해지는 일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는 사실, 갑자기 생각났다. 좋은 맘먹고, 좋은 기회에 덜컥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가. 이렇게 덜컥 새로운 사람에게 '빛의 속도'로 달려들어도 되는 걸까. 나는 더 고민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를 자책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빠를 보고 싶은 내 마음을 이길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그 무엇도 이 강력한 이끌림으로부터 나를 냉정하게 떼어내지는 못한다.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시키기 귀찮은 이 엄청난 힘, 이것은 무엇인가. 정말 천사인가. 알 수 없는 이유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어서 일까.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인삿말에 속지 않기로 했건만, 그렇게나 거역할 수 없는 한 장의 메모때문에 나는 얼마나 날아오르게 되는가. 제발, 떨어지고 싶지 않다. 제발, 떨어지더라도 부디 안전하게 살며시 깃털처럼 상처없이 내려앉게 하소서. 나는 오래된 하얀 전화기를 붙잡고 오래도록 소파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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