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비야의 버스 터미널은 작았다. 언젠가 친척 마중 나가본 양재동 남부터미널의 풍경을 닮은 것도 같다. 복작대는 사람들, 완장 찬 아저씨들, 그리고 묘한 타이어 냄새들. 낯설지만 낯익은 작은 버스 터미널에 내리자, 천사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분명히 아주 일찍, 그러니까 대단히 서두르는 기분으로 나왔는데 결국은 오빠보다 조금 늦고야 말았다.
“도대체 언제 온 거예요?”
“얼마 안 기다렸어. 미안해하지 마.”
오빠는 내게 차가운 콜라 캔을 건네줬다. 버스에 실려 오는 내내 그리웠던 ‘쉬시식’ 김빠지는 소리. 세고비야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톡 쏘는 콜라 한 캔이 생겼다.유럽에서 구하기 어려운 차가운 콜라를 보며 아침 댓바람부터 ‘기대한 것보다 더 주는’ 이 남자에게서 정신을 차리자고 다짐했다. 쿨하게 생각하자. 제대로 한 번 해 보자. 이 남자가 여길 온 이유를 확인하기 전에는 들뜨지 말자.
분명히 당신이 먼저 이번 주말에 뭐하냐고 물었다. 그것은 한 번 만나보자는 말이다. 데이트 하자는 말이다. 백보 양보해도 이것은 다 된밥 직전이었다. 이것까지 실패하고 싶지는 않다. 쿨워터 향 팍팍 풍기게 쿨한 여자가 되자. 나는 걷는 발걸음 내내 주문을 외우듯 내 자신에게 반복해서 다짐했다.
“날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다행이야.”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각자 작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알아서 발걸음을 맞추며 걸었다. 아담한 보도를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럽의 작은 도시들이 늘 그러하듯 동화 속 그림 같은 나지막한 건물들이 계속 나를 따라왔다. 겨울 같지 않은 환한 햇살, 청명하게 맑은 하늘, 그리고 더 따뜻한 곳에서 이렇게 달려온 바르셀로나의 남자. 처음 보는 이 낯선 그림은 언제나 보아왔던 것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함께 여행을 다녀온 사이처럼 나란히 걷는 이 길은 힘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오빠가 말했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갈 곳이 하나더라? 여기가 특별히 보고 싶은 이유가 있니?”
“세고비야 성 밖에 없는 데 왜 오고 싶었냐고요?”
“응.”
“오빠, 저거 디즈니 마크랑 닮아 보여요?”
“디즈니 로고? 아니, 왜?”
“누가 그 마크가 이 성을 따라한 거라던데, 오래도록 궁금해 해왔던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 사람들도 좋아하는 인기 있는 당일치기 코스인 세고비야는 ‘세고비야 성’빼면 사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작은 동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여행객들 사이에는 상당히 인기있는 코스였다. 월트 디즈니 할아버지가 이곳을 다녀가면서 작고 예쁜 성의 모습에 홀딱 반하여 이 성을 모델 삼아 그 비싼 ‘디즈니 마크’를 만들었다는 전설. 그 전설은 ‘마드리드’ 다음에 들릴 추천 여행지로서 ‘세고비야’를 추천하는 첫번째 이유로 꼽힌다. 우리나라 여행 책들이라는 게 서로가 서로를 복제하기에 서점을 점령한 여행 책마다 ‘세고비야=디즈니’라는 엉뚱한 미끼로 낚시질을 하고 있고, 고만 고만한 여행책을 쥐고 유럽에 입성하는 여행객들은 저마다 디즈니 성을 상상하며 세고비야에 온다. 그러나 사실 하나도 안 닮았다. 나는 세고비야의 성을 보고 디즈니 타령에 동참하지 않는 오빠가 또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디즈니 로고를 닮지 않은 세고비아 성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 예쁘다.”
“마드리드보다 맘에 들어?”
“네. 훨씬.”
“런던 가봤니?”
“아뇨.”
“넌 런던보다는 에딘버러를 더 좋아할 것 같다.”
“에딘버러도 작고 예쁜가?”
“응. 옛날 모습 많이 남아 있어. 그런 거 좋아하는 같아.”
“맞아요.”
에딘버러는 모르겠지만, 이 작은 동네는 걸으면 걸을수록 정말 마음에 들었다. 데이트 코스로 이런 곳은 또 없을 것 같았다. 작은 터미널로부터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그 옛날에 한 땀 한 땀 아니, 하나 하나 가지런히 놓았을 벽돌길이 펼쳐지고,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언덕진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아담한 그림이 눈앞에 나타난다. 파란색 디즈니 로고보다 더 귀엽고 작은 성, 세고비야의 성이 산책을 즐기던 관광객들의 눈앞에 선물로 나타나주는 곳.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세고비야 사진을 보여준 ‘선배 언니‘가 생각났다. ‘과방’에 앉아 ‘초코송이’과자를 먹고 있던 내게 무슨 말끝이었는지, 세고비야의 성에 가면 많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선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가 ‘세고비야’라는 말을 했을 때, 성의 꼭대기가 생각나긴 했었다.
“성이 예쁘다더니, 가는 길도 그렇고 전부 다 정말 귀엽다.”
“남자친구가 얘기해줬구나.”
오빠는 내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올 것이 왔구나. 나는 멋진 척 오빠를 돌아봤다.
“남자친구 아닌데. 여자가 얘기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네.”
“오빠는 어찌하여 제 사생활을 떠보는 것입니까?”
“아, 아냐. 그냥 해 본 말이야, 미안해.”
당신은 지금 매우 당황했다. 하하하. 재미있다, 재미있다. 나는 완전히 놀릴 준비가 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남자한테 인기 많을 것 같아요?”
“너가 뭐?”
“남자친구가 서울에서 딱 기다려주고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말 아니었어.”
“좋다 말았네. 그거 좋은 말인데.”
“나쁜 말 아니야? 남자가 많다는 거. 양다리 같은 거.”
“하하하하하. 그거 내 소원이에요. 양다리 한 번 해 보고 죽어야 되는데.”
“뭐라구?”
“오빠, 걱정은 마요. 나 인기 없어요. 돈으로 환심을 안 사면 안 먹힌다구요. 저 돈 많이 벌어야 되요.”
오빠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야. 넌 그럴 필요가 없어.”
“돈 벌지 말라는 건가?"
"그 말이 아니고, 돈으로 뭘 할 필요 없다고."
"왜요, 나 맘 상할까봐 걱정이에요? 저 조련된 몸이에요. 백 번 천번 차여도 공주병도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을 붙들어 매세요. 저는 저 혼자 잘 해결해요.”
이것은 ‘립 서비스’가 필요한 영역이 아니다. 내 자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나도 험난한 사춘기를 거쳤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내가 ‘인기 있는 여자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틈새시장’을 노려야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주로 엄마, 엄마 제자들이 소개해주는, 그러니까 ‘조건을 좀 보면서 현실과 타협할 준비가 된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도 더 이상 차이기만 하는 것은 마음이 쓰려서 싫었다. 우선은 나에게 호감을 깔고 나를 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남자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마음은 먹었어도 그놈의 마음을 맞추기는 정말 어렵다’는 사실, 그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결론만이 내가 끝내주는 미모가 아님에도 나를 소개 받겠다는 남자가 서울에서 나타나곤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오빠는 적응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혼자 미안해하는 표정, 낯설지만 반가웠다.
“공주병? 그건 공주처럼 행동한다는 거지?”
“음, 공주병은 안 예쁜 여자가 자기가 예쁜 줄 안다는 거예요, 안 예쁘면서 잘나가는 척한다고 해야되나? 안 예쁜데 잘 나가는 공주는 피오나 공주 정도가 전부인가, 얼굴 안 되는데 공주 직업 있는 사람이 이렇게 드물다니.”
“피오나? ‘슈렉’에서 나오는 공주? 너가 ‘피오나’라구?”
“아니, 내가 그 정도에요?”
오빠가 잠깐 멈춰 섰다. 이 진지한 외국인 모범생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야. 너는 정말 귀여워…….”
“고마워요, 하하하하.”
“진짜야.”
아, 그만. 여기서 더 길어지면 그걸 수습하는 것보다 못났다고 욕 먹는 게 덜 힘들다. 나는 여기서 이 촌스러운 남자를 말리고 싶었다.
“오빠, 물론 내가 피오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예쁜 건 아니다' 이 정도는 셀프 감각이 있다고요.”
“아니라니까.”
“그리고 한국 여자한테는 귀엽다는 게 너 못생겼다는 뜻이에요. 예쁘면 ‘예쁘다’고 말해야 칭찬으로 먹혀요.”
나는 쿨한 여자답게 앞장서서 걸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계속 이 오빠가 진심인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한국 남자이되 한국 남자의 눈이 없는 이 사람, 광대뼈에 턱뼈 제대로 발달한 안젤리나 졸리를 보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치켜 세우는 미국 사람 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광대 좀 나와 주면 어때, 당신이 예쁘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도 가능한 걸까. 나는 피식 웃었다. 그 때, 오빠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궁전에 왔으니까 귀엽고 예쁜 지원이가 공주 해.”
푸하하. 푸하하. 미쳤어. 이 남자는 미치지 않고서야 대낮에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외국어로는 농담이 좀 다를 수 있지. 그래, 좋다. 나는 파리에서 당신을 만난 그 순간부터, 당신 덕에 여기서 호강할 팔자인가봐. 나는 껄껄 더 신나는 척 웃어대며 공주라도 되는 냥 거만하게 손을 얹었다. 큰 소리로 웃었지만, 우리는, 최소한 나는 신부 입장할 때의 신부라도 되는냥 온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소박한 작은 성의 ‘공주의 방’은 청렴해보이기까지 했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은 둘째치고라도 투박해서 오히려 검소해 보이는 마드리도 궁과 비교해 봐도 '돈 없어'보였다. 역시 ‘국왕급’ 메이저 침실하고는 게임이 안 되는 시골 공주 소박함을 마음 아파하며 나는 붉은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작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공주 방이 소박하니까 마음이 아프려고 해요."
“디즈니에서 너무 과장되게 그려서 그렇지 옛날에는 이 근처에서 제일 부자 공주님이었을 거야.”
“맞아. 재벌 집 딸들은 베르사이유 궁전하고 쇤부른 궁전에 살고, 여기는 중소기업 정도 되려나.”
“하하, 왕궁 박사네. 지원이는 여행을 좋아하니?”
“누구든 그렇게 물었을 때, ‘no'라고 얘기하는 사람을 못 봤어.”
“그러네, 그럼,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뭐를 물어보고 싶어요?”
“음, 여행을 하는 목적, 목적이 궁금해”
“난 어학연수를 왔다니까. 여행 온 여자가 아니에요.”
“그래. ‘어학연수‘를 오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스페인어를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혼자 길을 떠나 이렇게 먼 유럽으로 온 것도, 모두 다 궁금해.”
궁금할 것도 많다. 나는 오빠를 잠시 바라보았다. 선한 미소가 어린 저 얼굴은 진심으로 내가 왜 돌아다니는 지를 묻는 것 같다. 나는 왜 돌아다니고 있는가. 내 여행의 목적, 사실 그것은 간단하다. 현실도피 때문이다. ‘잉여’로운 시간의 확보. 거창하게 말하면 ‘충전의 시간’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현실도피의 수단’인 나의 여행. 나는 사람들한테 구박받는 일상이 너무 지겨워서 늘 바깥으로 돌고 있다. 반복되는 도피 놀이는 이제는 스무 살 배낭여행객처럼 설레는 마음 같은 것을 주지 못한다.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도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늘 마음 한 구석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거창하게 포장하자면, 나 자신을 발견하고, 충전하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고 둘러댈 수…… 있겠죠.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그냥 다니는 거예요. 돈 낭비 하러 다녀요.”
“음…….”
저 착한 남자는 뭔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해보려고 또 움찔거렸다.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요. 나는 여유 있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위로할 필요 없어요. 저는 저한테는 후하게 말 안 해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 뭐, 이거 다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는 거 맞죠. 일종의 도피, 일종의 핑계, 그냥 내 자신을 마주보기 싫어서 시간을 때우는 정도.”
“꼭 항상 대단하게 발전해야 하는 건 아니야.”
“안 대단한 발전도 없어요. 나는 그냥 나보고 빈둥빈둥한다고 구박 못하게 잠깐씩 도망 나오는 거예요.”
오빠는 돌난간에 걸터앉았다. 작은 창가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오빠의 셔츠가 빛났다. 빛나는 셔츠안의 목덜미가 살짝 움직였다. 크리스찬 베일 같던 그 목소리는 조금 더 낮게 깔렸다.
“왜 ‘발전’이 필요하니. 그냥 쉬는 시간도 중요해.”
“하지만 맨날 쉬나?”
“음…….”
“여행을 하면 보통 ‘성장’을 하잖아요. 오래된 신화 같은 걸 보면 그게 어느 나라의 신화이든, 신화의 주인공은 시련을 겪으며 긴 여행을 하고, 성장하고 배우고, 결국 영웅이 되어 돌아오잖아요, 근데 저는 그냥 제 자신을 정면으로 보기 싫어서 뱅뱅 돌고 있어요.”
“지원이 영웅이 되고 싶어?”
“하하하하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는구나.”
오빠 말이 맞다. 나 영웅처럼 금의환향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안 풀리는 모든 일들이 잠시 훌쩍 떠나 있다가 돌아가면 줄줄이 다 풀려있길 바라는 마음, 그런 걸로 치면 나는 영웅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내 현실은 정말 남루하다고 할 수 밖에. 서른이 되어서도 특별한 벌이는 없고, 십년 내내 드나든 안암동의 학교는 지겹다 못해 진저리가 쳐진다. 그래도 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를 부르는 곳이 없기 때문에. 밥값이라도 잘 해보고 싶은데, 그 정도라도 하려면 나는 영웅이 되기 위한 특훈까지 받아야 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엄마 돈 축내면서 이 난리를 쳐야 겨우 밥값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사람. 이 사실을 받아들인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몰래 공주의 침대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아무도 없는 공주의 방, 관광객들을 위해 단정하게 정리된 공주의 침대는 돌보다 딱딱했다. 나는 침대를 쓰다듬었다. 오빠가 물었다.
“영웅 말고 되고 싶은 건 없어? 그 침대에 어울리는 얘길 해봐. 어릴 적에 제일 부러웠던 공주님이 누구야?”
“서양 동화책에서? 난 잠자는 숲속의 공주.”
“잠을 자고 싶어?”
“아니, 하하하하.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면 왕자가 와서 뽀뽀해주잖아요.”
“하하하하하하. 지원이는 게으른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나를 반 만 아는 거죠. 나는 완전 게을러요.”
“하하하하하.”
착한 남자는 물었다.
“한국 동화에서는 되고 싶은 공주 없어?”
“오빠가 한국 동화를 잘 몰라도 어디서 다 들어본 얘기일 거예요.”
나는 자신 있었다. 전래동화, 그 모체가 되는 구전 신화, 뿌리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들, 공통의 주제가 나온다. 이웃나라에서도 심청이도 나오고, 장화, 홍련도 나오고, 우렁 각시도 만날 수 있다. 여자 아기들의 로망, ‘공주 이야기’ 역시 돌고 도는 레퍼토리가 있다.
“오빠 잘 들어봐요. 어떤 집에 딸이 셋 있는데, 셋째 딸이 너무 예쁘더래요. 셋째 딸만 엄마가 다른데, 계모가 이 셋째 딸을 미워해가지고 갖은 구박을 다 했거든요.”
“하하하하, ‘유리 구두’ 이야기 같은데?”
“근데, 이 구박받는 셋째 딸한테 일만 시키면 몰래 도와주는 동물도 있고, 하다못해 무슨 도자기를 닦으니까 도자기 안에서 요정이 나와서 막 나와서 도와주고 그랬대요.”
“그건 왠지 '알라딘 램프' 같아.”
“화가 난 계모가 그 셋째한테 말도 안 되는 걸 구해오라고 멀리 보냈는데, 중간에 요괴가 나타나서 이 딸한테 시비를 걸어요, 그런데 요괴가 어딜 다쳐 있었던 걸 딸이 발견해서 간호해주거든요, 그랬더니 밤에 왕자로 변했대요.”
“으으으, 그건 ‘미녀와 야수’인데?”
“이거는 중남미 전래동화, 멕시코 전래동화래요. 이 동화가 한국 전래동화 세 네 권하고 겹쳐요.”
오빠는 정말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눈이 빛났다.
“재미있다. 그런 공부를 하는 구나, 멋있는데?”
“내용은 재미있죠. 나라도 다르고, 인종도 달라도, 모두가 끄덕거릴만한 공감 가는 이야기, 공통적인 테마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
“하지만?”
“옛날이든 지금이든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려면, 여자는 예쁘고, 남자는 돈 많은 왕자여야해요.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에요.”
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독립투사보다 더 의연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침을 꿀꺽 삼키기까지 한 나를 보고, 오빠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따뜻한 눈길, 많은 말을 머금은 입꼬리를 애써 외면했다. 그가 너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나만의 착한 남자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했다.
“맞네. 남자들은 다 돈이 많았네.”
“주인공 여자들은 다 예쁘고, 피오나 공주 빼고.”
“요즘은 다르잖아. 브리짓 존스는 안 예쁜데? 아, 공주가 아닌가.”
“오빠, 브리짓은 공주만 아니지, 공주보다 더 해.”
“뭐가?”
“‘I like you just as you are (당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라고 하는 마크 달시 변호사고, 집안에다가, 왕자에요.”
“하하하, 그래?”
“그것도 다 판타지에요. 글로벌 온 나라 여자들이 꿈꾸는 남자. 현대판 왕자님.”
오빠는 뭔가 또 말을 하려고 했다. ‘또’ 나를 위로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시는가. 그러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저는 위로가 필요한 여인이 아니어요.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여기든 저기든 사람들은 힘이 들면 판타지가 필요한가봐. 판타지를 심어주는 이야기가 늘 돌아요.”
“그 모든 이야기의 목적이 판타지라고 생각하니?”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고, 돈 없는 남자지만돈 많은 공주님이 뒤를 봐주는 경험을 하고……, 이 모든 러브스토리에도 판타지가 있죠. 요즘 TV는 더 뻔뻔해요, 모든 여자 주인공은 돈도 없고 안 예쁜데 사랑받고, 남자 주인공은 돈도 많고 잘 생긴애가 랑 커플되고, 요즘엔 이혼까지 한 누나만 사랑하기도 하죠. 굳이 뱀파이어가 안 나와도 드라마가 판타지가 되어버렸어요.”
“지원아”
“네,”
“너도, 아니, 넌 사랑이 어렵니?”
아무도 없는 공주의 방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작은 창문을 등지고 선 오빠는 열심히 일장연설 하느라 정신을 잃은 내게 ‘사랑이 어렵냐’고 물었다. 내가 드라마를 판타지라고 욕하자, 오빠는 내게 사랑이 어렵냐고 물었다.
“나요? 왜요?”
“음. 나쁜 말 아니야, 넌 아무한테나 ‘사귀자’고 말하지 않을 것 같아.”
“그것 맞는 말인데. 갑자기 왜 물어요? 오빠는 아무나 예쁘면 사귀자고 해요?”
“나? 나 잘 못해. 그래서 물어본 거야. 너 나랑 비슷한 것 같아서.”
“오빠, 거짓말 마요. 오빠 차인 적 있어요? 난 한 백번 쯤 차여봤어요. 이 정도 내공이면요, 사랑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쿨하게 받아들이게 되요. 암튼 나는 마크 달시 같은 완전 멀쩡한 남자가 나하고 갑자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낮다는 거, 그게 내가 워싱턴 주에 가서 라 푸쉬 해변을 배회해도 늑대로 변하는 제이콥을 만날 수 있는 확률보다 더 낮을 수도 있다는 걸 쿨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니까요.”
“제이콥? 트와일라잇에서 나오는 섹시한 남자애?”
“응”
“그건 진짜 판타지 소설이잖아.”
“이보세요. 브리짓 존스도 판타지라니까. 대니얼(휴 그랜트)이 나와서 브리짓한테 잘 안 되니까 마치 그냥 사랑의 짝대기 들이대는 현대극 같지만, 마크 달시 같은 남자랑 엮이는거 봐요, 판타지에요. 늑대로만 안 변했지 걔가 하는 짓이 제이콥하고 뭐가 달라요. 변호사가 미국 회사에서 불러서 가 놓고 작별 키스 해준다며 다시 오는 게 어디 있어. 오빠 같으면 멀쩡한 직장 놔두고 브리짓 때문에 올 거예요?”
“글쎄."
오빠가 가만히 웃었다.
“판타지를 믿지 않는 냉정한 아가씨, 아가씨한테 사랑은 얼마나 어려운 건가요.”
어두운 회색빛 석벽 아래 갑옷에 투구를 쓰고 있던 기사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 사람이 왜 ‘사랑이 어렵냐?’는 드립인가요. 이 얄미운 질문은 해리포터의 스승님들도 풀지 못하는 마법처럼, 내 머릿속에 깊숙이 남아버렸다. 나만 사랑이 어려워 이렇게 외로운 걸까. 서울에 있는 모든 여자들 가운데 나한테만 사랑이 어려웠던 것인가. 내가 그렇게 이유 없이 어렵게 구는 탓에 나만 어렵게 가고 있었나. 내가 그렇게 꼭 막힌 어려운 여자라면, 나는 왜 인생사 통틀어 처음 만나는 당신과 이렇게 낯선 세고비야의 한 구석을 함께 거닐고 있나. 말 없이 걷던 오빠가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지원아.”
“네.”
“넌 나한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만나자고 했니? 뭘 사주겠다, 뭘 보여주겠다. 많은 약속을 했지?”
“밥 한번 산다고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그냥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누구나 길 가다 돈을 주을 수도 있어.”
당신은 로또 같은 사람이지만, 길 가다 주운 지갑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우연히 주운 지갑에게 유난하게 빼 쓴 돈을 다시 넣어주겠다며 그렇게 정성을 들여 다시 보자고 했던가. 그건 아니다.
“오빠.”
“응.”
“오빠는 오늘은 왜 왔어요?”
나는 걷다 지쳐 버스에서 잠들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가 왜 여기에 함께 있는지. 나오라고 했다고 나온 너는 왜 나온건지 알고 싶었다. 내가 쉬운 여자인가. 당신이 나쁜 남자인가. 언제 봤다고, 뭘 안다고, 왜 나는 당신을 자꾸 만나고 싶어했는가 궁금했고, 한 걸음에 달려온 당신은 무슨 마음인지도 알고 싶었다. 오빠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저항할 수 없는 선한 미소의 남자는 내게 ‘벨라 너만 사랑한다’며 외치던 흡혈소년 ‘에드워드’인냥 말했다.
“네가 만나자고 해서.”
“내가 말을 안 했다면?”
"글쎄."
"글쎄? 돌려말할 필요 없어요. 나 잘 알아들었어요."
오빠의 눈은 다시 빛났다. 오빠의 피부는 마치 에드워드에게 햇살이 비춘 듯 골드 펄로 번쩍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듯 눈이 부셔 눈을 뜨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애써 내 눈을 보호하고자 눈을 감았다. 눈부신 남자가 물었다.
“…… 어떻게 알아듣는데?”
“너 아니라는 말. 친구로 지내자는 말.”
“누가…… 너를 이렇게 위축되게 했니?”
“네?”
“너는 왜 이렇게 먼저 사양하고 움츠러드니?”
“움츠러들었다?”
“너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너는 밝고, 너는 솔직하고, 너는 옆에 있을 때 힘이 나는 사람이야.”
아하. 그런 말. 애매하다. 그것은 대답이 아니다. 난 좀 제대로 말해줘야 알아듣는단 말이야.
“오빠는 어떤 순간이 되더라도 듣기 좋고 착한 말만 하려고 하네요.”
“그렇지 않아.”
“그럼,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여길 왔어요?”
“세고비야 온 거?”
“솔직히 말해봐요. 위축되는건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냉정하게 말해주는게 좋아.”
오빠는 고개를 숙였다. 수그린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겠어.”
“뭘?”
“내가 왜 왔는지, 내가 왜 그렇게 서둘러서 달려왔는지, 내가 왜 이렇게 이 주말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왜 피곤한데도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어.”
오빠는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쏟아지던 세고비야 성의 테라스에서 우리는 바보들처럼 서로 모르겠다면서 웃고 있었다. 결정적인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그 절묘한 순간, 우리는 마법에 걸린 벙어리들처럼 웃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