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비아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헤어질 때의 우리는 세고비야에 처음 도착했던 그 순간과 달라졌다. 친오빠의 표현을 빌자면, ‘남자가 새장에 갇히는 순간’, 이런 것들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사귀기’를 막 시작할 것만 같은 순간을 맞이한 것이었다. 오감, 육감,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오빠로부터 ‘말’이 없었다. 결정적인 한 방, ‘나와 사귀자’가 없었다. 우리는 멋쩍은 시간을 지붕위에서 보내다가 세고비야 성을 내려왔고, 할 말 없이 웃고 놀다가 ‘아기돼지구이’를 먹고 버스를 탔다. 돌아가는 길에라도 한 마디 할 수 있었건만, 돌아가자마자 전화 한 통화면 다 되는 일이구만, 그는 화룡점정을 하지 않았다. 다 된 밥은 식어버렸다. 난 잘 놀고 돌아와 기숙사 내 방에서 잉잉 울었다. 허전하고 억울한 느낌.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좋다고 만나서.
남녀의 시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가 해주는 것이 낫다. ‘프로포즈 데이' ('Leap Year')였던가, 여자가 먼저 프로포즈하는 날이 있다고 우기는 여자 주인공에게 남자 주인공이 킥킥대며 물었다. ‘세상에 그런 미친 날‘이 어디 있냐며, ’차인‘ 여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냐?’고 되묻던 남자,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다. 좋으면 좋다, 남자는 말을 한다.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큼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오빠는 그 날, 제대로 한 마디 했으면 좋았다. ‘우리 사귀자’ 뭐 이런 말. 그거 하나면, 오묘한 기운이 감돌던 세고비아의 상황은 아주 새로운 국면으로 상큼하게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하나가 없었다. 왜 왔는지 모르겠다며, 왜 설레어했는지 모르겠다며 볼만 붉혔지, 너 좋다는 얘기가 없었다. 좋다 말았다.
그래, 내가 아니라면 보내드리오리다.
그런 일, 대단한 거 아니다. 여러 번 해봤다.
우리 친오빠의 레슨 2번, ‘연락 없으면 싫은 줄 알아‘ 시츄에이션을 맞이했으니 배운대로 해야지. 섭섭하고 궁금한 마음은 차갑게 달래자. 쿨해져야 상처 받지 않는다. 너한테 내가 아니면 나한테도 너 아니다, 쿨해져야 병 나지 않는다.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는 말, 영양제 먹듯 한 번씩 읊어주면 된다. 이 모두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어려운 결정이었다.
나는 다른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저녁 시간을 책임지는 이야고(Iago)와 친구들을 따라 매일 같이 다운타운으로 ‘마실’을 다녔다. 초반에는 저녁에 빌라에 같이 사는 사람들과 거실 테이블에 앉아 와인이나 홀짝였지만, 세고비야를 다녀온 이후에는 어찌하다보니 근처 빌라에 살고 있는 미국 처자들과 이야고, 후안, 그리고 나는 밤마실을 다녔다. 우리는 유서 깊은 대학 도시의 다운타운에 하나 밖에 없는 나이트클럽을 매일같이 다녔다. 음악도 지루하고 동네도 후졌지만, 매일 같이 그 먼 다운타운을 드나들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또 늦게 일어나고, 나는 또 지각을 하고, 이메일을 써야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게, 컴퓨터실에 내려가는 부지런 같은 것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며 살았다. 그렇게 거의 열흘이 지났던 것 같다.
“Vamos. (가자.)”
“Si, mi collegas (그래!)”
그 날 저녁도 우린 또 한 패의 무리떼를 이루어 다운타운으로 클럽 나들이를 떠났다. 재미가 없을 때도 되었는데, 아직 이야고가 메리 언니를 정복하지 못해서였는지, 우리의 나들이는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같은 빌라에 산다는 이유로, 그리고 후안과 내가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나는 그 저녁에도 이야고의 바람잡이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낄낄거리며 다운타운으로 행차했다. 내가 배우는 ‘스페인어 욕’이 ‘생활 스페인어’라고 너스레를 떨며, 우리는 또 반쯤 취한 눈을 뜨고 먼지 자욱한 촌스러운 홀에 서서 그렇게 놀았다. 그런데, 그날은 누군가 내 뒤에 붙었다. 매일 같이 드나들던 클럽이었는데 동네 학생이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Que pasa? (뭐야?)”
“Que Ermosa! Vamos a mi casa? (아름답습니다, 내 집에 갈래요?)”
그는 미국 발음이 묻어 있는 드렁큰 스페니쉬로 내 허리를 바짝 잡았다. 아하, 지지난주에 메리하고 같이 새로 들어온 미국 신입 무리인가 보구나. 너 술에 쩔다 보니, 아시아 여자가 눈에 띄니? 여기서 내가 좀 ‘레어 아이템’이긴 하지. 그래도 술 먹고 아시아 여자를 찾는 너는 더더욱 ‘레어 아이템 변태’겠구나. 나는 술이 깰 것 같았다.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옆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큰일이었다. 홀에 있어야 하는 이야고도, 후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Ayuda!! (도와줘요)”
커다란 음악소리에 묻혀 내 소리는 공중으로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 같았다. 그 눈 풀린 변태는 다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앞 뒤 가릴 것 없이 입구로 도망가려고 했다. 이야고, 후안, 두고 보자.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나는 입구로 달려 나갔다. 기도 두 명이 보였다.
“I need to go home. (집에 가야 되요.)”
“No ingles. (영어 하지 마요.) No puedo hablar ingles. (영어 못해)”
“Residentia, llevame a Residentia (기숙사, 기숙사 좀 데려다 주세요.)”
“Univeridad? (대학?) Al cala de Henares? (알 칼라 대학?)”
“Si, por favor.(제발요.)”
두 기도는 어려 보였다. 나는 살아야 했다. 집에 가야지. 집에 가는 게 능사다. 이야고도 후안도 없었으니 나는 집에 가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둘 중의 하나에게 물고 늘어졌다. 더 착해 보이고 더 작아 보이는 놈을 골랐다. 계속 ‘제발’을 외쳤다. 돈을 흔들어보였다. 오빠가 준 100유로(Euro)를 흔들었다.
“Porque a mi?(아, 왜 나한테 이러지?)”
착해 보이는 놈이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의아해 하자, 옆의 기도 놈이 귓속말을 했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그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 지 상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놈 가운데 누구 하나가 차를 가지고 있기만을 기도했다.
“Sigueme. (따라와.)”
“Gracias. (고마워요.)”
나는 총총걸음으로 그 작은 남자를 따라 갔다. 그의 차는 two-door 만으로도 부족해서 창문도 수동인 고물 직전의 혼다(Honda)였다. 나는 그래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정말 나를 놀래는 짓을 했다.
“Uh, te gusta mas? este? (뭐가 더 좋아, 이거?)”
그는 조금은 수줍게, 조금은 뻔뻔하게, 차 주머니에서 향수 두 개를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 때 감을 잡았다. 오 마이 갓. 그는 내가 기숙사로 가자는 말을 ‘즐거운 초대’정도로 이해한 것이다. 나는 그 때부터 머리끝이 완전히 '쭈뼛' 서버렸다. 어떻게 할까.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조금 넘었다. 이 시간이면 우리들의 라틴 기숙사는 모두 잠든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무조건 기숙사로 들어가야 했다. 택시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 밤, 나는 이 남자의 고물 혼다에 내 운명을 걸어야 했다. 나는 가장 늦게 자는 프란체스코를 믿기로 했다.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을 프란체스코가 이 남자를 보면, 잘 타일러서 보낼 것이다. 나는 그의 기분을 맞추기로 했다.
“si, este. (응, 이거.)”
‘장 폴 코르띠에’의 오래된 향수, ‘장 폴 코르띠에’가 간택되었다. 내가 안전지대에 입성하기 전에는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갑자기 파란불에서 차를 멈추며 물었다.
“Tocame. (나 만져봐,)”
이럴수가. 급 브레이크를 밟고 해 보라는 것은 제 팔을 만져보라고 했다. 핸들을 쥔 팔에 잔뜩 힘을 주고, 실실 웃었다. 오, 하느님, 정말이지 저를 보호해주세요! 이 기도 아저씨가 완전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보이자 나는 점점 정신이 번쩍 들었다.
“Bueno, bueno. (좋아, 좋아).”
“Vamos.(간다!)”
흥분한 이 총각이 다시 엑셀을 미친듯이 밟고 두 번 커브를 돌았던가, 나는 ‘이쪽으로 가라, 저기에서 꺾어라’를 두 번 정도 말한 것 같았다. 그리고 513동, 나의 아름다운 빌라가 나타났다. 흥분지수 100을 찍던 드라이버는 다시 장 폴꼬르띠에 향수를 제 티셔츠에 뿌렸다. 잘못하다간 나는 코가 막힐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지원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춘 혼다는 내 기숙사의 거실 앞에 주차되었다. 그 때, 내 예상대로 기숙사의 통유리창이 열렸다. 나는 프란체스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른 것은 밤에 제일 일찍 자는 안나와 함께 서 있던 오빠였다.
“오빠.“
“오, 지원 어디 있었니?”
“Tu novio? (너 남자친구구나?)”
기도의 흥분은 삽시간에 가라앉은 듯 했다. 나도, 기도 아저씨도 둘 다 죄 지은 사람마냥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안나의 손짓에 따라 거실의 테이블에 앉았다. 안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사포 스페니쉬’로 기도 아저씨를 들들 볶았다. 기도 아저씨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대로 착한 동네 청년이었다. ‘몰랐다.’라는 말이 자꾸 들렸다. 나는 저 편에 앉아 잡지를 보는 척 하는 오빠에게 눈을 흘끔거렸다. 오빠의 등 뒤에는 기타 가방이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혼날 사람이 있다면 우리 엄마인 줄 알았는데 당신앞에 이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앉아 있을 줄이야. 아무말 없다가 어이하여 이 곳에 나타나셨나. 우리는 다 된밥인 줄 알았지만 결국 식은 밥 아니던가.
“Adios. (안녕).”
기도 아저씨가 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현관을 빠져나갔다. 안나가 기도 아저씨를 배웅하러 (혹은 마저 혼내러) 나가자 오빠는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미안해, 불쑥 찾아왔어.”
“오빠 나 진짜 쟤랑 무슨 사이 아니야.”
“하하하, 나 그렇게 말 한 적 없는데."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안나가 너 수업 끝나고 늦을 사람이 아니라기에 기다리다 보니 이렇게 됐어. 놀라게 해주려고 한 건데, 내가 너무 어이없는 타이밍에 온 것 같아.”
“오해하지마. 내가 다운타운에 같이 간 친구들을 잃어버려서, 그 클럽 앞 기도한테 데려다 달라고 한 거야. 쟤 거기 일하는 애야, 오빠 스페인어 아까 알아들었지? 암튼, 온다고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올 줄 몰랐어.미안해.”
“너 잘못한 거 없어. 메일 보내놓고 수신확인을 못한 내 잘못이야.”
메일. 그렇지. 요즘 좀 폐인이었지. 수업을 제 때 가야 컴퓨터실도 들리지. 아이패드도 없어진 마당에 이메일 확인이라도 부지런히 했어야지. 나는 혼나 마땅하다. 오빠가 나한테 ‘니킥‘이라도 날려줬으면 좋겠다.
“오빠. 너무 미안해. 나 요즘 진짜 엉망이었어.”
“하하, 왜 그래……. 나 주말에 축구 보러 마드리드 온 거야.”
“축구?”
“응. 온 김에 와 봤어……. 너도 볼 겸. 근데, 친구들 잃어버렸다니? 다운타운 데리고 간 거 누구야? 왜 에스코트를 안 해줘?”
“내 잘못이야. 미안해…….”
“내가 여기 더 있으면 넌 백 번을 더 미안하다고만 하겠구나.”
오빠는 웃을듯 말듯 내 걱정을 하는 듯 마는듯 요상한 말을 남기고 떠나려고 했다. 이러면 안 된다. 이렇게 갈 거면 왜 온 것인가. 당신이 어떻게 여길 왔는데, 내가 또 이렇게 어이 없이 당신을 보내게 하는가. 말려야한다는 일념하나로 나는 멍하니 오빠를 졸졸 따라 걸었다. 오빠는 기숙사의 뒷문 쪽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핸들이 비치는 윈도우 앞창에 AVIS 명함이 보였다. 오빠 친구들과 축구를 보러 렌트를 한 모양이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랑 마드리드 어디에 있어? 차도 한 잔 안 마시고 이렇게 가?”
“안나하고 마셨어. 안나 좋은 사람이더라.”
“여기 빌라 사람 다 좋아.”
“…… 다행이야. 지원아, 잘 자.”
“오빠, 화 난 거…… 아니지?”
“화가 왜 나.”
늦게 일어나느라 이메일 확인을 꼬박꼬박 안 한 것, 그리고 이렇게 늦게 다닌 것. 반성문이라도 쓰라시면 쓰겠어요. 뭐든 해서 당신을 잡을 수 있다면, 난 달밤에 앞구르기라도 할 마음이었다.
“진짜 미안해. 이메일 확인을 못한 거 정말 잘못 했어. 컴퓨터를 학교에서만 해서 진짜 미안해.”
“하하하. 그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하지 말아줄래?”
“알았어, 그럼 가지마.”
“나 안가면……, 어서 들어가. 잘 자.”
오빠는 찰나의 머뭇거림 뒤 금새 오빠는 손을 흔들며 차를 몰았다. 그렇게 어이없이 기숙사 (Residentia)를 빠져나갔다. 내 등 뒤에는 어느새 안나가 서 있었다.
“이런, 너희는 만나서 인사는 제대로 했니?”
“차는 안나랑 마셨다고 나랑 안 마신데.”
“너 남자친구 화났을 거야, 6시부터 와 있었어.”
“뭐라고? 금방 온 게 아니었어?”
“바보야, 저 사람 뒤에 있는 가방 못 봤어? 너한테 세레나데를 들려주려고 일부러 기타를 메고 왔는데. 너는 도대체 이야고랑 후안은 어디 두고 그 웃긴 기도를 데리고 온 거니?”
“세레나데?”
“저 사람 후안처럼 아시아계 라틴 남자야? 저 남자 기타를 메고 장미도 사왔어. 너 방에 장미도 가져다 놨어. 난 이 겨울에 스페인에 장미가 있다는 걸 몰랐어. 영국에서 본 장미보다 더 아름다운 장미야. 방에 가 봐.”
“그가 정말 세레나데라고 했어?”
“그래. 내가 무슨 노래인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너 오면 들려준댔어. 바르셀로나에서 음악을 배운다는 거 맞아?”
나는 안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숙사 뒤편의 공중전화기로 달려갔다. 전화를 걸어야했다. 오빠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사라지면 다시는 오지 않을까봐. 달려가서 잡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차를 향해 미친듯이 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또 오빠의 핸드폰을 열심히 울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내 귓가에 들리는 것은 오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매정하게 울려 퍼지는 신호음뿐이었다.
내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해 본 마지막은 엄마의 제자, 이준혁이었다. 엄마는 대학병원의 교수이자 작은 내과 병원의 병원장이신데, 엄마의 학교 제자들은 가끔 우리 집에 초대되어 거하게 ‘먹자파티’를 하곤 했다. 이준혁은 내 스무 살을 지배한 완전체의 남자였다.
그는 하얀 얼굴이 눈에 띄는, 요즘말로 ‘꽃미남’이었다. 아직 남자를 보는 기준이 ‘미모’라는 기준뿐이던 내 스무 살, 형광등 불빛 아래 머리칼이 갈색 빛이 돌던 그 준혁오빠의 미모는 ‘절대미인’의 경지에 있었다. 나는 열병을 앓았다. 엄마에게 반복적으로 준혁오빠의 안부를 물었고 준혁오빠가 언제 오냐고 되묻기를 몇 달, 엄마가 갑자기 정색을 하셨다.
“야, 안 돼. 안 돼.”
“뭐가?”
“준혁이는 안 돼. 아, 골치 아프다. 이제는 애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밥 먹이는 일도 너 때문에 신경 쓰여서 못 하겠잖아!”
나는 엄마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엄마가 준혁오빠를 예뻐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예감할 수 있었다.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가 오빠를 예뻐하는지 여부와 나의 사랑이 불타오를 수 있는지 여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나는 눈치 없이 징징대는 쪽을 택했다. 엄마 병원에 일하는 다른 의사 언니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갖은 아양을 떨어, 나는 준혁오빠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는 비밀이어야 한다는 나의 신신당부는 언니들이 잘 지켜주었는지, 엄마가 눈치 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정말 하루 종일 핸드폰을 가슴에 품고 살며 오빠에게 하루에도 수백 통의 문자를 보내고, 음성을 남기는 열정을 쏟았다.
하루는 오빠가 안암동 근처라며 나에게 어디냐는 문자가 왔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 문자를 처음 받았을 때, 내가 떠올렸던 이 묘한 속담은 어디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다. 나는 우리 엄마를 거슬러가며 오빠를 두드렸고, 드디어 백인보다 하얀 피부의 준혁오빠는 내게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나는 오빠가 있다는 그 맥주 집으로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달려갔다. 우리 집에서 보던 얼굴보다 더 맑고 아름다운 피부의 왕자님은 ‘지원아, 맥주 마실 수 있니?’라고 묻는 과잉 친절을 베풀며 시종일관 웃어주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바보’처럼 실실거리며 어눌하게 시시덕거리다가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도 두어 번 더듬어 가며 말했다. 그가 날 얼마나 우습게 볼 지는 걱정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은 오빠가 나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였다. 아파트 현관에 다다르자, 오빠는 ‘조심해서 올라가라’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지원아. 오빠는 여자 친구가 있어.”
“네?”
“음, 지원이는 예쁘고, 좋은 부모님 계시고, 정말 좋은 남자친구가 곧 생길거야.”
“싫어……요. 난 오빠가 좋은데?”
난 아이유가 10년 뒤에 읊을 대사를 오빠에게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난 오빠가 좋았다. 오빠가 좋았기 때문에 이 모든 남사스러운 일들이 아무렇지 않았다. 난 졸고 있던 경비아저씨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오빠는 애써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지원이는 더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날 수 있어.”
“싫어요.”
“지원아, 앞으로 언젠가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면 그 때는 오빠가 시시해보일거야. 엄마도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를 만나. 오빠 간다.”
도대체 무슨 날벼락인가.
도대체 안 만나 줄 거면서 나를 왜 불러내는가.
도대체 너보다 더 좋은 남자친구란 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처음 만나는 ‘실연’이라는 놈은 아프고 따가웠다. 나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못생긴 조연이 늘상 그러하듯, 그 길로 식음을 전폐하고 실성한 듯 울부짖었다. 아빠는 혀를 끌끌 찼고, 엄마는 나를 모른 척 했다. 나는 하나 있는 딸의 첫 실연에 대해서 불필요하게 쿨한 부모님 덕이 일주일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씩씩한 대처법을 몸으로 익혔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엄마와 내가 ‘인간 대 인간’의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때, 그러니까 내게도 남자의 얼굴 이외의 다른 조건들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는 철학이 입력된 이후, 엄마는 TV를 보다가 옆에 앉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야, 내가 준혁이를 정말 예뻐하지만, 걔는 내 사위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내가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때 안 말렸으면 너 저짝 나는 거야.”
TV의 드라마에서는 돈 없고 똘똘했던 남편과 가진 거라고는 그런 아들뿐인 시어머니, 그리고 부잣집에서 자라 물정 모르는 아내가 지지고 볶고 싸우느라 완전히 아비규환이었다. 난 그 때, 쿨한 척, ‘진짜?’ 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그 맘 때쯤 엄마와 엄마 병원 언니들이 내게 소개팅해준 모든 남자들이 왜 나에게 그렇게 잘 해주었는지가 갑자기 이해되어서였다. 이준혁과 나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대척점 같은 거였다. 이준혁은 아름다운 사람이나 그의 남루한 가족들 덕분에 저평가 받는 사람이라면, 나는 별로 예쁘장하지 않은 사람이나, 나의 대단한 엄마 덕분에 고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엄마가 부연설명을 해 준 것도 아닌데, 난 엄마의 그 한마디에 너무 많은 것들이 이해되어 버렸다. 그 이후 나는 남자가 내게 ‘당신이 좋다’는 말을 할 때면, 특히 그 남자가 ‘의학 전공’인 경우라면, 어디가 좋은지, 왜 좋은지, 엄마가 내 인생과 관계가 없어도 날 좋아할 것인지,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의 자세로 묻고 캐묻고 들들 볶았다. 피해자가 많아질수록 소개팅 자리도 줄어들었다. 나는 그렇게 묘하게 꼬인 채 남자친구 없는 20대를 보내며 살았다.
내 마음의 문을 제대로 닫아 버렸던 남자는 김기범이라는 놈이었다. 말끝마나 ‘우리 지원씨’라던 그 놈은 ‘끈기의 민족, 한민족의 후예’답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하나는 인정할만한 인간이었다. 작은 키에 두터운 피부, 커다란 목소리에 곱슬머리까지, 의사라는 직업 빼고는 봐 줄 것이 없던 그 남자는 그래도 이준혁 오빠에 비해서는 평범한 가정의 아들이었던지 엄마의 태클이 없었다. 나는 엄마가 언제라도 태클을 걸어주길 기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태클은 상당히 재미있는 곳에서 걸려왔다. 친하지 않은 과 동기, 전지애는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너 요즘 만난다는 오빠, 양다리다.”
“누구, 기범이? 까만 숏다리 말하는 거 맞아?”
“어, 우리 교회에 외교관 출신 아저씨네 언니, 우리 정현이 언니가 소개팅 했다는 남자 얘기를 하는데, 네가 욕하던 그 남자 같더라고.”
“이름 확인했어? 걔도 서울대 의대야?”
“맞다니까. 근데 걔가 너 욕했대.”
“하하하, 뭐라고?”
“지 엄마한테 잘 보이려고 ‘오냐 오냐’해줬는데, 지 이뻐서 그러는 줄 안다고. 의사 만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잘난 척 한다고. 엄마 빼면 시체인데 철이 없어서 모른다고 그러더래.”
“죽여버릴 거야. 데려와.”
전지애가 싫어서 그랬는지, 정곡을 제대로 찔려서 그랬는지, 나는 화 낼일 아닌데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는 말 다 맞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도 나는 그날 무지하게 화가 났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는 우리 엄마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아는 남자들과는 두 번 이상 만나지 못했다. 일종의 콤플렉스가 생겼다.
이상호는 알았을까. 한 동안 조용하던 이상호는 왜 갑자기 찾아온 걸까.
엄마가 누구인지 알아버렸나. 도저히 날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나.
나는 혼자서 또 나쁜 구석으로 내 자신을 몰았다. 이상호가 나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러 왔다는 그 말을 듣고나니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세레나데라니? 멕시코 영화에서는 본 기억이 있는 ‘의식’ 말인가. 달도 없는 까만 밤, 사랑하는 여자의 창문 밑에서 죽어라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는 남자. 여자는 처음엔 침대에 누워 노래를 듣고, 화장대 앞에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다, 활짝 웃는 얼굴로 창문을 열어 주겠지. 목청껏 노래하던 남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청중들은 여자가 창문을 열어주는 순간, 일제히 박수를 치겠지. 그 장면이 아직도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있는 일들이라고 했지만, 내 인생에서 그런 성스럽고 은혜로운 의식이 ‘일어날 뻔’하다니. 오빠를 그렇게 보내버린 것이 너무도 황망하여 잠이 달아난 것도 사실이지만, 이 남자가 십리 길을 달려와 한 겨울에 핑크색 장미꽃다발을 안겨주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주려고 했다니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침묵하던 당신은 이 밤에 왜 여길 달려 온 걸까. 아하, 우리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해 보았구나. 내과 전공의에 돈 되는 비만 치료한다는 그 병원 원장인거 알았니. 우리 엄마는 자기가 버는 돈 다 세보지도 못하고 일만하는 여자라는 거 당신도 알아버렸니. 당신이 나를 선택한 데에도 돈 잘 버는 우리 엄마가 끼어들었나. 엄마 덕에 나는 또 과대평가 받은 것일까.
불안해졌다. 이 남자가 김기범과 같은 이유로 내게 달려와 세레나데를 불러줬더라도 나는 김기범처럼 싫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아무런 이유가 없었지만, 이상호는 끊임없이 생각나고, 눈 감으면 보고 싶었다. 비록 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이지만, 다시 못 보게 될 거란 뻔한 결말은 모르는 척 하고 싶을 정도로 오로지 당신에게만 온 신경이 따라가는데, 당신은 역시 김기범이었나. 당신 역시 우리 엄마 덕분에 나를 되도록 예쁘게 봐주려고 노력하다가 어쩔 수 없이 또 기타 가방 메고 달려와 본 거니. 전화를 하자. 난 여기서 또 상처받고 싶지 않다. 알아봐야 한다. 오빠가 정말 나 하나를 보고 세레나데를 불러 주러 온 것인지 알아봐야 했다. 여기서 더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Leave a message after the tone. (삐 소리 이후에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세 번이나 저 음성 메시지 안내가 나왔다. 오빠는 세 번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울 것 같았다. 거부당하는 것 같아서. 상처 받는 결말이 보이는 것 같아서. 결국 그럴 줄 알았다며 또 쿨한 척 넘기기에는 너는 너무 내 맘과 같은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알고 싶었다. 이번에는 내 마음만 아프고 싶지 않았다. 나는 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오빠가 진짜 전화를 받았다.
“Hello. (여보세요.)”
“오빠? 상호오빠?”
“지원이구나.”
“오빠.”
네 번째 신호음을 울린 뒤 수화기 건너편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어딜 가고 있는지, 가게 해서 미안하다든지, 이런 서두도 없이 나는 단도직입 플레이를 펼쳤다.
“우리 엄마가 병원 얘기 했어요?”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그 순간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이 내게 해준 이 모든 것이 또 우리엄마 때문이라면, 더 이상 이 사람을 떠올리지 않아야 내가 다치지 않을 테니까 나는 확인해야 했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뭐라고?”
“오빠가 나 강도당했다고 마드리드로 와 줬을 때, 엄마랑 통화했잖아요.”
“응.”
“그 때 엄마가 병원 얘기 했어요?”
“어머니, 아프셔? 지금 한국에서 전화 왔니?”
아아아아아아아. 오빠는 모르고 있다. 모르고 있다. 못난 콤플렉스 때문에 나는 애먼 사람의 진심을 의심하며 이 난리를 피웠구나. 오빠의 말이 들리자 나는 더 이상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스럽고 죄스러운 이 복합감기 같은 느낌. 내 목소리는 순식간에 또 젖어버렸다. 아니었구나. 정말이구나. 나는 이상호로부터 상처받지 않아도 되겠구나.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닦지 않았다. 이 순간은 하느님 아버지를 찾으면 된다. 할렐루야. 예수 만세. 이거 말고 또 무엇인가 찬양의 말이 뭐가 있나. 모른다, 예수에게 찬미를. 오. 주여.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부족하다. 부처님도 찾아야 할까. 알라신도 찾아야할까. 오빠는 김기범과 다르다!
“지원아,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응? 침착하게 말해봐. “
“오빠,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나 정말 미쳤어. “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연락이 지금 온 거야? 응? 무슨 소리니.”
“그거 아니에요. 오빠. 흑흑. 미안해. 오빠, 내가 나빴어, 일찍 다녔어야지. 이렇게 오빠를 그냥 보내다니. 내가 미쳐, 나는 왜 이러는 건데. 흑흑흑.”
“지원아. 병원은 왜? 왜 또 울어. 너 무슨 일이니?”
밑도 끝도 없는 나의 널뛰기, 과연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 당신의 진심은 아무런 조건 없이 나 하나를 위한 것이므로 나의 이 마음도 이제 ‘사랑’이라는 호사를 누려도 된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오빠가 보고 싶었다. 나는 통제 불능이었다.
“오빠, 지금 마드리드로 가면 안 돼요? 오빠가 보고 싶어요. 엉엉엉엉.”
“아, 정말 궁금하다. 도대체 왜 이런 말들을 하는 거지. 근데, 나 사실 지금 차 안 이거든, 전화를 제대로 받을 수가 없어. 천천히 말해줄래?”
“차? 아직도 차라고요?”
“응. 고속도로로 올라왔어.”
“뭐? 그럼, 마드리드에서 나갔다고요? 이번 주에 룸메이트하고 마드리드에서 축구 본다고 했잖아요.”
“몰랐구나? 이번 주에 마드리드에서 경기 없어. 아까 그 말에 속은 거야? 하하.”
아까의 그 말이라. 안나의 말이 생각났다. 오빠는 오후 6시부터 장미꽃 한 다발과 기타를 들고 오매불망 내가 빌라에 나타나길 기다렸다고 하지 않았나. 마드리드 축구라니.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현지원, 너 정말 호강하는 구나. 엄마 딸이 아니라도 이렇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여자였던 거야? 듣고 싶다. 확인하고 싶다. 나, 정말 듣고 싶었다.
“그럼, 정말 나 때문에 왔어요? 나한테 세레나데를 들려주려고?”
“부끄럽네……. 맞아, 안나가 말해줬지?”
콧물이 흘렀지만,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런 고백은 아까 내 눈을 보고 있을 때 들었으면 더 좋았잖아. 내 탓이다. 오빠에게 멋진 세레나데를 들려 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죄 없이 도망가게 만든 나는 벅차게 반성했다.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전화 울리는 거 안 받으려고 했는데, 계속 같은 번호라 급한 일인 줄 알았어.”
“오빠, 미안해요. 어흑흑.”
“잠깐만. 세울 데가 있다.”
나는 이제 오빠가 엄마의 병원을 노린다고 말해도 상관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무엇이든 좋았다. 오빠가 보고 싶었다.
“엉엉엉, 그럼 왜 그동안 가만히 있었어. 엉엉엉엉엉엉. 난 차인 줄 알았는데. 엉엉.”
“미안해. 그런 거 아닌데……. 미안해.”
미안하다니, 이런 말 말고, 그간의 마음고생을 한 방에 날려주는 강력한 무엇이 필요했다.
“그거 말고. 흑흑”
“뭐?”
“엉엉. 그런거 말고 제대로 말해봐, 엉엉 내가 진짜 못살겠네. 엉엉엉.”
핸드폰 저편의 오빠의 목소리가 잠시 들리지 않았다. 오빠라고 다시 불러 재촉하는 짓을 하기 전에, 그 촌스러운 짓을 하기 직전, 핸드폰에서는 믿을 수 없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현지원. I like you just as you are. (난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일인가. 이것은 오매불망 내 판타지, 마크 달시가 아닌가. 이 숭고한 말이 나를 위한 것이 정녕 맞단 말인가. 나는 정말 울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엉엉엉, 오빠. 젠장. 이게 뭐야. 이런 말을 전화로 들어. 나 이거 녹음해야되. 한 번 더 해줘, 엉엉엉.”
“하하하하하하하. 지원아, 녹음하는거 너무 웃긴 것 같아.”
“엉엉엉, 그래도 이거 중요한 순간인데 엉엉엉 이렇게 전화로 해야 되다니 나는 정말 복도 없지, 엉엉엉.”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럴 때 어울리는 그 네 글자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었다. 수화기 넘어의 나만의 마크 달시는 차분하게 웃기까지 했다.
“하하하하. 먼저 전화라도 해 보고 가는 거였는데 친구들하고 그렇게 노는 것인 줄 몰랐어. 미안해.”
“내가 내일 바르셀로나로 갈게요. 나 꼭 내일 갈게요. 엉엉엉”
“안 돼. 그러지 마.”
“아니, 보고 싶어서 왔으면서, 세레나데를 불러주겠다고 장미까지 사 들고 와 놓고, 어떻게 그냥 가요? 나는 그렇게 못해. 어쩜 그럴 수가 있어. 내가 갈래요. 나 노래 듣고 싶어, 나 노래 들을 거예요. 엉엉엉.”
“지원아.”
수화기 너머 오빠의 숨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나도 숨을 죽였다. 이렇게 숨죽여 수화기에 집중해 본 것이 언제 적 일인가. 당신이 어디서 살았든, 누구와 살았든, 어머니가 어디서 어떻게 사셨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제 나 하나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불러줄 남자를, 이렇게 만나버리다니. 주선자도 없고 프로필 사진도 미리 못 받은 당신은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나 마크 달시의 명언을 내게 핸드폰으로 들려주었다. 그 날, 파리에서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날 그냥 대한항공의 마드리드 직항 편에 자리가 있었다면, 그날 당신이 바르셀로나로 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자정 넘은 이 시간, 전화기를 부여잡고 숨을 죽여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 내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을까. 미칠 듯 행복했다. 브리짓 존스도 판타지 같던 내게 말도 안 되는 멋진 미소를 가진 남자가 ‘너의 있는 그대로가 좋다’며 나타나버렸다. 손을 뻗어 잡고 싶었다. 오빠가 보고 싶었다.
“난 오빠가 보고 싶어.”
“나도 너 보고 싶어. 그래서 갔어.”
“그래놓고 도망갔어? 사람 마음만 흔들어 놓고. 흑흑.”
“너 수업이 있잖아. 학교 가야지.”
“오빠도 수업 있잖아요.”
“하하. 넌 공부하는 거고. 난 기타 치는 거야.”
“난 수업 필요 없어. 나 갈래.”
“학교 가.”
“나 같이 있고 싶어.”
“나쁜 학생.”
“치, 사실은 바르셀로나에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못 오게 하는 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니면, 왜 못 오게 하는 거예요. 그럼 왜 왔어요?”
오빠는 계속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아무 영양가 없는 대화만으로도 전화는 즐거웠다. 오빠는 고속도로 중간에서, 나는 길 한 가운데에서 계속 웃었다.
“음, 원래는 음 노래 한 곡 불러주고, 드라이브 시켜주려고 갔어. 아침마다 수업이 있을 테니까 멀리는 못 가도. 너가 말했던 레티로(Retiro) 공원이라도 가려고.”
“레티로 공원? 마드리드?”
“응, 거기 호수. 배도 타고 하려고 했지. 나 준비한 거 많았는데 사실.”
“아아아아아아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냐, 다음에 가면 되지. 다음에 가자.”
“싫어, 못 기다리겠어요! 다음 언제! 내일 갈래. 내가 갈래.”
나는 눈물은 좀 말랐다. 다만, 땡깡에 재미가 들었다. 오빠도 내 땡깡에 재미가 들었다.
“싫어, 싫어, 안 돼, 안 돼.”
“그럼, 나 내일 안 가면, 나 소원 하나 들어주기!”
“뭔데?”
“세레나데, 세레나데 불러주세요.”
“지금?”
“응.”
“지금 전화로?”
“응.”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아. 한 번만 더 보채보자. 내가 이런 땡깡을 부려 본 남자는 아빠가 마지막 남자였건만, 어쩜 이렇게 이 남자에게는 갖은 땡깡이 천연덕스럽게 잘도 나와 준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땡깡을 타고 난 여자란 말인가. 이유 없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정말 울다 웃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오빠는 목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그럼, 조금만.”
“이야아아아아아아아!”
수화기 넘어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기척이 전해졌다. 마음이 떨렸다. 공기의 움직임도 잡아낼 것처럼 내 귀를 바짝 수화기에 붙였다. 금속 줄이 아름답게 긁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가늘지만 섹시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빛 아래, 그대의 얼굴, 너무 아름다워, 달이 숨네.”
“꺄아아아아.”
간간이 들리는 ‘달’, ‘그대’ ‘아름다워’ 라는 단어는 이미 내 심장을 달리게 했다. 그야말로 손발이 오글거리는 단어들도 스페인어로 노래해서였을까, 아름다웠다. 나는 행복했다. 과분해도 좋았다. 나는 벅차올라 죽을 것 같았다. 오빠의 웃음기 묻어나는 목소리는 가늘게 들렸지만 그 어떤 확성기보다도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반복되는 말은 ‘Te amo(사랑해)’ 였다. 기초 회화 2과에서부터 배운 말, 이 말이 이렇게 심장이 찌릿거리는 말이었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레나데는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들어주는 여자의 창가가 아닌, 여자의 전화 앞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졌다. 나는 그 이후로도 그 보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