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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ma Jun 08. 2021

그래봤자 개죽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 않나.

동네를 오가며 알고 지낸 아줌마는 그야말로 명랑한 사람이었다. 진한 부산 사투리로 반갑게 인사해주는 통에 무표정하게 지나가기 어렵게 만드셨지만, 목적이 있어 귀찮게 달라붙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웃으며 지나가게 만드셨다. 알게 된 지 얼마 안된 우리 엄마더러 '이모님'이라고 붙임성 좋게 애교를 부리셔서 우리 엄마도 아줌마를 좋아하셨다.


아줌마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의 한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다가 신랑을 만났고, 둘은 여차저차 서울에 상경하여 '아메리칸드림' 아니 '서울의 꿈'을 이루려고 불철주야 일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그 꼬마를 처음 봤을 때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들과 손잡고 나가시다가 길에서 나를 보면, 아들더러 90도로 인사시키셔서  난처하기도 했다.


고향 떠나 어딘가로 근거지를 옮기는 것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아줌마의 인생도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건축사무소 경력이 꽤나 길었지만, 지방 건축사무소 경력은 인정받기 어려웠다고 하셨는데 여튼 어렵게 어렵게 주민센터에서 일하며, 아르바이트 하며, 그렇게 지내셨다. 그래도 '버블세븐'지역의 한 모퉁이 빌라 한 칸에서라도 아들을 교육시키셔야 했고,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도 하나뿐인 아들의 기를 죽일 수는 없다고, 외제 과자가 유행하면 '코스트코'에 가서 젤리빈을 사다 바쳤고, 아들은 늘 '간지'나는 외제옷입혔다. 우연히 외국인이 성당 찾아 가는 걸 내가 도와주는 광경을 목격한 이후  한동안은 아줌마가 나를 붙잡고 아들 영어 문제를 물어보기도 하셨으나, 시원찮았는지 금방 사그라들어서 다행스러워 한 적도 있다. 생각해보니 그것이 무려 8~9년 전 일이다.


주말에 본가를 가는 길이면, 우연히 동네 식당에서라도 마주치던 아줌마가 보이지 않는것을 알아챈 것은 몇 년 전이다. 나는 엄마더러 아줌마네 식구가 이사가셨는지 물었다.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아줌마가 아프다고 말했다. 루게릭병이라고 하던가. 병원은 통원을 하고, 집에는 친정 어머니가 와 계신다고 했다. 동네 할머니들의 정보력이 결집된 TMI를 들을때만해도, 그저 '요즘은 의술이 좋으니까 쾌차하실거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난 금요일, 본가에서 티비를 보며 누워있는 내게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당 000아줌마가 그러던데, 아줌마네 집에 시어머니가 간병오고는 아줌마가 잘 못 지내는 것 같다네."

"그런게 어디 있어. 할머니들은 참."

"아니야, 진짜야. 000 아줌마가 잠깐 들려서 반상회비 달라고 하면서 안부를 물었는데, 시어머니가 나오더니 '저거는 죽지도 않는다'이러더래."

"못된 소리."

"그러니까. 그리고 자기 어디 나간다고 하길래, 그럼 밥은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두 번 죽 먹인다고 했대. 잠깐 보니까 바짝 말라있는데, 루게릭이 아니라 굶어서 죽겠다 싶더래."

"하, 화나네."

"나도 그 얘기 들으니까 너무 화가 나서 한 번 찾아갈까 하다가 그만 뒀지."

"엄마가 그것때문에 찾아가고 하는 거는 오지랖 할머니 행패부리는 거지만, 그렇게 죽이면 그게 학대로 죽이는 거야. 아동 학대만 있는건 아니니까, 또 그러면 신고하라 그래."


잠깐 부글거리는 마음은 피곤한 육신이 눌러줬고,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침대로 도망갔다. 그리고 다음 날, 여느 주말 아침처럼 본가에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러면 나와 복순이만의 주말이 시작되는 것이고, 보통은 엄마한테서 전화가 오진 않는다.


그런데, 지난 주말 아침은 달랐다. 도착해서 잠깐 누워있으려니, 엄마가 전화했다.


"왜?"

"야아, 아줌마 119가 데려갔다. 너무 불쌍하다, 엉엉."

"뭐라고?"

"아침에 119가 동네에 시끄럽게 사이렌 울려서 잠이 깼는데, 뭐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냥 슈퍼나 갈라고 했거든. 근데 누구를 싣는데, 철수(아들)가 보이는 거야. 심장이 벌렁거려서 보니까, 아줌마가 실려가잖아."

"어머,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셨나봐."

"근데, 정말 너무 불쌍하다. 간디 사진에서 본 것처럼 뼈밖에 없고, 눈도 푹 파이고, 진짜 굶어 죽었나봐, 엉엉엉."


엄마는 그렇게 갑자기 목놓아 우셨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핑돌았다. 아파서 못 먹었겠지. 그래서 못 얻어먹다보니, 말랐겠지. 거기까지가 팔자겠지. 그나저나 철수는 어떻게하나. 이제 고등학생인데 이 험한 세상 어쩌나. 아무 상관 없는 남의 사정이지만, 심장이 쪼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니던 몇 몇 순간들이 기억났다. '용 꼬리니 뱀 대가리니 뭐라도 해봐야지예'라고 씩씩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통통한 볼살과 통통한 팔목이 기억난다. 간디라니. 바짝 마른 간디라니. 그런 비극이 어디있나.




네이버 사내의 갑질 뉴스가 헤드라인으로 떴어도 보진 않았다. 내상을 깊이 남긴 트라우마가 있어서인지 누군가 직위를 이용해서 가스라이팅하며 사람 미치고 팔딱뛰게 만들었다는 소식만 들어도 나는 뇌가 터질 것처럼 괴롭기에 아예 안 다, 직장내 괴롭힘, 직장내 갑질에 관련된 모든 기사를. 그런데, 그는 모른척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이 아니었다.


주말에 만난 형부는 친구가 죽어 요즘 힘들다고 했다. 나는 형부 나이는 아직 젊은데 친구가 아깝다고 했다. 형부는 그 친구의 총명함과 능력을 읊었다. 그리고, 자살한 것이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친구는 네이버의 그 남자였다. 과학고와 명문대를 나온 친구는 정신병 깊은 상사를 만나 무지하게 고생했지만, 참았다. 네이버라는 이름 석 자가 가져다줄 커리어의 힘, 그리고 부양할 가족. 그는 오래도록 참았다. 하지만, 참을 일은 아니었다. 선을 넘고 법을 넘었다. 친구는 믿었다. 이 정도라면 이것은 허용되기 어려울 것이므로 어떻게든 위에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조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선한 믿음과는 달랐다. 조직의 힘이란 빛 좋은 개살구였다. '형님 동생'으로 '우리가 남이가'로 돈독해진 관계는 모든 호소를 덮고 무마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고통이 반복될수록, 얄팍한 완장을 찬 사람은 안전해진다. 그는 강도를 높일 수 있다. 그리고 가당찮은 요구들은 반복될 수록 악랄하고 저열해진다. 그는 알릴 길이 없었다. 빠져 나올 길도 없었다. 이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결심했다, 그냥 죽기로.


나는 5년 전. 매일 같이 정신병자로부터 악랄하게 고문당했다. 일단, 불시에 내 등뒤로 와서 내 마우스를 잡고, 내 노트북을 보며 이메일을 내려보다가 '어, 내 욕하는 메일 안 보냈네? 나는 니한테 긴장감을 주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몇주 전 본인이 고향가는 KTX에서 받아온 과자 부스러기를 내게 건네며 먹으라고 윽박지르다가, 유통기한 쪽으로 무심코 눈길을 보내는 내게 '나를 못 믿네.'라고 비죽거리는 표정을 견뎌가며, 잠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누구하고 전화했는지, 어디다가 내 욕을 하고 다니는지 보고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을 참아야했다. 커리어적으로 성장하는 꼴은 보기 싫어서, 일단 박아만 두고 아무것도 못 해야 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기에 일단 나는 남들이 보기에는 바쁘게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여져야 했다. 일단, 집에는 못 보내는 데, 할 일이 없어서 앉아만 있기 어려워 뭐라도 프린트해서 보고 있으면, 프린트 비를 아껴야 한다고 프린트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중요한 프로젝트는 나를 배제해야했는데,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카톡 비밀 메세지로 내게 몇 가지 물어보고, 이런 걸 물어보는 것은 기밀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본인만 참여하는 회의를 잡고 다른 방에서 진행하는 일을 하는 중간에도 밖에다 잡아둔 내가 어디 가서 본인 욕을 한다는 망상에 잡혀 회의실에서 30분 간격으로 전화하거나 아예 나와서 나를 다그쳤다. 옆에 있던 부서의 다른 사람은, 정신병자가 30분 이상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는데, 그걸 참고 '네네'라고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얼굴을 보고 싶어서 기다리다가 내게 말을 건 적 있다. '왜 그렇게 사세오.' 라고 했다. 다른 상무님은 '저절로 위에서 정리될 거다, 그게 조직이다. 조금만 참아라.'라고 한 적 있다. 나도 믿었다. 설마 이 정도로 하는데 걸러지지 않을까, 커리어적으로 이 회사는 중요한 포지션이니까 참아보자,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정신병자는 모든 전무님, 부대표님, 대표님의 집 앞에 찾아가 울며 불며 나를 미친년으로 만들었다. 형님 동생, 아니 오빠 동생 사이로 점철된 관계에 나라는 이물질이 낀 것이다. 나는 다른 팀으로 옮겨달라고 신청했다. 그 정신병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다루는 데 익숙해졌는데, 여기서 탈출할 수는 없지.'


섬찟한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가끔 악몽을 꾼다.

그 여자는 작년에 승진했다. 신문에도 났다.




나는 5년 전, 자살을 생각한 적 있다. 그 조직에 유서를 쓰고 죽어버리지 않고서는 억울해서 살 수가 없었다. 다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그런데, 20년지기 동생을 만났을 때, 동생이 내게 말했다.


"누나, 나쁜 생각하지마요."

"뭐?"

"그냥, 그냥. 나와요."

"하하하."

"침 한번 뱉고 나와버려요. 누나가 재수없게 걸린 거니까, 그냥 침 한번 딱 뱉고 나와버려요."

"내가, 지금 위험해보여?"

"네. 누님은 지금 자책하고 있겠지만, 그래서 그런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어요. 그 어떤 열사도 죽어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어요. 그건 개죽음이에요. 죽어서 남기는 유서는 하루짜리에요."

"하루짜리. 와닿네."

"개죽음으로 누나를 잃기엔 이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보낼 수가 없어요."

"고마워."


나는 요즘도 그 동생과 그 날의 그 대화를 추억한다. 나는 늘 고마워하고, 동생은 늘 으쓱거린다.


"너 아니었으면, 이 좋은 고기를 못 먹었지."

"누님, 개똥밭에 굴러보니 좋지 않습니까."

"고마워."

"아닙니다. 양진호를 사장으로 만난 직원은 잘못이 없습니다. 양진호가 쓰레기인데, 맞은 직원이 무슨 잘못입니까."

"양진호, 하하하."

"누님, 억울할 때는 죽는게 아닙니다. 억울할 때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형부의 친구, 네이버의 자살 직원이야기를 듣자, 5년 전 내 지옥이 떠올라 심장이 벌렁거리다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 동생의 말에 이르자 겨우 잠잠해졌다. 이래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거대한 질병인가 싶다가도, 다행히 숨쉬고 있는 내 인생이 대견하고 소중해서 눈물이 난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

당신이 남긴 유서는 하루짜리 이슈 뉴스다.

너를 괴롭힌 사람은 잘나갈 것이다.

그와 그녀의 승진은 잠시 미루어진 것일 뿐, 그들은 백년 살며, 죽은 너를, 떠난 너를 바보 병신으로 둔갑시켜 용비어천가를 부를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남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악물고 그냥 떠날 것이지, 절대 죽지마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으니까.




이승에 남은 것을 다행이라 여길 여유가 생기자 갑자기 아줌마가 생각났다.

그런데 차마, 엄마에게 다시 전화할 용기가 안 생긴다. 아줌마가 정말 떠났다고 할까봐.


그것이 무슨 이유든, 자의에 의하지 않은 질병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죽으면 우리만 손해다. 남아서 보고 느낄 것들이 많으니까, 정신 딱 붙잡고 조금만 버텨주시라. 아들도 대학생되고, 연애하다가 엄마 속도 뒤집고, 군인 되어 대견해지기도 해야하고, 취직해서 호강도 시켜줘야하고 할 일 아직 많이 남았는데 어딜 가시나.


아줌마.

부디 병원에서 돌아오시길. 돌아오시면 무조건 건강하시길.


폭풍같던 주말을 이제사 마무리하는, 어둡지만 우울하지 않은 단단한 밤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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