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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ma Mar 06. 2018

빠리 vs 진짜 빠리

잠깐 머물러 알 수 없는 진짜를 꼭 알아야할까

언젠가,

Paris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내가 김나영같은 패피도 아니고 Paris가 옆집같은 인생은 절대 아니지만, 이런 나로 하여금 Paris라는, 전 인류의 워너비 도시를, 감히 개인적으로 의미있게까지 만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나는 꽤나 설레었고, 어린애도 아니면서 설레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신나는 음악을 귀터지게 듣고 있었다.


한 두 정거장 가까워지던 무렵이었던가.

내 옆의 남자가 이어폰을 툭툭 쳤다.

놀라서 돌아보았다.

취해서 눈이 반쯤 풀린, 귀에서도 알콜 냄새가 날것 같은

취객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그러자 취객은 이어폰을 뽑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Do you like Black Eyed Peas? (너 Black Eyed Peas라는 가수를 좋아하니?)"


생김을 보니, 미국에서 Paris 여행온 대학생 같았다. 어린 피부며 말하는 억양이며,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좀 단호해야 했다.


"Fuck off."


설렘에 찬물을 끼얹은 그 취객 덕분에 나는 꽤나 냉랭해진 채 약속한 역에 내렸다. 최고조의 설렘에서 훌쩍 다운된 나는 그래도 오매불망 기다리던 친구를 만났다. 약간 다운된 모습으로.


치빠른 친구가 물었다.


"오는 길이 힘들었지?"

"아, 힘든 게 아니구. 나의 Paris를 망친 놈을 만났어. 지하철에서 취객을 만났지 뭐야."

"괜찮아? 뭔가 위협을 당한 건 아니야?"

"위협을 당한 게 나을 거 같아. 여기가 서울도 아니고, 내 귀에다 대고 '너 신나는 음악 좋아하니?'를 묻는 변태 취객이라니. Paris를 망쳐버렸어."

"하하하."


친구는 가만히 웃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처럼 멀리서 오는 아시아 아가씨들은 Paris가 사랑의 도시라고들 하지, 마법같이 아름답다는 뭐랄까, 환상이 있더라. 그런데, 아마 그 취객이 진짜 Paris일 수도 있어."

"진짜 Paris."

"응, 너의 lady-like Paris를 망친 것은 아쉽지만, 사실 진짜 실제의 Paris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어. 여기서 살아보면 알거야. 하지만, 넌 잠깐 들린 방문객인데, Paris의 환상을 깨게 만든 순간을 만나다니 아쉽다."


환상과 진짜 Paris.


나는 그 이후에도 가끔 그 Paris를 떠올린다.


어떤 순간이 닥치면 그것이

잠깐 스치고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내 삶에 깊숙하게 연관될 것인지 생각하곤 한다.

그 순간 가운데에는

좁게는 작은 상점의 불친절한 점원과의 만남도 있고, 넓게는 남자와의 만남도 있는데, 남자일 경우 이 생각은 매우 유용했다.


이 사람의 지금 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럴 수 있어'

쿨내 진동하며 못 본척 흘려버릴 수 있을까.

'왜 그래'

라고 물으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위해 이야기하자고 용기를 낼까.

고민할 때 말이다.


확실히 잠깐 스칠때의 느낌과 내 일상에 들어온다고 생각했을때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가령, 연애 초반을 조금 지나, 그가 최선의 모습을 보이는데 덜 신경쓰면서, 진짜 모습이 나오기 시작할 때, 나는 Paris의 취객을 떠올린다.


최선의 모습, 최선의 자세로 잘해보고 싶었던 열정이 사라진 순간, 지나치게 쉽게 내뱉는 돌이킬 수 없는 말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사과, 사과하지 않음으로 비롯된 내 마음의 상처, 그 상처에서 비롯된 나의 퉁명스러움, 그 퉁명스러움으로 비롯된 그의 지적, 그의 지적에서 비롯된 나의 서운함, 나의 서운함을 들은 그가 느낀 무기력한 짜증, 그 짜증에서 비롯된 나의 이별선언, 그 이별선언에서 비롯된 그의 비난, 그 비난에서 비롯된 나의 우울감.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선상에서 선로를 이탈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 마지막에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내게 살고 싶은 Paris일까.



며칠 전, 모임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친구의 루이비통 가방의 운명에 관한 난상토론이었다.


"가지고 오래. 꼴랑 백만원짜리 선물해주고."

"깨졌으니까? 야, 줘라 줘."

"줘야 되?"

"야, 꼴랑 백만원짜리인데, 니가 사! 뭐가 아쉽냐?"

"싫어."

"왜?"

"내가 사긴 아깝단 말이야."


하하하.

스무살 여대생의 대화에서 별로 진일보하지 못한 마흔 목전의 노처녀들의 대화였지만, 나름 불꽃튀겼다.


"너 돈 벌잖아. 받은 거 주는 거 싫고, 지 사기도 싫고. 그럼, 그냥 가지고 싶어?"

"속상해. 이런거 잘 받아 먹고, 잘 갈아타는 여자들도 있는데, 나는 겨우 처음 받아봤는데, 이걸 다시 내놓으라고 하다니. 우리 엄마도 이거 빌려 쓰고 싶다고 하는데 아까워서 안 빌려줬단 말이야."


나는 그 순간 다시금 Paris가 떠올랐다.


이 가방을 주고 받은 두 사람은 번듯한 직업이 있고, 오래도록 연마한 가방끈이 있기에, 저 둘이 만나다 헤어진다고 한들 꼴랑 백만원 하는 가방을 가지고 멱살 잡을 줄은 몰랐다. 하긴, 예전 고시공부할때 알던 언니는 이 오랜 시간 고통을 보상받으려면 '이재용'과 재혼이라도 해야 풀릴 것 같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번듯한 직업과 가방 타령이 무슨 상관인가. 놀라기엔 부족할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의 진짜 Paris는 100만원 하는 루이비통 가방 하나 덕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물의 반환을 가지고 남자와 치열하게 멱살을 잡을 친구의 처지에 대해서 내가 훈수 놓을 처지는 아니다. 내 진짜 Paris는 더 누추하다.


나는, 가방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멋진 여자'코스프레를 하다가 남자들에게 겁과 호구 인증을 동시에 주는 쪽인데,한 번은 유난히 얄미울 정도로 흘리던 어떤 남자가 '제주도 00호텔 가고 싶다'는 얘기하자, 나는 엄마도 아니고 잘 나가는 오빠도 아닌 주제에 '내가 숙박권 구해줄게.'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 말을 하나의 백지수표처럼 예금해두고 싶었었는지 '내가 나중에 여자랑 가도 줄거지이?'라고 눈웃음 쳤다. 나는 그 순간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진지하게 궁금한 적도 있다. 그간 내게살살 흘리던  그의 눈웃음은 그냥 Paris, 자기 여자 데려가면 호텔비 공짜로 해달라던 그의 말은 진짜 Paris인 나 따위가 누구에게 무슨 훈수인가.


다만, 한 가지는 궁금하다.

들 이렇게 바닥까지 내려가면서도 누군가 만나고 싶어하다니, 혼자 살기 싫어하는 우리는 혼자사는 내공이 여즉 깊지 않은 탓인가, 아니면 정말 인간은 짝을 만나야 하나, 그 진흙탕같은 Paris를 기어이 보고 말아야 하나.궁금하다. 


겉모습만 번지르르 하더라도 좋은 것만 훑고 지나가는 게 나을까, 서로의 바닥까지 손바닥 들여다 볼 정도로 깊이 들어가는 게 나을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연애는 어떻게 바로 가야 하나. 산 넘어 산. 인생은 참 쉽지 않다.


  



아야꼬 할머니는 '인생은 좋았고, 때로 나빴을 뿐이다'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내온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순간과 운이 없었던 날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인생은 좋았고, 때로 나빴을 뿐이라고.


우리 모두의 연애가, 연애의 시도가, 좋았고 나빴을 뿐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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