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리스트와 로보어드바이저
수입서적 코너에 가는 즐거움에 서점을 가던 시절이 있었다. 주제가 무엇이든 일단 '떼깔'이 다른 표지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고, 그런 잡지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은 바라만 봐도 좋았다.
그래도 기집애라고(?) 패션 타령하는 것이 어울리진 않아도 매번 관심을 끌 수 없던 패션 잡지. 그 패션 잡지 코너는 내게 용돈을 탕진하게 만드는 위험한 곳이었는데, 특히 W, Vogue (이하 '보그')등은 진정 '패알못'이 봐도 흥미진진한 화보들이 넘실대던 기억난다.
미국 보그는 다른 유럽 보그에 비해 언어의 장벽이 다소 낮아 꽤 읽기도 했거니와 1998년 12월이었던가, 누가 봐도 여왕폐하 같았던, 힐러리 클린턴의 벨벳 드레스 표지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대학생이던 무렵의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5000원정도 하는 잡지 한 권을 사들고 펼쳐 보며 오곤 했다. '디지털 세대'인 요즘 대학생들이야 핸드폰으로 검색핳 것을, 나는 그 많은 짐을 가지고도 또 한 권 사들고 다닌 것이니, 애정이 넘쳤던가. 실제 나는 한국 보그, 한국 인스타일 등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통학했는데, 맨 마지막 장의 별자리 운세까지 읽고 나서야 그 책을 놓곤 했다.
서언이 길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 역시 패션 잡지 등의 산업에 대해서 리스펙트가 넘친다는 것.
'4차산업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고유명사가 탄생한 뒤, 신생 벤처, 아니 신생 스타트업들의 옥석을 가리는 작업으로 항상 분주하다.
트리거 포인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차치하고, 어디까지가 그놈의 4차산업혁명으로 분류되는지 조차 갑론을박이 오가던 중, '로보어드바이저'의 장단점에 대하여 난상토론이 있었다.
다른 금융회사들이 도입해서 흥행하고 있으니, 우리도 뭔가 해야한다는 팀에게,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남겼다.
"다 좋다 이거에요. 장이 이러니까 이 종목을 사세요, 추세가 이러니까 이종목을 파세요, 라고 로보트는 얘기할 수 있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사고, 우르르 팔면 그게 로보트로 시세조정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아. 날카로웠다.
로보트는 다른 애널리스트들 보다 알파고에 가까울 수 있다. 알파고 답게 냉정한 분석을 마친 로보트가 알려준 추세는 정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추세를 모두가 따라간다... 그것은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어린 시절 그렇게 이고 지고 다니면서 열혈구독하던 패션 잡지의 에디터가 출간한, '스타일 북'이란 책이 떠올랐다.
그녀가 출시한 '스타일 북'은 사실 실망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책은 그녀만의 스타일 이야기가 아니라, 샤넬처럼 진주 목걸이를 하라는 식의 개성없는 조언들로 가득찼기 때문이었다.
기대에 가득차 첫장을 읽었던 그 순간이 기억나고, 두 어장 넘기다 이 책을 구매한 내 자신이 실망스러워 발을 구르던 순간이 기억난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책이 권하는 스타일이란, '돈이 있어야 잘 꾸밀 수 있다'는 된장풍 갖추기 였다. '비싼거 질러둬라. 어딜 가도 안 빠진다.'는 류의 조언들은 특정 브랜드에 관한 찬사를 쏟거나(특히, 샤넬 ㅎㅎ), 특정 디자이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특히, 샤넬).
물론, 마드모아젤 샤넬이 현대 여성에게 얼마나 대단한 자유를 선사하였는지, 의복사 근처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고, 무슈 크리스찬 디올이 얼마나 우아한 실루엣을 만들었었는지, 하우스의 로고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일종의 팩트이자 진리였다. 샤넬은 위대하고 디올은 우아했다.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패션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 스타일 북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책은 실망이었다. 그녀의 조언들은 그냥 가려운 곳은 못 긁어주는데 딱히 틀린 곳 없는, 단지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책을 덮고 잠시 상상해보았다.
이 스타일 북이 추천하는 대로 옷을 입은 여자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모두가 진주 목걸이를 하고, 트위드 자켓을 걸치고 걸어오는 그림. 그녀의 개성없는 조언을 모두가 토 안달고 따랐을 때 그려지는 그림은 아주 난감했다.
그 스타일 북은 로보어드바이저였던 것이다. 틀리지 않는 맞는 말을 하지만 진짜 내 삶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그것.
스타일이든, 투자든, 조언자가 필요하다.
조언자의 캐릭터에 따라 산출물이 달라질 것이기에 조언자가 더 이름있고, 더 신뢰할만한 캐릭터가 있길 바랄 것이다.
그런데, 그 조언자가 우주 만물에게 똑같은 조언을 한다면, 사실 그 조언은 이미 농담만도 못하다.
(쓰다보니, 또 조언자를 욕보이는 글을 썼다. 듣자하니 외국 라이선스 패션 잡지의 에디터는 다 귀한 집 딸들이라 유학파이며, 그들의 대디, 마미들은 여전히 현역이라 조심하라고 했는데 부디 노여워 마시길.)
아야코 할머니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뇌가 없는 사람은 인간성을 잃는다'고.
다만, 동일한 제목의 본문 내용은 다소 산만한데, 어쨌든 그 말미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운명으로부터도 우린 배우고, 그것을 배우지 못한 인간만이 운명에 패배한다고.
스타일이 고뇌는 아니지만, 당신이 여러가지를 시도하면 본인이 느끼는 감각이 정답일 수 있다.
투자는 고뇌이니, 당신이 스스로 운명에서 배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