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은 애초부터 못 들은 것처럼
경력직 이직에도 입사 동기가 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들이라며, 총무과 두 어번 같이 드나든 것이 전부인 입사 동기야 '남'일 수 있겠지만, 그녀는 같은 본부 옆 팀, '식구'였다.
상처투성이로 피를 뚝뚝 흘린지 얼마되지 않았던 나는, 낯선 곳 사람들이 아무리 잘해줘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서서히, 이 회사가 안전지대라고 느끼며 마음을 열게 된 데에는 밝고 명랑한 그녀도 한 몫 했다.
"언니, 우리 여기서 잘 지내봅시다. 자꾸 어디 가려고 하지 말고."
그녀는 이 회사에 대한 완주 의지가 있었다. 회사 앞 헬스클럽의 갖은 감언이설에도,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사육신 지조로 3개월만 해보겠다며 손 사레치던 나와 달리, 최장기간 옵션인 2년 회원권을 결제한 그녀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런, 그녀가 11개월만에 이직했다.
1년을 채우지 못한 이력서 한 줄은 독이다.
그녀가 이를 모르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 6월부터 사력을 다해 옮기고 싶어했다.
"잘 지내보자며, 좀 만 참아보면 안돼? 2년은 채우자, 나도 헬스장 연장할게."
"도저히 못 참겠어요. 죽을 거 같아요."
"이력서 생각해봐, 이 시간이 아깝지도 않아?"
"이 경력, 다 망가트릴 각오로 나가는 거죠. 나도 버티고 싶다고요."
새벽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목표가 탈출이 되는 지경.
그 지경을 이미 겪은 나도 그녀를 무턱대고 말리기 싫었다. 그 맘 모르는 거 아니지. 얼마나 지옥같을까.
그 괴로움은 사실, 이력서고 뭐고 안중에도 없게하는, 대재앙이다. 그녀는 이재민이었다.
일단, 그녀는 약간 헤비(Heavy)한 경력직이었다. 그냥 적당히 짬만 채워온 기존 인력 풀에 대하여,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해보겠다는 임원진들이 그녀를 데려왔다. 경력도 길고, 가방끈도 길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업무에 대한 프로다운 욕심이 있는 사람이 고인 물에 들어온 것이다. 족보가 꼬일 일이었다.
엉덩이만 붙이고 있지, 업무를 실제 하는 시간은 찾기 어려웠던 선임들은 처음부터 불만이 가득했다. 인수인계는 없었고, 자료는 공유되지 않았다. 사원, 대리를 뽑아 사람을 키워야되는데, 왜 헤비한 경력직을 뽑는지 모르겠다고 방송을 하고 다녔다. 방송이 계속될수록, 그녀는 외로웠다. 다만, 그녀는 텃세 속에서 산출물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사실, 나도, 나와 같은 보직의 선임이 있었다. 그 역시 고인물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왜 뽑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업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안내받지 못했다. 자료 공유도 없고, 인수인계도 없고, 물어보면 모든 것은 아직 업무상 비밀이라고 했다. 나는 같은 팀에서 업무상 비밀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같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았다. 내게 선임이 어렵게 굴자, 다른 보스들이 움직였다. 나의 업무는 궤도에 올랐다. 나는 결국 보직이 변경되어 신설된 팀에 배정받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입사동기이자, 군식구, 입양아 같던 우리 둘은 더 이상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데 한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를 나가지 말라고, 마음 붙이고 오래 다녀보자고 말하는 쪽은 내가 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바짝 타틀어갔다.
그녀의 퇴사일, 우리는 조촐하게나마 술상 앞에 마주 앉았다.
나는 가장 큰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박수를 쳐 줄 사람이 정말 나 혼자였으므로.
"이런 인재를 활용 못한 건 그들의 한계야. 그 팀은 그 나물에 그 밥처럼 근근히 살 수 밖에 없어. 걔들 승진하는 거 마음에 두지 말고 가서 잘 해."
"걔들은너무 못나서, 싫지도 않아요. 걔들보다 더 싫은 사람이 있어요."
"누구?"
"00과장이요."
00과장이라니.
당신을 이 회사에 추천했던, 전 직장 동료 아닌가.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상해요?"
"이상하다기보다."
"걔 웃겨요. 내가 지금 잘 가는 자리라고 다들 부러워하는데, 나더러 지금 옮기는 게 마음에 안 든데요."
"그건, 이직 타이밍이 좀 일러서 아쉬워서 그러겠지."
"그게 아니에요. 걔 나한테 속이 꼬여 있어요."
"왜?"
"내가 걔들, 인수인계 안 해준다, 잘 모르는 데 뭉게면서 진도도 못 낸다, 그래놓고 승진은 지 혼자해야된다고 욕을 했더니, 너는 걔들보다 뭐가 얼마나 잘났냐고 하더라고요."
웃으며 말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언니가 윗층으로 가고, 내가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속상하면 툴툴거렸었거든요. 그런데, 00과장은 내가 당하는 모습 하루종일 보면서도, 나한테 한 번을 다독거리는 말을 안 해줬어요."
"00과장이 원래 무뚝뚝하잖아."
"무뚝뚝한 거로는 설명이 안되도록 유난히 그랬어요. 나한테만 정의의 사도인냥, 어찌나 가르쳐대는지. '니가 잘난 건 또 뭐냐', 이런 말은 그렇다쳐도, 팀장이 나한테 심하게 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위로해주는데, 00과장은 나더러 '혼날만 하니까 혼난거지, 팀장이 바보냐'이랬죠."
"저런."
"다른 사람들이 저 이직 잘했다고 다 부러워하고, 언제 봤다고 나한테 정보 좀 달라며 밥한끼 같이 먹자고 하는데, 나한테는 '가라!'라고 하고 끝내더라고요."
그녀는 지금 몹시 서운하다.
00과장이 밥을 안 사줘서가 아니고, 00 과장이 제 이직을 부러워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00과장의 쓰잘데 없는 말 몇 마디가 사무치게 서운하다.
나는 그 날, 집에 돌아와 오래도록 펑펑 울었다.
별 영양가 없던 그들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말에 괜한 상처를 입고 아파했던 과거의 내가 불쌍해서.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당장 손님이라고는 내 손님 밖에 없던 때, 검은 상복을 입고 넋이 나가 돌아다니던 내게 과 동기 여자가 물었다.
"선배 누구누구 왔어?"
"응? 몰라."
"사람 많네. 우리 할머니 돌아가실 때, 이렇게 안 오기만 해봐라."
그때 나는 스물 둘이었는데, 스물 넷까지는 그녀를 만났던 것 같다. 그녀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지금, 아무리 돌이켜봐도 나는 행복한 것 같다.
그 무리 중의 하나가 또 기억난다.
인생 첫 미팅, 뭐 이런 걸 같이 한 그녀는 요즘 말로 '멕이는' 말을 꽤나 잘했다.
가령, 미팅에서 남자가 뭐라도 해보려고 나더러,
"손이 예쁘시네요."
라고 하면,
"얘는 속눈썹이 더 귀엽지 않아요? 짧아서 탁 쳐져 가지고 커텐 같거든요."
라고 했다. 그래놓고, '화났어? 괜찮지?'는 빼먹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손 얘기에서 속눈썹으로 넘어가면, 그녀의 속눈썹 이야기는 오래도록 화자되었다. 우리도 스물 넷 정도까지 얼굴을 봤던 것 같다. 그녀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한 것 같다.
이렇게 자잘한 기억이야 언제든지 꺼내봐도 아프진 않다. 왜 좀 더 빨리 끊어내지 못했을까 아쉽기는 하지만.
정말 아픈 말은 그래도 마음을 열었던, 내가 꽤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저 따위로 하는 말이다.
지난해, 내가 이직을 고민하던 무렵, 피를 뚝뚝 흘리며 울부짖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 대단하다. 진짜 그 정도 하는 건, 그 여자가 너보다 잘난 거야."
"난 이제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점 한 번 봐. 짤렸다고 하고."
귀를 의심할 여유가 없었던 나는 고개마저 끄덕였던 것 같다.
다만, 두고 두고 생각난다.
유난히 내 커리어 패스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 미주알 고주알 캐묻기를 안부인사처럼 나누던 그녀가, 귀찮다는 듯 짧게 점 집을 추천했던 그 목소리만 유난히 귓가를 맴돈다.
그 지옥을 벗어나, 안전지대에 정착한 다음, 꿈인지 생신인지 모를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나는 신이나서 한 마디 했다.
"일이 너무 재미있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 매일 감사해."
"아이고, 일이 재밌댄다."
"커리어적으로는 정말 최고 좋아, 지금."
"그런데, 졌어. 그 여자한테는."
내가 졌었다는 말을 하며 방긋 웃었다. 나는 왜 웃는지 궁금했다.
내 상처에 소금뿌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내가 졌던 그 순간을 떠올리니 즐거울까.
매일 같이 붙어다디던 시절이 있던 그녀가 처음 그런 말을 한 것은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는 나를 푹푹 찌르는 말을 여과없이 하곤 했다. 하지만, 난 그것을 참아낼 수 있다고, 노력하면 무뎌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그동안 눌러 두었던, 푹푹 찔려 놓고 방치되어 여즉 아물지 않았던 내 상처들이 모조리 덧나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마음속으로 그녀를 떠나보내기로 했었다.
다음주면 입사한 지 1년이 된다고 한다.
1년이 지나니,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다. 갑자기 퇴사한 입사동기가 생각났다. 전화를 걸었다.
"언니, 왜요?"
"00과장 있잖아."
"응."
"신경쓰지마, 우리 인생 짧아. 다시 볼일 없어. 상처받지 마."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녀는 한참을 웃었다.
"언니, 나 그 인간 다시 볼까 걱정돼요?"
"그냥, 마음에 두고 있을까봐 걱정되었지."
"나는 언니랑 달라. 난 애저녁에, 퇴사하던 순간, 그 인간은 관뚜껑 덮었다고 생각하고 나왔어. 다시 왜 봐, 그 인간은 날 볼 수 없지. 내가 그 회사에서 건진 사람은 언니 뿐이에요."
"그래, 난 이제 훨훨 나는 일만 구경할게. 나도 잘하고."
씩씩한 대답을 들으며 마음이 놓이다가도, 저렇게 독하게 대답하려면, 얼마나 아팠을까 헤아려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때가 언제라고, 벌써 씩씩하려고 노력하다니, 이 모든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우리 인생, 이렇게 짧은데,
우리는 왜 매번 상처받길 반복하나.
우리는 왜 매번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나.
다음 주, 입사 1주년을 기념해주겠다며, 저녁 시간을 골라보라는 그녀의 문자를 보고, 밤잠을 설치다 끄적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