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권하는 사회

아닌 척 해놓고 열렬히 원하던, 당신 덕에 쓴 밤의 일기

by Nima

퇴근 직후 이동할 일이 있어 올라탄 택시.

가뜩이나 막히는 퇴근 길에서 정말이지 음주운전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곡예운전을 일삼던 벤츠가 매너 없이 끼어들더니 비켜줄 법 한 곳에서도 기어이 비켜주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는 내게 미안해했다.


"아, 저 놈의 차가 결국 똑같이 갈 건데 안 비켜주네."

"그렇게 늦지 않았어요. 안전하게만 가면 되요 (정말 겁쟁이임)"

"요즘 벤츠는 양반이 아니에요. 저거 완전 상놈이지."


아저씨는 갑자기 양반 상놈 이야기를 하셨다.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다들 양반이라 벤츠 타고 다니면 과속 운전도 안하고, 깜빡이 켜면 비켜주고 그랬지. 배운 사람이거나, 귀족이거나 그랬다고."

"하하하."

"그런데, 요즘은 전부 빚 덩어리로 월에 얼마 내면서도 벤츠를 끄니까 상놈들도 벤츠를 타. 매너도 없고 하는 짓이 완전 상놈이야."


아저씨는 그 길 내내 옛날 벤츠의 낭만에 대해 얘기하셨다. 공감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양반, 상놈의 특징을 이분법으로 도맷금칠 일은 아니지만, 아저씨의 논리는 얼추 통하는 논리가 있다.

일견, 우리의 행동거지가 꽤나 유교적이던 무렵,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본인 일신의 영달을 위하기에 앞서, 혹은 그와 동시에, 배운 사람으로서의 미덕을, 품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무렵에는 '남 보기 부끄러워서' 본능에 충실하지 못했다. 대부분, 좀 배워서 좀 돈을 만진 사람들이 그러했다.


사실 안 배우고 돈 안 만져도 그러한 사람 부지기수고, 그건 가정 교육의 문제, 집안의 가풍 문제일 수 있지만, 아저씨 말씀은 대략 이런 얘기일 것 같다.


일단, 옛날 벤츠탈 정도 되는 사람들은, 벤츠를 리스로 긁어서 리스료 헉헉대는 사람이 아닌, 그러니까 여유로운 자금이 있어 구매의 선상에 자연히 놓였던 것이 벤츠일 뿐, 허영심에 쫓겨,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이 정도는 질러줘야 분이 풀리니까' 주제 넘게 질러 놓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데, 내가 지금 얼마나 바쁜데 네 까짓게 나를 방해해'라고 득달같이 하나하나 다 이겨 먹어야할만큼 조바심병 환자가 아니라, 여유있게 남 먼저 보내줄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말.


길고 지루하게 설명했는데, 옛날 벤츠 탈 사람들은 주제 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그래서 그에 걸맞는 여유도 자연스럽게 갖춰졌다는 사람이었다는 말이었다.


옛날 벤츠타는 사람은 양반이야.

대단히 마음에 들어 오래도록 곱씹었다.




본인을 과대평가하는 부류가 있다.
그 중에는 다음에 잘 되면 원없이 용비어천가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들어보면 그야말로 상놈이 양반이기도 해야해서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내용이다.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따위의 내용들.


그 누구보다도 욕망에 충실해서, 돈 많이 벌고, 대접 받고 싶고, 남 가르쳐 먹는 재미에 자격증 하나 따 놓고, 본래 아동 인권에 관심이 있어 그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는 사람. 아동 인권에 관심 있는데 부동산 투자, 금융 자문 섹터에 발을 못 들여 안달복달하다가도, 최종 목표가 뭐냐고 하면, 인권 향상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떨어진 얘기를 한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여즉 10대 사춘기 같은,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려면, 급하게 쫓기지 않아야 한다.

급하게 쫓기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쟁취하겠다는 빡센 플랜이 없어야 한다.

빡센 플랜이 없으려면 현실적이어야 한다.

현실적이려면 나 자신을 알아야, 주제파악이 되어야한다.


주제파악되지 못한, 남들 하는 건 다 해야하는, 벤츠를 리스한 변호사는 200만원이 넘는 리스료를 갚아줄, 부잣집 규수와 선을 본다. 여자친구는 킵해두고, just in case.


그는 쫓긴다. 벌 일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버는데 아직 목마르다. 왜냐하면 다른 친구가 박사를 딴다니까. 혹여나 강의 나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내가 그 보다 못난게 없으니까.

부랴부랴 박사과정을 등록한다.

박사 과정 시간을 뺀다. 업무는 칼퇴를 해야한다. 받은 만큼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하면 네 업력에 많이 준다는 핀잔을 듣는다. 분노가 폭발한다. 이직을 찾아본다. 섹터가 꼬인다. 등록한 박사과정과 지금 내 업무와 겹치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다 잘하니까. 그리고 용비어천가를 부를 것이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이 벤츠는 깜빡이를 켜도 택시를 끼워줄 수 없다.

그는 바쁘다. 그 정도는 양보 못한다.

다만, 그의 길에 양보가 없는 다른 차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그처럼 지체높은 벤츠에게 양보를 안하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요즘 벤츠는 자기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모토인가보지.


나는 이런 벤츠를 백 대 정도 알고 있다.

벤츠가 인플레되어 옛날 벤츠를 못 따라가는 게 속상하다.



그 여자는 참 욕심이 많았다.

돈 욕심이 없는데 팀 복리후생비도 자기 손아귀에 있어야하고 자리 욕심 없는데 제 윗사람 욕하느라 더 윗사람에게 손편지도 써야했다. 동분서주 일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자리 보전 홍보용이었다. 일은 남이 다해야했어도 모든 공덕은 자기 몫. 그런데, 본인의 모든 노력은 회사를 위한 것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런건 남들이 어련히 알아서 평가하건만.


한편으로는 남들이 알아서 평가한다는 사실 자체가 참 두려운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 참 멋있다, 그릇이 된다, 리더 같다'는 얘기가 나온 자리에서 그를 같이 칭찬했다. 그의 지난 시련이 그를 더 크게 만든 것 같다고, 팔자에 리더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그 자리가 파하자 나를 끌고가 물었다.


니 팔자는 어떠냐고. 사주팔자 본 적 있으니 대답해보라고.

나는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니 사주에도 지금은 시련인데 나를 날리면 리더가 되냐고.

너의 의도가 뭐냐고 다그쳤다.

나는 사주팔자 본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녀는 어릴 적, 도를 아십니까 아르바이트를한 적 있다.


자리가 인플레되면, 그 자리의 무게에 안 어울리는 경박한 인간이 자리를 꿰차면, 자리가 우스워진다. 회사든 뭐든 일단 조직은, 윗사람의 무게감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그래야 아랫사람이 그를 따르는데, 일단 아랫사람 답게 모든 사랑도 독차지 해야하는데, 본인에게 무릎 꿇은 아랫사람 보는 재미도 누려야 하는데, 일단 윗사람 하기에는 그릇이 작은데, 그래도 내가 난데, 나는 대단하니까 그 자리 일단 꿰차야 하니까 차지하고 봐야하면, 그는 사실 양반다운 윗사람, 옛날 벤츠는 아니다. 요즘 벤츠일 뿐.


요즘 벤츠같은 요즘 이사.

이사라는 간판, 구멍가게처럼 직원 3명중에 하나가 대표, 하나가 이사, 하나가 과장인 회사인가. 괜시리 인플레된 직함은 그를 더 초라하게 하건만. 그 말은 금기어다. 용비어천가에 방해가 되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일단 우겨 넣는것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챙겼다.

입사 8년차인 그녀는 한국식 나이를 계산하는 냥 경력 10년차라고 계산했다. 그 방법으로 같이 치면 나도 3년차인데, 내 경력은 1년2개월이라고 만 나이로 계산해줬다. 그 전에 다른 보직으로 근무한 경력은 기재하지 말라고 했다. 자격증도 명함에 기재하지 말라고 했다. 본인은 연수를 수료한 것까지 모두 명함에 기재했다. 그녀의 명함에는 빈틈이 없었고 나는 이름만 적혀있었다


그녀는 늘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하다가 돌아서면 10원 한 장도 아쉽다고 하기에 맞장구를 쳐볼까, 저도 돈이 제일 좋다고 말하면, 역시 사리사욕밖에 모른다고 했다. 주로 대표님이 들으실 때를 골라. 뭐, 이건 귀여운 애교 같은 에피소드군.


그녀는 윗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싶어했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받아 그 내용을 전달했다는 것은 감추고 싶어했다. 일을 시킬때는 FW로 시켰고, 가끔 bcc로 답변하는 내용은 보여줬다. 다만, 칭찬은 내게 돌아올 수 없었다. 회의 자리에 가서 답변을 못 하면 화장실에 숨어서 리서치를 시키고, 메일 말고 문자로 답을 달라고 했다. 메일은 내가 보낸 것이 기록에 남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질문이 들어올 때, 윗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면 내게 맡겼다. 내가 업무를 하고, 본인이 무시한, 직급이 낮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대응을 시켜 놓고 뒤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그 분에게 물었다.


"얘 좋아하죠? 왜 보통때랑 다르지? 나한테 하는 반응하고 다른데?"


질문자가 당황을 하며, 그는 말을 얼버무리고, 커피 쏘겠다며 도망갔다. 그를 쫓아갔다. 커피 정말 사줄 거냐고 묻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정말 호의를 보인 적도 있다.

그를 따로 불러, '사귀냐 안 사귀냐'를 취조한 적도 있다.

그것이 그녀의 업무 범위는 아닌데, 아니라는 말을 하면, '내가 우습냐?'고 했다.


가끔은 내 이메일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너무 궁금한지,

갑자기 등 뒤에서 마우스를 잡고 이메일을 하나하나 보면서, 멋쩍은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나는 너한테 긴장감을 주고 싶어. 손이 부들 부들 떨려야 되는데."


그래놓고 내가 정말 떨린다고, 무서워하는 표시를 내면 사각지대로 끌고 갔다.


너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 안된다고.

그건 자기를 흔드는 일이고, 엿 먹이는 일이라고.

나는 누가 누구의 엿이 되는지 궁금했다.


내 경력 중에 다른 회사에서 일한 것을 두고, 그 때의 업무 보고서를 넘겨달라고 했다. 자료 폐기 서약서를 쓰고 나와서 남은 것이 없었으나,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이렇게 돌아가는 흐름이라고 설명을 한 것을 그대로 받아 적어, 업무 제안서를 낸 적도 있다. 물론 나는 FW로 일을 받았다.


그리고 나를 불륜녀로 몰았다.

그 이유는 인사담당자로부터 나에 대한 관리를 지적당해서.
지적이 온 이유는 내가 그녀를 흔들기 위해 정치적으로 모함해서라고 했다. 회사의 그 누구도 본인처럼 모함당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인사팀의 지적을 내 모함으로 만들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내가 날아가면 이자리 니 자리 같지?"

"아니요."
"너는 이 회사에 왜 다니는데?"
"저는 경력이 필요해요."

"거짓말. 너는 이 자리가 탐나."


돌이켜봐도 그녀는 그 자리에 맞지 않았다. 그냥 비서실 업무하면서 윗사람 보필하면 맞았다. 그런데 그런 건 또 성에 차지 않았다. 팀원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꿈을 들어주려고 내가 뽑혔다. 잘 돕는다고 칭찬을 들었다. 그건 안되었다. 비서실장도 하고 본부 팀장도 해야되는 그녀의 욕심은 갈 방향을 잃었다. 일단 다 갖고 싶다니 나는 받을 게 없었다. 인플레된 자리의 이사를 보필해야하다보니, 나는 투명인간처럼 살아야했다. 아랫사람으로서 일했다는 공치례도 그녀가 가져가야했는데, 얇은 완장 하나 차고 풀 스윙으로 휘두르는 권력맛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며, 무릎 꿇은 모습도 보여줘야했다. 그래야 이사맛이 난다니까, 맞춰저야지 별 수 있나.


그러고도 일한 이유?

그렇게 참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일단, 그 회사는 좋은 회사고,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최소한 그 곳에서 나는 3년을 버티고 싶었다.

어떤 일이라도 3년은 해야한다. 새로운 교육과정에 대해서 3년을 주는 이유, 서당개도 3년이라는 이유. 어떤 분야든 3년은 있어야 흐름을 안다.


나는 그 회사에서 1년 반을 겨우 채웠다.



작년 오늘, 나는 그 아픈 여자를 떠나 이 회사로 이직했다.

이직한 뒤, 지금의 투자본부에 배치되었을 때에도 나는 그 정신이 아픈 여자로부터 받은 트라우마로 사람에 대해서 잘 믿지 못했다.


그런데, 팀장님, 대표님은 좀 달랐다.


'잘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하면

'이제부터 잘 하면 되죠.'

라고 했다.


나는 시험에 들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뭔가 진행하면,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두 분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다.


"팀장님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양반이야. 둘다 금수저 집안에서 공부도 잘해가지고 그냥 대표해야 되고 팀장해야 되는 사람들이거든. 남을 밟아야 되는 이유가 없어. 서로 잘 되게 도와주자고 하지."

"저는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그걸 즐겨. 그것도 과장님 복이야."


다 가지면 더 가지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상놈 심보였다. 윗분들이 양반이라, 지난 1년 마음이 따뜻했다.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1년동안 성장한 내 커리어는 무식하게 상놈 밑에서 버티며 보낸 1년 반보다 더 견고하고 완숙했다.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뭔지 더 많이 배웠다. 더디게 가더라도, 그 자리 못 가더라도, 지금 이자리에 꼭 맞는 알찬 사람이 되어야지.


가진 차이든, 차지한 자리이든, 내 그릇 보다 넘칠 때 내가 허덕일 모습이 싫다. 알차고 야무지게, 인플레 없이 단단한, 찰떡같이 내실있는 사람이 되겠다!



택시 아저씨 덕분에 양반 상놈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두서없이 적게 된,

나만의 입사 1주년 기념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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