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뒤척이며 쓰는 일기
팀장님이 출장가신 덕분에 조금 여유있게, 차를 타고 나가 점심을 먹었다. 동료도 나도 가보지 못했던 식당이라 카카오맵만 믿고 나선 초행길이었는데 목적지에 다 온 것만 같다가 경사진 곳 외딴 건물에 식당 대신 힙한 상점이 보여 당황했다. 동료는 필라테스 용품을 파는 곳 같다고 했다.
우리는 식당이름을 대며 위치를 묻고 싶어, 그 필라테스 용품 숍일것만 같던 곳으로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며 점원을 찾는 순간, 나는 이 곳이 필라테스와는 별 상관 없는 곳임을 알았다.
"00식당은 골목 밖으로 나가시면 되요."
"감사합니다."
나는, 친절한 점원의 대답을 훔친 사람 마냥, 서둘러 숍을 빠져나왔다. 동료가 물었다.
"언니, 왜 그렇게 빨리 나가는데?"
"너, 저기가 왜 필라테스 숍 같았어?"
"엥? 필라테스 아니야?"
무던히 내 뒤만 쫓아오던 동료는 그제야 숍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Pleasure Lab'
필라테스와의 연결고리라고는 앞글자 'P'가 전부였던, 짧지만 강렬하게 짜릿했던 숍. 우리는 촌스럽게 낄낄 거리느라 겨우 냉면집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외로움을, 피지컬로 풀 수 있을까.
언젠가 신여성 몇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나는 나이값 못하도록, 아니, 배운 값 못하도록 촌스럽게도, 나혼자 '피지컬리' 만족하겠다는 그 노력은 해 본적 없었다. 그 때, 신여성 하나가 말했다.
"너는 후졌어. **나이저라고 한 번 써봐. 너의 모든 욕구불만을 한 방에 재워줄거야."
"욕구불만 없어."
"야, 너가 매일 한 숨이 절로 나고, 매사에 짜증나고, 열심히 살아도 암 것도 손에 쥐는 거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 욕구불만이라 그래."
"하하하하하하."
두런 두런 웃음으로 때웠던 위기의 토론회에서 나는 야광 토이의 실존에 대하여 교육받았고, 꽤나 궁금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실물을 영접하고야 말았다.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나, 심각한 회의가 마무리되어 갈 때 쯤이던가, 나는 갑자기, 대충 그 쓰임새가 미루어짐작되던 고만고만한 것들 말고,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사이즈의 요상한 형광 주황색 물체가 떠올랐다. 혼자 터진 웃음을 제대로 끄지 못한 나는 미친 척, 기침이 나오는 연기를 하며, 회의실을 뛰쳐 나갔다. 정수기 앞에 홀로 서, 애써 진정시킨 웃음보는 꽤나 오래도록 간헐적인 잔기침을 남겼다.
지난 겨울부터 나는 'Shape of Water'를 그 망할 'LaLa Land'를 대체할 새로운 인생영화라고 떠들고 다닌다. 해피엔딩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내 지친 마음을 곱게 안아준 착한 영화이건만, 나는 엘라이자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아침마다 출근을 준비하시는 엘라이자의 여러가지 recurring 중 그 하나, 말이다.
정말 매일 하고 싶을까.
그러면, 좀 나을까.
나는, 손 대면 와장창 바스러져버릴 것 같이 말라 비틀어진 내 감정은 조금 촉촉해질 수 있을까.
샤워기를 틀었다.
눈을 감았다.
천천히 엘라이자가 되어 보자.
침을 삼켰다.
손을 들었다.
함께 샤워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게 뭐라고, 별 거 아닌 걸로 오래도록 낄낄거리던 순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엘라이자가 될 수 없다.
상상만으로도 오히려 더 볼품없어졌다.
촉촉해지긴 커녕, 심장이 더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아주 오래, 안개분사가 된다는 그 샤워기를 틀어놓고, 넋나간 여자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전, 서울 모처에서 건물이 무너졌다.
우리의 처음을 설명할 때, 빠지기 어려운 식당이 있었다.
신문에 나기 전, 놀랍게도 사고가 있었던 그 날,
나는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구급차, 소방차, 몰려 나오는 통에, 나는 뉴스 어딘가에서 보았던 남북정상회담이 뭔가 잘 못된 줄 알았다. 그만큼 그 순간 그 장소는 아수라장이었다.
사고의 수습이 얼추 끝나서야, 나는 불구경 하던 시민의 껍데기를 벗고, 다시 생각 할 수 있었다. 하나 둘 제 갈길로 흝어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무너진 것이 그 익숙한 건물이었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서울 바닥에 낙후된 건물이 어디 이 것 하나이던가.
왜 나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이렇게 산산조각 내야하는가.
이미 아무도 아닌 그의 처음 모습이 떠오르자, 나는 그 사고가 사무치게 서운했다. 가루가 되어버린 시멘트를 보니, 지난 시간 속에서, 정 떨어지게 이기적인 말만 둘러대던 그의 모습말고, 처음, 그러니까, 소주의 힘을 빌어 처음, 제 집과 정 반대 방향인 내 집까지 기어이 택시를 같이 타고 가겠다던 그의 처음이 떠올랐다.
아깝다.
서운하다.
아프다.
따갑다.
괴롭다.
허무하다.
서울시의 행정 문제를 꼬집는 기사와 함께 산산조각난 건물 사진을 화면으로 보면서, 목구멍 너머로 간질 간질, 그의 이름이 맴돌았다.
그는 죽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강박증 환자처럼 고개를 젓고 살았는데, 또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그를 짓누르다가, 전화를 걸었다.
자동으로 거절되었다.
아니, 이럴수가.
나를 차단했단 말인가.
다시 걸었다.
자동으로 거절되었다.
카카오톡을 열었다. 차단한 친구 목록에서 득달같이 그를 찾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왜 나를 차단하냐고 물었다.
이런 방면으로는 잔재주 못 쓰는 그가 무슨소리냐고 되물었다. 나는 전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내가 차단해서 발신도 안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차단을 풀어도 넘어간다고 했다. 그는 자기 전화도 안 받더니 왜 전화가 안되냐고 되물었다. 나는 자동으로 넘어가는 게 뭐냐고 따졌다. 일 할 때 방해금지를 해뒀다고 했다.
갑자기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왜 차단이니 아니니를 따지고 있나.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촌스러운가.
언제까지 질척거릴 것인가.
딱 죽고싶을 만큼 무안해 미치려는 찰나, 재주는 없고, 제 생각만 할 줄 아는 그가 대답했다.
'왜 시비거는지 모르겠지만, 잘자라.'
이 모든 일은 오늘 하루에 있었다.
하루 하루 연결된 것 같지만, 공기도 감정도 매번 다르다.
매번 다른 하루 하루가 쌓여, 좋다가 싫다가 외롭다가 필요없다가 하는 이 모든 감정이 잔잔하게 다스려질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는 너를 놓을 수 있을까.
너는 나를 완전히 버릴 수 있을까.
두서 없고 영양가 없는 밤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