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스물 아홉이 된다는 여자 대리님이 입사했다. 나름 3년차 경력직이라 그런지 어리버리 마냥 순진하지는 않다. 내가 스물아홉일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때 이런 똑순이를 안 만난 것이 다행같다. 스물아홉의 나는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었는데 대리님은 아주 입체적으로 경력직 냄새가 난다. 일 욕심도 많고, 정무적 감각(?)도 뛰어나 어떤 일이든 일단 상무님께 먼저 보고하고, 다른 차장님께는 통보식으로 전달해 주도권이 차장의 아래에 있음을 암시하는 등 권력을 레버리지할 줄도 안다. 무조건 본인이 잘 해먹겠다는 것도 아니다. 상무님이 좋아하는 부장님께는 자기도 뭔가 보고 있으니 얼른 같이 일을 해 보고싶다며 어필한다. 다만, 그녀의 눈에 나는 영양가 없는 그냥 말단 차장같은 느낌인지 내게는 적극적으로 뭘 같이 하자며 접근 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덕분에 내 커리어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말 세상에 다시 없을 악마같던 그 여자는, 첫 직장에서 처음 만난 높은 사람, 파트너를 보고, '나는 파트너가 되어야겠다.'고 꿈을 가졌다고 했다. 파트너가 무엇을 맡아 어떤 책임을 지는지에 대해서 알기도 전에 일단 '제일 높은 사람'이 되어 저 권력을 다 누리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는데, 그 때 그 여자는 서른 여덟이었다. 나는 마흔 하나인데,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놓지 못하는가.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던가.
아주 어릴적부터 이 일을 하고 싶었나.
그건 아니다.
어릴적에는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으며, 살면서 흘러가다보니, 내 눈 앞에서는 많은 문들이 닫혔고, 닫히는 문들 앞에 좌절하다가 다른 문이 열리는 곳을 뛰어들어가길 몇 번, 그래서 흘러들어와 시작한 것이 이 일이다. 다만, 문자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피신하듯 흘러다녔던 것은 아니다. 매 순간, 그 당시 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고, 선택하면 또 최선을 다했다. 지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달렸으며 그 만큼 이 일은 재미있다. 온 하루를 다 써도 지루하지 않다. 하지만, 재미있는가와 잘 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내가 이 일을 잘 하는 사람인가.
그러니까 실력은 물론, 그야말로 나를 밀어주는 라인을 가진 운도 있어, 잘 나가는 딜마다 이름 석자 올리고 있는 사람인가. 운도 실력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실력은 별로인데, 그러다보니 나는 잘 하는 사람은 아닌것 같다. 너는 좋겠다며, 나는 누가 밀어주느냐고 징징대기에는 내 나이는 마흔하나, 그럴 시간이 없다. 승부를 내거나, 도망을 가거나.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까지 일을 해 온 시간보다 적다. 내게 남은 시간은 상당히 짧다. 나는 조금 더 냉정하게, 나의 전략에 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퍼포먼스의 'hit rate'가 언제쯤 나아질지 매일 밤 잠들기 전 고민하지만, 아침에는 아무 고민 없는 사람처럼 출근해 평온한 척 일을 했다. 그러다 몇달 전 입사한 여자 대리님의 평가 속에서 내가 그렇게 영양가 있는 차장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 받자, 과연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이 되었다.
스물 아홉 무렵을 반추해보았다.
나 스스로를 엄청나게 나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관하여 대단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것만 더 배우고 이것만 더 갖추고 이런 업무 범위까지 확장하고 싶다는 둥의 거대한 열정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러 직장을 때려치우는 등의 객기를 부리기도 했으며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하지 않을 일이지만),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만나는 남자마저 있었다. 생각해보니 참 여러 각도에서 '쏴라있는' 나 였다.
대리님이 떠올랐다.
지금 하는 일의 중심은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이 대단한 프로젝트를 내가 상무님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주도적으로 끌고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의 열정이 일견 이해도 가고 부럽다. 나와 열정의 결은 다르지만, 무엇인가 주도적으로 하고 싶고, 내가 영원히 이렇게 잘 나가다가 앞으로는 위인전에나 나올법한 대단한 사람이 되고 말리라는 의욕은 이해할 수도 있고 대단히 부럽다. 과거의 나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의욕을 가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내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히 인식해버렸고, 내게 남은 시간에 대해서도 지독하게 느껴버렸고, 내가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뼛속까지 사무치게 받아들여버렸다. 현실적이라는 수식어로 덮어버린, 패배주의에 빠져 현실과 타협하는데 익숙해진, 마흔한살의 차장님 인생에 남은 선택은 무엇일까.
주말에는 책도 읽고, 공부도 좀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가도, 시험 공부 하기 싫었던 그 마음 그대로 그저 유튜브나 쳐다보며 와식생활을 하다보니, 어느덧 일요일 오후가 되고 있다.
회사갈 일이 걱정이다. 내가 일이 싫어질까봐 걱정이다. 내 에너지가 고갈될까봐 걱정이다.
정말 좋았던 회사를 그만둘 무렵, 나는 조금 더 진취적인 포지션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대표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인생 몰라요. 최선을 다해봐요."
대표님의 인생이야말로 누군가가 롤모델로 삼기조차 버거운 완벽한 인생인데, 그는 내게 인생은 모른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 말의 무게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지금이 내가 제일 무르익은 시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비애롭다.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데, 다시 한 번 마지막 불꽃을 불살라보는가.
그러고보니 아버지께서 잠꼬대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게 하소서.'
약주하시고 소파에서 주무시다가 하신 말씀. 그 때 마흔 여덟이셨다. IMF가 훑고 지나간 1998년, 그는 토목엔지니어링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와서 기억하니 사무칠정도로 안쓰럽다.
대리님과 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았다. 스물아홉의 대리님에게는 구만리 장천이 남아 있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불꽃을 한 번 태울 정도의 기회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애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긴다. 내일 출근하면서는 걱정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처럼 씩씩하게 걸어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