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먹었던 이탈리안 퀴진은 다 장난이다
3층짜리 작은 호텔의 손바닥만한 방에서 온갖 치장을 마친 과년한 두 여자는, 은근히 빗방울 흩뿌리는 날씨에도 성심성의껏 아이라이너까지 장착하고야 말았다. 딱히 뭘 해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두런 두런 수다를 떨며 한 올 더 얹고 한 올 더 얹다보니 어느 덧, 두 여자의 눈은 바닷가에서 나뒹굴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호텔 문을 잠그며 우리는 소리 높여 낄낄거렸던 것 같다. 디너 아웃, 참 설레는 말은 말이었다.
우리가 나눈 얘기는 다 별 얘기 아니었다. 기가막혔던 하루 일정, 특히 끝도 없이 이어지던 돌산과 가히 비포장도로라고 볼 수 밖에 없었던 꼬불꼬불 산길,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해변, 이 좋은 세상에 홀로 버텨야 하는 싱글 인생에 대한 서러움 아주 조금.
돌이켜보니, 뱉으면 끝 없이 증폭될까봐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 진짜 덩어리는 ' 외로움'이었던 것 같다. 외로움, 좋은 곳 와서 좋은 것 구경하다보면 울컥 번지는 지병 같은 것. 나는 시칠리아까지 날아온 그 순간 까지도, 발걸음 뗄 때마다 내 지병을 지긋이 눌러내느라 꽤나 노력했었다.
그 노력을 덜어준 것은 낮과는 완전 다른 매력을 뽐내는 산 비토 로카포의 공기였다. 나즈막한, 해봤자 2층 건물이 소박하게 늘어져있던, 단조롭던 동네는 온 동네 불을 밝혔다. 사람들이 쏟아져나와있었다. 낮부터 좀 부산하던 그 식자재 페스티벌이 어느덧 클라이막스로 다가가고 있는 모양이기도 했거니와, 일단, 조용하고 볼 것 없던 하얀 건물들마다 각자의 매력을 뽐내는 팔색조 레스토랑 거리로 변해있었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성당 앞에서는 공연도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뿐이었다. 우리는 정말 멀리까지 온 모양이었다.
"여기 갈까?"
"저기도 예쁘다."
"가보자!"
우리는 하루 두 탕 바다를 뛰며 바닥난 에너지를 '영혼까지 끌어모아' 온 골목을 휘저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풍경은 따뜻해졌다. 온 정성을 다해 식당 메뉴를 살펴보는 노부부, 이미 와인 두 병은 해치우셨을 것 같은 아저씨 무리들, 뛰는 사람도 없고, 빵빵거리는 차도 없고. 사람, 노천 식당, 오렌지 불빛, 페스티발 조명 장식, 그리고 우리 뿐이었다. 유럽 생활 10년차인 친구는 메뉴를 먼저 봤고, 그저 밖에서 술한잔 하는 게 낙인 나는 자리를 먼저 봤다. 우리 둘을 모두 만족시킨, 구석진 레스토랑 하나가 드디어 나타났다.
일단, 맥주부터 시켰다. 사실 요리는 그렇게 기대 안 했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파스타 먹으러 가자는 말이 잘 안나오는 나이인데, 굳이 현지라고 뭐 그렇게 다를까 싶었다. 게다가 몬델로의 그 식당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다. 이탈리아 현지라고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맥주나 시켜야지 와인은 아까울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긴 달랐다.
정말이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그 새우 파스타의 맛이 떠오르자, 진심으로 다시 먹고 싶다!
'요.알.못'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촉촉한 파스타는 지금껏 먹어온 소면처럼 물에 넣어 불려먹는 '건 파스타'와는 다른 차원의 면일 것이라는 것 정도는 자동적으로 알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식자재는 더 대단했다. '회는 바닷가에서'라고 생각했는데, '회는 물론 모든 해산물 요리는 바닷가에서'라고 정정하겠다. 새우, 오징어, 그리고 문어 였던 세 접시 모두, 재료가 가진 싱싱함 덕분에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나 정말 이거 다 먹고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아, 나 정말 먹고 싶은데, 배, 배가 아프다."
인생은 일견 간단하기도 하다.
끼니 때 맛있는 한 입 먹으면 입가에 웃음이 고이니까.
걸음 걸음 옮길때마다 내 머릿속을 가득채웠던 몇 가지 생각들은, 그야말로 인생파스타였던 새우 파스타 몇 젓가락에, 바닷가 어디에서 만들었다는 것인지 모를 이탈리아 생맥주 몇 잔에 잦아들었다.
퇴근할 때 컴퓨터를 끄고 나오면 돌아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완전 다른 일을 해야 회사 일을 오래 버틸 수 있다고들 한다. 로그아웃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끄지 못한 컴퓨터처럼 몇 가지 생각에 매몰되었었다. 그러던 내가 몬델로 비치에서, 산 비토 로 카포 해변에서 잠깐이나마 내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행복했다. 자정이 되도록 왁자지껄 했던 소박한 동네에서 보낸 밤은 진정한 의미에서 '로그아웃'을 주었다. 행복하고 맛있는 로그아웃이었다. 따뜻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휘저었던 그 소박한 골목들은 오래도록 기억 날 것 같다.
우리는 비장하게 '배멀미 약'을 샀다. 내일의 일정은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처럼, 개인 보트를 빌려 작은 섬으로 나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데렐라처럼 자정을 넘기지 않고 깔깔거리며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