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맛있는 골목의 따뜻한 밤

지금까지 먹었던 이탈리안 퀴진은 다 장난이다

by Nima

3층짜리 작은 호텔의 손바닥만한 방에서 온갖 치장을 마친 과년한 두 여자는, 은근히 빗방울 흩뿌리는 날씨에도 성심성의껏 아이라이너까지 장착하고야 말았다. 딱히 뭘 해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두런 두런 수다를 떨며 한 올 더 얹고 한 올 더 얹다보니 어느 덧, 두 여자의 눈은 바닷가에서 나뒹굴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호텔 문을 잠그며 우리는 소리 높여 낄낄거렸던 것 같다. 디너 아웃, 참 설레는 말은 말이었다.


우리에게 어서 가라던 먹구름 대신 어둠이 깔린 산 비토 로카포의 해변

우리가 나눈 얘기는 다 별 얘기 아니었다. 기가막혔던 하루 일정, 특히 끝도 없이 이어지던 돌산과 가히 비포장도로라고 볼 수 밖에 없었던 꼬불꼬불 산길,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해변, 이 좋은 세상에 홀로 버텨야 하는 싱글 인생에 대한 서러움 아주 조금.


돌이켜보니, 뱉으면 끝 없이 증폭될까봐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 진짜 덩어리는 ' 외로움'이었던 것 같다. 외로움, 좋은 곳 와서 좋은 것 구경하다보면 울컥 번지는 지병 같은 것. 나는 시칠리아까지 날아온 그 순간 까지도, 발걸음 뗄 때마다 내 지병을 지긋이 눌러내느라 꽤나 노력했었다.


그 노력을 덜어준 것은 낮과는 완전 다른 매력을 뽐내는 산 비토 로카포의 공기였다. 나즈막한, 해봤자 2층 건물이 소박하게 늘어져있던, 단조롭던 동네는 온 동네 불을 밝혔다. 사람들이 쏟아져나와있었다. 낮부터 좀 부산하던 그 식자재 페스티벌이 어느덧 클라이막스로 다가가고 있는 모양이기도 했거니와, 일단, 조용하고 볼 것 없던 하얀 건물들마다 각자의 매력을 뽐내는 팔색조 레스토랑 거리로 변해있었다.


유럽 시골이라면 어디든 상상 가능한 작은 골목. 본격 맛집 거리 직전의 골목이라 조용한 모습이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성당 앞에서는 공연도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뿐이었다. 우리는 정말 멀리까지 온 모양이었다.


"여기 갈까?"

"저기도 예쁘다."

"가보자!"


우리는 하루 두 탕 바다를 뛰며 바닥난 에너지를 '영혼까지 끌어모아' 온 골목을 휘저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풍경은 따뜻해졌다. 온 정성을 다해 식당 메뉴를 살펴보는 노부부, 이미 와인 두 병은 해치우셨을 것 같은 아저씨 무리들, 뛰는 사람도 없고, 빵빵거리는 차도 없고. 사람, 노천 식당, 오렌지 불빛, 페스티발 조명 장식, 그리고 우리 뿐이었다. 유럽 생활 10년차인 친구는 메뉴를 먼저 봤고, 그저 밖에서 술한잔 하는 게 낙인 나는 자리를 먼저 봤다. 우리 둘을 모두 만족시킨, 구석진 레스토랑 하나가 드디어 나타났다.


친구와 접시들

일단, 맥주부터 시켰다. 사실 요리는 그렇게 기대 안 했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파스타 먹으러 가자는 말이 잘 안나오는 나이인데, 굳이 현지라고 뭐 그렇게 다를까 싶었다. 게다가 몬델로의 그 식당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다. 이탈리아 현지라고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맥주나 시켜야지 와인은 아까울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긴 달랐다.


정말이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그 새우 파스타의 맛이 떠오르자, 진심으로 다시 먹고 싶다!

'요.알.못'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촉촉한 파스타는 지금껏 먹어온 소면처럼 물에 넣어 불려먹는 '건 파스타'와는 다른 차원의 면일 것이라는 것 정도는 자동적으로 알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식자재는 더 대단했다. '회는 바닷가에서'라고 생각했는데, '회는 물론 모든 해산물 요리는 바닷가에서'라고 정정하겠다. 새우, 오징어, 그리고 문어 였던 세 접시 모두, 재료가 가진 싱싱함 덕분에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나 정말 이거 다 먹고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아, 나 정말 먹고 싶은데, 배, 배가 아프다."


흥에 겨워 돌아다녔던 시골 골목 최대 번화가

인생은 일견 간단하기도 하다.

끼니 때 맛있는 한 입 먹으면 입가에 웃음이 고이니까.


걸음 걸음 옮길때마다 내 머릿속을 가득채웠던 몇 가지 생각들은, 그야말로 인생파스타였던 새우 파스타 몇 젓가락에, 바닷가 어디에서 만들었다는 것인지 모를 이탈리아 생맥주 몇 잔에 잦아들었다.

퇴근할 때 컴퓨터를 끄고 나오면 돌아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완전 다른 일을 해야 회사 일을 오래 버틸 수 있다고들 한다. 로그아웃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끄지 못한 컴퓨터처럼 몇 가지 생각에 매몰되었었다. 그러던 내가 몬델로 비치에서, 산 비토 로 카포 해변에서 잠깐이나마 내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행복했다. 자정이 되도록 왁자지껄 했던 소박한 동네에서 보낸 밤은 진정한 의미에서 '로그아웃'을 주었다. 행복하고 맛있는 로그아웃이었다. 따뜻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휘저었던 그 소박한 골목들은 오래도록 기억 날 것 같다.


우리는 비장하게 '배멀미 약'을 샀다. 내일의 일정은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처럼, 개인 보트를 빌려 작은 섬으로 나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데렐라처럼 자정을 넘기지 않고 깔깔거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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