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삼천포로 빠지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기억에 남는 순간들

by 민보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인스타그램을 보다 우연히 본 문장이었다. 어느 소설책에서 나온 구절이라고 했는데, 정작 그 책은 읽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 한 줄만으로도 충분히 궁금했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도 수없이 들어왔었는데, 정작 삼천포가 어떤 곳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진짜 인생이 거기 있다면, 한번 빠져볼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된 여행이었다. 말하자면 언어유희에 휘말려 떠난, 아주 엉뚱한 출발점이었다.


가족단위 관광객이 대부분인 삼천포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별로 없었다. 겨우 하나를 찾아냈는데, 가정집을 개조한 소박한 공간이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자전거를 빌려 케이블카 선착장으로 향했다. 여행지에서 케이블카 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일찍 삼천포에 도착한 탓에 달리 할 게 없던 나는 별기대감 없이 바다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예상 밖이었다. 푸른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며 섬들을 지나고, 약간 흔들리는 와중에도 나름의 평화를 느꼈다. 배도 아닌데, 또 완전히 공중도 아닌. 어정쩡한 그 ‘떠 있음’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삼천포에 '빠지는' 건가 싶었다.


케이블카는 각산이라는 자그마한 언덕에 나를 내려주었다. 6월 말의 찌는 더위 속에서도 산책로는 물안개를 뿌려 주어 걸을 만했다. 전망대 꼭대기 바닥에 '세상의 중심, 사천'이라는 문구가 큼직하게 박힌 나침반이 있었다. 어깨에 힘이 살짝 들어간 표현이었지만,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욕지도, 사량도, 미륵산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나는 감탄했다.

이런 곳을 부정적인 의미로 부르다니, 은근히 억울하겠다 싶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내려오던 길, '느린 우체통'이 보였다. 6개월 뒤에 도착한다는 안내문을 읽고, 즉흥적으로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미래의 나에게 보낼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막상 펜을 잡으니 미끄러지듯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우체통에 툭, 넣었다.


삼천포의 저녁은 조용했다. 실안낙조가 그렇게 예쁘다더니, 그날은 구름에 반쯤 가려졌고, 관광객은커녕 운동하는 주민들만 한두 명, 근처를 오갔다. 관광지 특유의 부산함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적막한 것도 아닌, 묘하게 중간 지점에 있는 느낌이었다. 해가 진 뒤 숙소로 돌아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데, 린스의 은은한 꽃향기가 기분을 한결 좋게 만들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 지방 버스 배차 간격에 좌절한 나는 전동 킥보드를 빌렸다. 그렇게 코끼리 모양의 바위가 유명한 남일대 해수욕장으로 달렸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해안길은 시원했지만, 해수욕장에 도착하자마자 공사 중이라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쉬웠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고성 상족암 군립공원 목적지를 정하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꼬불꼬불한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다. 정류장에서 30분은 걸어가야 상족암 군립공원이 나왔다. 밑창이 얇은 샌들을 신고 간 탓에 발이 아팠지만, 해식동굴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물때가 맞지 않았다. 무리해서 바위를 건너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곳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바다에 빠지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압도되었다. 그 순간 아름답기만 했던 바다가 갑자기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결국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렸다.


택시를 부르지 않고는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곧장 삼천포항으로 향하는 택시를 불렀다. 여행지에서 만난 실패들을 어서 잊고 싶었다. 삼천포항에 도착해 작은 섬 마을인 마도로 향하는 티켓을 끊었다.

정원 32명의 작은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길, 주민이 내게 물었다. 어디로 가냐고. 내가 ‘마도요’, 대답하자 "거긴 볼 게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괜찮았다. 나는 그저 배를 타고 섬에 가고 싶었을 뿐이니까. 볼 게 없다는 말이 오히려 기대감을 부추겼다.

삼천포에서 배로 20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마도는 선착장 입구부터 마음을 빼앗았다. 잔잔한 초록빛 바다, 각자의 색을 뽐내는 나무들. 사람은 거의 없었고, 슈퍼마켓도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한 바퀴를 천천히 걸었다.


누구도 나를 반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는 이도 없었다.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섬이 나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나도 섬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 무덤덤함이 오히려 편안했다.

돌아오는 길, 삼천포항에 내려 물회를 먹었다. 차가운 국물과 탱탱한 회 한 점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이상하게 오늘 서러웠던 기분들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몸은 금세 시원해졌고, 여행의 마지막은 역시 음식이구나 싶었다. 모든 경험이 한 그릇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삼천포에서 잠시나마 나의 집이 되어준 이곳을. 아쉬운 마음에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살펴보니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담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라디오, 오래된 원목 식탁, 누렇게 색이 변한 밥솥까지… 오래된 물건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샤워를 하다 문득 린스 바닥면이 궁금해졌다. 혹시나 하고 확인해 보니, 유통기한 2022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는 향기에 감탄했던 그 린스가, 오늘은 미심쩍기 짝이 없었다. 갑자기 원효대사의 해골물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향기를 머금고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찜찜하긴 했지만 챙겨간 린스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샤워를 마쳤다.


여행이 끝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언제 바다 내음을 맡았냐는 듯 눅눅한 지하철 향기에 익숙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 퇴근길 무심코 우편함을 열었을 때, 사천시 도장이 찍힌 엽서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6개월 전, 삼천포에서 보낸 편지였다.



몇 년 만에 이런 자유를 느껴보는지!
이번 여행만이라도 자유를 ‘만끽’하길
일상에서 때때로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이번 여행을 생각하며 훌훌 털고 일어나길
오늘보다 더 성장하는 모습이 기대되는 내 모습.

지금처럼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길!
삶은 언제나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알아서 가져다준다는 것을 잊지 말길.

2023.06.23 각산에서


엽서를 읽으니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어쩌면 그 여행은, 결국 나를 위한 작은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계획에 없던 길로 접어드는 용기야말로 진짜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런 길에서 만나는 것들 것 때로는 원래 가려던 목적지보다 더 소중하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러니 때로는, 기꺼이 삼천포로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숙소에 담벼락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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