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뼛속까지 시린 겨울이 필요했다: 춘화처리

by 니모

지난봄, 수선화가 노란 꽃을 예쁘게도 피워냈다.

그러다 꽃이 지고, 날이 더워지자 잎도 고개를 떨궜다.


수선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 시기의 수선화를 보고 죽었다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선화는 남아있는 잎으로 열심히 광합성을 하며 알뿌리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수선화는 다음 봄에 더 예쁘게 꽃을 피우기 위해 구근에 차곡차곡 영양분을 모아 둔다.



영양분만 모아둔다고 끝이 아니다.

수선화가 다음 해에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추운 시기를 견뎌야 한다.

그래서 누렇게 잎이 모두 죽으면 흙 속에 파묻힌 수선화 구근을 캐어 냉장 보관을 한다.

뜨거운 여름이 다가올 무렵, 수선화는 차가운 냉장고 속에서 훗날을 기약한다.

바로 추식 구근의 춘화처리이다.


냉장고 속에서 여름을 난 후, 가을에 다시 흙 속에 심겨 진짜 겨울을 보낸다.

수선화에게 겨울이 없으면 봄이 되어도 꽃대를 올리지 못하거나 아주 빈약한 꽃을 피운다.

시리도록 추운 날들을 보내고, 따뜻한 봄을 맞이해야 모아둔 영양분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


꽃이 진 뒤의 못난이 시절을 잘 보내고, 한겨울 추위를 잘 이겨낸 수선화는

작년보다 더 크고 예쁜 꽃을 피운다.




나에게도 겨울이 있었다. 뼛속까지 시린 겨울.


그땐 그 겨울이 너무나 춥고 힘겨웠다.

남들은 다 꽃 피우고, 나비랑 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멋진 열매도 맺는데,

왜 나만 다 얼어붙은 겨울인 건가 원망스럽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아주 가끔 힘이 반짝 날 때면 새싹을 틔어봤지만 이내 얼어붙고 말았다.

나의 겨울은 시리고, 어둡고, 갑갑했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던 겨울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다.


아직 꽃을 피우진 못했지만, 봄이 오면 나도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그동안 내게는 겨울이 없었다.

그러니 영양분을 모을 새 없이 계속 싹을 내고, 꽃을 피우다가 지쳐버렸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을 겪어낸 지금의 나는 차곡차곡 영양분을 쌓으며 뿌리를 키워간다.

강한 추위를 견뎌가며 나는 더 튼튼해졌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내 삶을 산다.




나에겐 뼛속까지 시린 겨울이 필요했다.


남들의 기대와 남들의 눈치 속에서 벗어나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고,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쉼 없이 꽃을 피워내는 것이 아니라, 다음 꽃을 피우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들보다 더 빨리 꽃을 피우기 위해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많은 꽃을 피우기 위해 나를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는 시간, 나를 채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불안하지 않다. 초초하지 않다.

나는 지금 겨울을 보낸 거고, 이제 곧 봄이 오면 그동안의 모아둔 에너지를 나의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을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