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이상한 '청춘' 사용법.
영화 <싱 스트리트>(201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음악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음악으로 반영되는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캐릭터를 설명할 때, 갈등을 표현할 때, 감정 정리할 때와 같이 중요한 부분마다 음악이 사용되어, 항상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별 볼일 없는 뻔한 스토리와 허술한 캐릭터 구성이 음악 뒤에 숨어버린다는 점이 별로 달갑진 않다. 음악 영화를 보고 나면 귀는 즐겁지만 영화 자체는 금방 휘발되고 만다.
존카니 감독의 신작, <싱스트리트>도 흔해빠진 청소년의 성장 이야기에 음악만 더해졌을 뿐이다. 음악과 청춘 두 단어만 들어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그대로 영화는 흘러간다. 음악을 접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주인공 코너. 그의 음악은 꿈과 희망, 청춘과 열정,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영화는 ‘도전정신’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전체적인 전개를 무시하고 원하는 장면만 조립하여 보여준다. 이야기 속 거의 모든 갈등도 소년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는 요소에 불과할 뿐이다.
인물들 대부분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소모된다. 주인공 코너는 그나마 비중이 커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코너의 전체적인 이야기 맥락이나 감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인공 이외 등장인물들은 오로지 코너를 위해 희생된 캐릭터들이거나 배경으로만 나타난다. 악기 마스터에, 작곡 능력자지만 계속 토끼만 찾는 에이먼, 대사 몇 마디 없이 담배만 피우다가 악기만 연주하는 베이스랑 드럼 담당자, 그리고 등장할 때마다 꿈이 없다며 핍박받는 여동생까지. 이렇듯, 영화는 코너 외 모든 캐릭터에게 불친절하다.
이야기 속 나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그나마 비중이 컸었던 형, 브렌든도 마찬가지로 불친절하게 소개된다. 브렌든은 코너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때마다 채찍질하며 계속 꿈을 위해 노력하라 한다. 그리고 음악적 지식도 풍부해 코너의 좋은 멘토가 된다. 하지만 그는 막상 자신의 음악적 꿈을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접은 백수다. 마지막에 코너에게 자신이 작사한 곡을 전해줄 정도로 아직 음악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지만 막상 그는 꿈을 향해 도전하지 않는다. 코너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상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왜 도전하지 않는 것일까? 이미 자신에게 왔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일까? 결국, 도전과 청춘은 성장기 청소년의 전유물인 것일까?
상징적인 여성 인물인 라피나는 가장 불성실하게 그려지고 코너를 위해 일방적으로 소비된 캐릭터다. 라피나는 코너가 한눈에 반해 밴드를 결성할 만큼 매력적이다. 또한 자신의 꿈도 확고하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런던으로 갔기 위해도 남자 친구의 도움이 필요했고, 런던에 가서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은 상처도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코너의 위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런던으로 떠날 때도 또다시 코너의 손을 잡고 도전한다. 결국, 라피나는 코너의 성장에 필요했던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인물이다. 청춘 영화이지만 소년의 꿈만 응원되고 소녀의 꿈은 소년을 위해 소비되었다.
청춘 영화, 심지어 흔해빠진 청춘영화이지만, 주인공만 청춘이다. 코너만 스스로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하고 있다. 주인공의 도전과 청춘에서 감동을 받아 고개를 끄덕이기엔 다른 인물들이 너무 허술하다. 주인공 한명만 청춘이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인물이 청춘이진 못해도 주변 인물들이 청춘에 역행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특히 주인공 청춘에 영향을 준다면 더더욱. 감독은 청춘을 너무 이기적으로 사용했다.
감독에게 청춘이란 무엇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