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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Oct 30. 2022

5. 이혼이 어때서

아이는 한달이 멀다 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 했었고 입원하지 않는 기간에는 친정집에 와 있었다. 어느 순간도 도와 주지 않는 남편과 있기엔 내 몸이 너무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아이도 나도 다 죽을 것 만 같아서 친정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친정에 있었다. 아이가 두 살이 되던 해였던가. 남편과 크게 다투고 이혼을 하자고 했다. 그때 나는 친정에 있었고 남편은 친정에 들렀다 대구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화가 난 남편은 이혼을 하자고 했다. 그러더니 몇 시간 뒤에는 잘 못 했다며 무릎 꿇으라고 하면 그러겠다고 자기가 잘 못 했으니 이혼은 아니라고 했다.


분명 그 순간의 말 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연애 기간에도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 무릎 꿇으며 자기가 잘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때 역시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때는 화해를 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내 마음속에는 이혼을 담고 있었지만 그날은 나 역시도 다투다 많이 화가 난 상태였으니말이다. 적어도 그렇게 이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간격을 점 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도와 주는 이 하나 없이 혼자 오롯이 해야 하는 그 상황에 내가 몸도 마음도 지쳐 친정에 있었지만, 남편은 오히려 니가 친정에 가 있었으니 그런거 아니냐며 오히려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 가시고 계시지 않는다. 시누이도 나보다 3개월 먼저 둘째를 출산한 상황이었기에 나와 우리 아이를 들여다 봐 줄 상황이 아니였다. 우리 부모님 역시 대구가 아닌 지역에 계셨고, 농장을 하고 계셔서 하루도 집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셨다. 그럼에도 몸조리도 못 한 채 간호중인 딸을 위해 간단한 과일이며 먹을 것들을 싸서 가져다 주곤 하셨다. 


아이가 토하고 나면 아이를 닦이고 옷을 갈아 입히고 시트를 갈고 그런 후에야 토한 분유로 온통 뒤범벅인 내 옷을 갈아 입을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아이를 안고 2~3개의 기계장치가 달린 링거대를 밀고 복도를 하염없이 걷고 침대를 오르락 내리락 하루에도 끝이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 상황에 보호자 침대에 눕지도 못 한 채 아이옆에 쪼그리고 웅크린채 잠들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또 한차례 폭풍 같은 순간이 지나고 토한 분유로 엉망인 옷을 갈아 입고 침대 끝에 걸터 앉았을 때 어두워진 창밖이 보였다. 그리고는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터졌다. 그때 왜 눈물이 쏟아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혼자 이 모든 순간을 버텨내고 있는 고단함과 서러움이 아니였을까. 그 병실은 100일 미만의 입원환자 아이들이 들어온다. 대부분 고열로 뇌수막염이 의심되어 들어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00일 미만의 아이들이 들어 오다 보니 보호자인 산모들도 몸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보호자인 엄마가 직접 아이들을 돌보기 보다 늘 남편이 혹은 부모님이 늘 곁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달을 내내 병원에 있으며 오로지 엄마 혼자 아이를 간호 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혼자 해야 하고, 혼자 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서러움이 아니었을까. 늦은 새벽 터져 나온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커튼이 쳐진 침대 안에서 소리도 내지 못 한 채 혼자 한없이 울고 있었다. 그러다 간호사선생님이 오셨었다. 계속 나를 봐 오셨었기에 그분도 내 마음이 이해가 되셨던 걸까.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그냥 안아 주셨었다. 나보다 꽤 나이가 많아 보이시는 분이셨었는데, 마치 엄마가 날 위로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며 나는 다시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픈 아이에게 전전긍긍하며 지내던 때 아이의 발달장애를 알게 되었고, 남편과의 트러블도 많아졌다. 겉보기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내가 유난 떤다며 적당히 하라는 남편이었다. 


결혼 전부터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었다. 남편이 신용불량 상태였고 채무가 있었다. 결혼 후 그 채무관련으로 스트레스 받기가 싫어 내가 대출을 내어 채무변제를 하고 신랑의 신용불량도 해제 시킨 상태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빨리 찾아온 아이로 인해 직장을 빨리 그만 두게 되어 역으로 내가 채무가 쌓이게 되었다. 남편쪽에서는 도와줄 부모님도 없었기에 모든 준비를 내 카드로 결혼 준비를 했고 결국 한계가 왔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회생에 들어가게 되었다. 5년이라는 시간의 회생이 아이를 출산하기 한달전에 확정 되었었다. 더군다나 자주 아파 병원비도 많이 들었었다. 아이가 4살때 남편이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퇴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미 회사에 통보를 했고 퇴사 일자도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황당했다. 적어도 그런 큰 일을 나에게 상의는 커녕 통보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계획과 다르게 사업은 시작 되지 않았다. 예정 했던 기간보다 결국 반년이나 지나 사업이 시작 되었었고, 우리는 그 기간동안 미친 듯이 싸웠었다. 평소 아무리 싸우더라도 내가 소리를 지르거나 막말을 하지는 않는데 그때는 할 수 있는 막말은 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그때에는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었다. 남편의 사업이 시작 되고 준비 기간에 들어가며 새벽에 들어 오는건 기본 이었고 외박은 옵션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반년이라는 시간동안 돈 문제로 참 많이 싸웠었다. 무엇보다 회생비가 계속 나가야 했고, 생활비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편은 다른 사람에데 돈 10원도 빌려 달라고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카드값은 또 쌓여가고 대출만 다시 늘어 날 뿐이었다. 정말 이 사람과 살다가는 우리가 다 죽어 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남편으로서의 신뢰도 아빠로서의 역할도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사람이었다. 그 시간들이 쌓이니 나는 점점 남편을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어쩌다 집에 일찍 오면 본인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아 버렸다. 오랜만에 아빠의 모습을 보고 반가운 아들은 닫히 문 앞에서 물끄러미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몇 차례 본 이후로는 도저히 이 사람과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계속 무시 당한다는 것에 화가 났던 남편은 내가 없던 낮에 짐을 챙겨 나가 버렸다. 말로는 잠시 별거를 하자 였지만, 난 그게 이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혼이라는 건 두렵다. 이혼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발생하게 될 경제적 상황들, 그리고 주위의 시선들. 그리고 마주하게 될 모든 상황들이 두렵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삭막한 공기와 모든 정이 다 떨어지고 상처뿐인 상황에서 쇼윈도 부부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 부부사이 문제를 고민을 하면 “다들 그렇게 살아”, 라는 말을 한다. 다들 그러고 참고 산다고, 처음 연애 할때야 좋았지 살다 보면 그렇게 싸우고 부딪히며 그렇게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짐을 챙겨 나가며 별거라고 말 했던 남편 입에서 ‘이혼하자’라는 말이 나오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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