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태어났던 그 해 엄청난 화제를 모으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당시 쌍둥이가 출연 중이었는데 그 아이들도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했었다. 우리아이도 미숙아로 태어났다. 하지만 너무도 건겅한 그 아이들을 보며 부럽기도 했고, 내심 속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툴지만 아이들과 교감하고 함께 하려는 아빠들의 노력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볼 수록 내 모습이 너무도 비교 되면서 마음이 더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우리집에는 슈퍼맨 아빠는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출산 했던 그 때에도, 아이가 아파 입원 했을 때에도, 그리고 일상속에서도 말읻.
내가 출산 했던 그때에도 남편은 친구들을 만나기 바빴다. 그리고 아이가 한달동안 입원 해 있던 그때도 단 한번도 병원에서 밤을 새고 잔 적이 없었다. 본인 주장으로는 코골이가 심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가 입원해 병원에 있을 때면 매일을 술 약속을 잡고 사람들을 만나기 바쁜 사람이었다. 그저 본인이 늘 먼저인 사람이었다.
미숙아였고, 태어나 수술도 2번이나 했고, 항바이러스제까지 한달이나 투여받은 아이다. 당연히 건강이 좋지 않았다. 바이러스로 입원중일 때 담당선생님께서 이 아이는 유치원까지도 보내지 말고 초등학교를 보내는게 좋을 꺼라고 했다. 면역결핍자라고 했다. 수치로 정해 면역결핍자라고 등록하는 수치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했다. 그래서 병원에 비치된 젖병 소독기가 있었음에도 우리아니는 따로 개인 소독기를 구비하라고 했었다. 그만큼 다른 아이들에 의해 감염 우려가 심한 아이라고 했다. 평생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희귀난치성 바이러스 국가특례가 등록되었다. 평생 바이러스를 보균하며 언제 아플지 모를 상황을 대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온 신경은 아이에게 집중 될 수 밖에 없었다. 의사들은 늘 최악의 상황들을 다 이야기 한다. 그 이유는 만약에 하나 그런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히 드물긴 하지만 100% 아니라고 할 수 없기에 늘 그 경우까지 이야기 한다. 나는 그 최악의 상황을 한 두 번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뱃속에 있을때부터,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와 나의 목숨을 걸고 동의 사인을 해야 했고, 수술실에 들어 갈 때 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동의 사인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한달이라는 시간을 입원을 해 있다보니 질병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선생님과 간호사선생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된다.
이미 내 눈으로 보고 있기에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상황들 말이다.
한달을 입원 하기 위해 아이의 가슴에 다시 관을 꽂아야 했다. 15분이면 간단하게 끝나는 시술 같은 거라고 했다. 그럼에도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60일도 채 되지 않은 영아이다 보니 이동식 침대에 눕혀 수술실로 이동 후 보호자인 내가 수술복을 입고 아이를 수술대에 눕히라고 했다. 15분이면 끝난다고 했는데 2시간이 되어도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 수술실 앞에 쪼그리고 울고 있을 때 담당선생님께서 아이가 마취가 깨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중환자실로 급히 옮긴다고 했다.
아기들은 입으로 숨을 쉴 줄 모른다고 한다.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났다 보니 기관지와 성대쪽에 이상이 있었는데 코가 막힌 상태 였고, 마취를 깨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을 쉬지 못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때 역시 나 혼자였다. 의식이 없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한 없이 울 수 밖에 없었고, 그때도 달려와준 사람은 우리 부모님뿐이었다.
남편은 항상 내가 유난 떤다고만 했다. 아이 면역으로 인해 특히 청결에 예민을 떠는 나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항상 내가 과하고 내가 아이를 망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한번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설거지라도 시킬 때면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다시 할꺼니까 하지 않는 거라는 핑계였고, 아이 목욕이라도 시켜 달라 하면 해본 적 없어서 못 한다며 빼기 일 쑤였다. 아이와 놀아 주라고 하면 어떻게 놀아 주어야 하는 거냐며 아이를 물끄러미 그냥 옆에 둘 뿐이었다. 그래, 비단 이런 모습이 우리집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예능 프로그램이 반영된 이후로 아빠들의 모습이 많이 바뀌고 있는 추세였다. 키즈카페에 가면 주말엔 엄마 없이 아빠와 오는 아이들이 많았고, 아빠들의 육아 참여도가 많아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저녁에 엄마들끼리 모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늘 예외였다. 남편이 집에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늘 무언가의 이유로 슈퍼맨 아빠는 우리집엔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이가 3살 때 까지 20번이 넘는 입원을 했다. 1인실에 입원을 했을 때 조차 남편은 병원에서 같이 밤을 보내준적 없다. 아이가 5살때 이혼을 할 때까지도 남편은 아이 목욕을 시켜 본적도 없었다. 주말엔 본인 취미인 낚시를 하러 다닐 지언정 나와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가 준 적도 없었다. 아이가 갑자기 아파 입원을 할 때에도 회사에 얘기하고 잠시 와 주면 안 되냐는 말에 남편의 대답은 그런말을 회사에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회사에 말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에겐 회사에 말을 해보겠다고 하고 안 된다고 이야기 해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 남편은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내며 일하는 중에 아이 아프다고 어떻게 조퇴를 하냐며 소리 쳤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수많은 입원과 퇴원을 나 혼자서 했다. 아픈 아이를 들쳐 업고 택시를 타고 입원을 시켜고, 택시를 타고 퇴원을 하기도 했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지하철을 타고 퇴원을 했던 적도 있었다.
여러 번 아이를 입원 시키다 보면 아이의 증상에 따라 이건 무조건 입원이다 하고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병원에 가기 전에 미리 캐링어를 챙겨두고 당장 몇시간 동안 필요한 것들말 가방에 챙겨 병원으로 간다. 그리고 진료후 입원이 결정 되며 가지고 온 간단한 짐으로 몇 시간을 보내고 남편이 퇴근 하면 캐리어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항상 모든 상황과 모든 순간에 철저하게 혼자 였다. 어쩌면 나 조차도 남편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미 아이가 60일도 되기 전에 내가 이혼을 맘 먹었으니 말이다. 우리 가족은 셋이 아닌 항상 둘 뿐이었다.
아이가 4살 때 발달지연 판정을 받았다. 담당선생님이 남편에게 아이 상황을 설명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유난 떠는거라 했다.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를 내가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24시간 아이와 붙어 있는 내가 맞을까. 아이와 1시간도 채 같이 있어 주지 않는 남편이 맞을까. 그렇게 남편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유별난 엄마, 극성 엄마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