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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Oct 30. 2022

3. 한마디 말의 파장


사람들은 저마다 어떠한 상황속에 듣고 싶은 말들이 있다.

가장 흔하게 “수고했어”, “괜찮아”, “애썼어” 그런 말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이 필요한 그 상황들에 그런 위로의 말들이나 응원의 말을 들어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남들도 하는데 넌 왜 유난 떨려고 하니 같은 식으로 그 말들을 들어 본적이 없었다. 


3일간의 통증과 슬픔과 아픔속에 아이는 세상에 나왔고, 마취에서 깬 후 남편에게 들었던 첫마디는 “제왕절개 하니까 편하지? 둘째 낳아야지” 였다.

그게 3일을 고생한 아내한테 할 소리인가. 적어도 고생했다라는, 수고했다라는 말 한마디는 있어야 했지 않을까. 그 당연한 말을 나는 남편과 사는 동안 들어 본적이 없다. 물론 표현에 서툴다는 핑계가 있겠지만, 그건 표현이 서툰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남편은 정작 해야 하는 말들을 한 적이 없었다. 


임신 중 아이가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나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상의도 한 번 없었다. 퇴근 후 나에게 하루 잘 보냈냐고, 힘들진 않았냐고, 어떻게 하루 보냈냐는 안부도 없었다. 퇴근 후 남편은 컴퓨터앞에 앉아 게임 삼매경이었다. 나에겐 보여준 적 없는 한없이 즐거운 얼굴과 웃음들을 함께 하는 게임친구들과 나눌 뿐이었다. 


원래 우리는 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돈을 좀 더 벌어야 하지 않겠냐며 울산에서 중공업쪽에서 근무하고 있던 오빠가 일자리를 소개 시켜주어 급하게 이사를 갔던 것이다. 그때 남편은 울산에 가는 걸 싫어했다. 낯선 도시로 가는 것도 싫었고 동생과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살기도 싫다고 했었다. 동생네는 이미 우리보다 더 일찍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아이도 둘이나 있는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동생과 돈독하고 사이가 좋은남매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저 울산에 가기 싫다는 어필을 나에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구에서는 변변하게 하는 일이 없었기에 남편은 선택지가 없었다. 


그랬던 사람이 대구에 오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3일을 분만실에서 하혈을 하고 진통을 했다 보니 내 몸 어딘가 안 좋았었던 모양이다. 아이를 출산하고 병실에 온 상태였었는데 이불은커녕 얼음팩을 끼워 놓은게 아닌가. 내가 엄청난 고열 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그런 아내를 두고 그동안 만나지 못 한 친구들을 만난다며 병실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코를 많이 곤다는 핑계로 병실에서 같이 잠을 잔 적도 하루도 없었다. 수술 후 소변줄을 빼고 나면 일정 시간 안에 소변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억지로 화장실을 가려 일어섰다가 현기증으로 넘어지려 한 걸 옆 침대의 보호자가 부축해주기 까지 했었다. 


여자들은 특히 임신중에 그리고 출산후에 서러웠던 것들은 평생을 간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임신 중 아팠던 아이에 대한 무관심, 나에 대한 무관심들, 출산 후에도 자기밖에 모르던 남편에게 나의 분노와 감정은 차곡 차곡 쌓여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첫날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왕절개를 하더라도 다음날이면 보통 활동을 할 수 있다는데 나는 그 다음날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남편에게 들었던 말은 엄살이 심하다는 얘기들이었다. 내가 분만실에서 어땠는지, 수술에 들어가기 전의 상황은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그저 다른 사람들 다 아이 면회 가고 움직이는데 나는 꼼짝도 못 한다고 엄살을 부린다고 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때 나는 감염증상이 있었고, 고열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결국 제왕절개 한 부위가 곪아 터져서 재수술이 필요한 정도의 몸이었다. 


그래서 결국 3일째 되는날 나는 우리아이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고, 그날은 아이가 장장 6시간의 대 수술을 받은 마취에서 다 깨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이 아이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 아이를 키워 낼 수 있는 사람일까 겁이 났다. 


아이의 증상은 소장이 두 개로 절단 되어 태어난 상황이었다. 장의 길이가 일정한 기준치 보다 짧으면 수술을 하더라도 7살까지도 살지 못 한다고 했다. 그래서 복강경으로 그 길이를 확인하기 위한 수술에 들어갔다가 절단된 소장을 이어주는 수술까지 함께 한 상태였다. 그리고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장과 위가 활동을 하지 못 했 위에 액이 고여 있는 상태였다. 입에 연결된 호수로 고인 썩은 위액이 다 빠져 나와야 섭취가 가능한 상태라 아이는 기약없는 금식을 해야 했고, 황달 증상으로 눈도 가려져 있었다. 입원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라 아이는 가슴에 링거관을 꽂아야만 했다. 수술 후 아이는 1.93kg까지 체중이 줄었고 앙상한 몸에 기저귀는 너무 커 테잎으로 붙여 놓은 상태였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우리아이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한 없이 눈물이 날뿐이다. 그렇게 힘들게 수술을 하고 나왔는데 4일 후 아이는 또 다시 수술실에 들어 가야 했다. 심장에 있는 동맥관이 닫히지 않아 피가 폐로 역류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태어나 1주일만에 2번의 수술을 마치고 기약없는 기다림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그 상황들에서도 남편은 나에게 힘내라는 말도 잘 이겨내자는 다독임도 그 어떤 말도 제스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친정집에서 잠시 있기로 하고 남편은 울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출근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결근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이러다가는 정말 우리가족 다 망할 것 같아 대구로 다시 돌아 오기로 했다. 아이의 상태가 언제 호전이 될 지도 알 수 없었으며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혼자 울산에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남편은 다시 대구로 돌아왔고 그럼에도 아이의 면회는 간적이 없었다. 직장생활로 갈 시간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사람은 그저 혼자 즐기는게 더 좋았던 것 같다. 


입원 중 많은 고비가 있었다. 더 이상 위액이 빠지지 않고 위가 움직이지 않으면 위를 반을 잘라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지고 몇 일 있지 않아 기적처럼 아이의 위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가슴에 꽂힌 관을 한달후에 제거를 하는데 워낙 오랜시간을 꽂고 있다 보니 패혈증이 올 수 있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패혈증도 왔다. 그러나 병원에서 미리 예상했던 상황들이었고 잘 지켜봐 주고 계셨기에 아이는 가장 독한 항생제를 쓰고도 다행히 패혈증도 이겨내 주었다. 


그렇게 생후 43일이 되던날 너무도 작아 안아보는 것 조차 두려울 만큼 작은 몸으로 2.25kg으로 아이는 퇴원을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때부터 였다. 

퇴원후 3일만에 아이는 노로바이러스로 입원을 했다. 장 수술을 했으니 장이 약한건 당연할 터. 그렇게 1주일의 시간을 또 다시 병원에 있다가 집에 돌아 온 후 3일 뒤 아이는 또 다시 입원을 했다. 


먹기만 하면 분수처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깔이 뭔가 이상했다. 초록빛을 띄는게 아닌가. 바로 병원으로 달려 갔다. 증상을 들으시더니 ‘거대세포바이러스’ 증상과 같다며 일단 검사를 하자는게 아니신가. 검사 결과는 빗나가지 않았다. 다시 입원이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의미없는 선택지를 주셨다. 이 바이러스가 희귀난치성이라 치료약이 비싸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았기에 산모 건강 역시 생각해야 하니 집에서 치료를 할 경우를 먼저 말씀해 주셨다. 하루에 알약 하나를 갈아서 분유에 태워서 먹이든 물에 태워서 먹이든 어떻게든 하루에 1개만 먹이면 된다고 했다. 근데, 이게 보험처리가 되지 않는단다. 알약 하나가 백만원을 한단다. 이걸 한달을 먹여야 한단다. 그런데 입원 할 경우 중환자실에 있었던 때처럼 가슴에 관을 꽂고 한달간 항바이러스제를 투여 하게 된다고 한다. 인큐베이터에서 이미 한번 나온 상태라 다시 인큐베이터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한다. 다른 아기들의 감염우려에서 말이다. 그래서 100일미만의 아이들만 들어오는 병실에서 한달간 간호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 선택지는 무의미 했다. 당연히 병원 입원이었다. 금액 부담도 당연히 있었지만, 무엇보다 위급 상황이 발생 할 때 빠르게 대처 할 수 있는건 병원에 있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한달로 예정된 입원이 시작 되었다. 이전 입원에서 체험했 듯 어린 아이가 있는 다인실 병실에서 아이가 우는 것은 그렇게 눈치가 보일 수가 없다. 아이가 일부러 우는 것은 아니지만, 100일 미만의 아기들이고 하나가 울면 따라서 운다. 그리고 보호자인 산모들도 몸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기에 아이가 계속 해서 울게 둘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전 노로바이러스로 입원 했을 때에도 아이가 울면 항상 아이를 안고 링거대를 밀며 병원 복도를 한 없이 걸어야 했다. 


이번에 아이 증상은 먹기만 하면 다 토하는 증상이었다. 토하고 나면 보통 4시간~6시간 정도 금식을 해야한다. 토하면서 전해질이 같이 빠져 나오기 때문에 횟수가 많을 경우 쇼크가 온 다는 것이다. 아이는 배고파서 분유를 먹고,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바로 다 토해냈다. 그러면 바로 금식이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도 한달 넘게 금식을 했던 아이다. 얼마나 먹고 싶겠는가. 그런 욕구만큼 아이의 울음소리는 커져갔다. 그러면 나는 한 없이 병원 복도를 서성여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미리 도움을 청했었다. 하루종일 앉지도 못 하고 계속 복도에 있으니 퇴근해서 바로 좀 와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연락이 없다. 퇴근 시간이 지나 연락을 했더니 잔업을 한단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새벽 1시가 넘어 연락이 되었다. 뭔가 다른 느낌에 추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잔업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술을 마시고 있는게 아닌가. 


이게 말이 되는가. 자기 자식과 마누라는 병원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 하고 1분 1초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본인은 옆사람과 희희닥 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다.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간 임신중에, 그리고 출산 후에 그간 쌓였던 감정이 폭발했다. 당장 와서 아이를 보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나에게 한마디의 대답이 돌아왔다. 


“ 지금 이 상태로 가서 아이 떨어뜨려 죽여도 상관없지?”


너무 화나고 어이없고 당황스러워 당장 오라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결국 남편은 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날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이 아직도 소름끼치게 기억난다. 

그 새벽의 병원 복도의 공기도, 그 사람의 목소리도, 그때의 나의 분노도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다. 

 이 인간이랑은 무조건 이혼한다..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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