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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Oct 30. 2022

2. 널 지킬 수 있을까.


우리 부부에게 새생명은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상견례를 2월달에 했으나 결혼식 날짜는 10월말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8월에 혼인신고를 먼저 했었다. 


결혼 전 직장생활에서 업무 특성상 감정노동을 하는 일이었던 터라 스트레스가 엄청 났었다. 원래도 자궁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스트레스로 자궁이 더욱 더 안 좋아졌고 자궁내막증으로 수술을 했었으나 증상은 계속 지속 되었었다. 

3개월 내내 생리를 한다거나 3개월 내내 생리를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또 다시 수술을 하기에는 불임 가능성이 너무 커진다며 약으로 조절 하자고 했었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몇 년간 약을 복용 했었다. 그래서 산전검사에서 이제는 약을 끊자고 그래도 6개월 정도 이상은 지나야 임신이 가능 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약을 끊은 후 다음달에 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예상하지 않은 시기에 우리에게 새생명은 너무도 빨리 찾아와 버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명이었지만, 그래도 설레임과 행복으로 가득 할 것 같았던 그 시간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걱정을 바뀌었다. 


자궁에 피가 고여 있다는게 아닌가, 그러니 유산 위험이 너무 크다고, 화장실 가는 것 조차 조심하라는게 의사선생님의 당부였다. 

그래, 조심하면 되지. 아이만 무사하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3개월쯤 되었을까 다행히 자궁에 고여 있던 피는 사라졌고, 평균 주수보다 키도 몸무게도 앞서고 있다며 잘 자라주고 있다고 했다. 이제 조심씩 활동도 하면서 보통 임산부들처럼 지내면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불과 얼마되지 않아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사실을 접해야 했다. 


임신 20주정도 쯤이었던가, 정밀초음파를 하게 되었다. 근데 검사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시간을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체감상 30분가량 이상 검사를 했던 것 같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른 선생님을 호출하는게 아니가. 그리고는 다시 또 검사가 이어졌다. 

그러더니 검사 결과는 담당선생님께 설명 들으면 된다는 거다. 그리고 담당선생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를 하고 내 이름이 호명 된 후 진료실에 들어갔다. 모니터를 한참을 바라보고 계시던 선생님께서 꺼내신 말씀은 아기의 장이 좀 많이 부풀어 있다고 했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으니 다음주에 다시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 1주일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그날은 입체초음파 검사가 있던 날이었다. 지난주 이상소견이 나왔던 장에 대한 검사를 하고 아이의 얼굴을 보려 애썼다. 그러나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1시간 가량의 시간을 검사를 하고 어렵게 아이의 얼굴을 접 할 수 있었다. 그 신기함과 반가움과 설레임 보다 나는 검사결과에 대해 더 걱정이 되었고 긴장이 되었다. 

왜 슬픈 예감은 단 한번도 비켜가지 않는 걸까. 


당시 우리는 울산에 살고 있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대구가 편한지, 부산이 편한지 물으셨다. 왜 그러냐고 여쭈니 대학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아야겠다고 하셨다. 정확한 사유는 알수 없으나 지난주 보였던 장보다 더 부풀어 있으며, 이번주에는 위장도 부풀어 있는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정말 말 그래도로 하늘이 무너졌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병원에서 나오자 마자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그때도 지금도 내 주변에는 임신 중 질환을 겪은 사람도, 아이가 아프게 태어난 경우도 없으니 어디 조언을 구 할 곳이라고는 인터넷 검색 뿐이었다. 

친정오빠 지인이 대학병원에 계셔서 조언을 구하고 우선 초음파 검사를 다시 받기로 했다. 그날도 1시간 가량 검사를 했던 것 같다. 

당시 검사를 하셨던 선생님의 결론은 다운증후군일 확률 80%이상이며 아이의 장이 협착이 되었거나 꼬였거나 이상소견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말인가…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남편도 나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남편은 친정오빠를 만나고 왔고, 나에게는 이렇다 저렇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늦은 새벽 친정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나에게 한마디 한마디 말을 이어갔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키우기도 힘들뿐 더러 그걸 평생 감당하고 살아가기 힘들것이라고 아이를 포기하는 건 어떻냐고 말이다. 가족 중 그 누구도 나에게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오빠가 총대를 메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난 그저 우는 것 외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얼굴도 보았는데, 내 뱃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아이를 어떻게 포기 한단 말인가. 


대구의 산부인과 고위험군 담당선생님에게 다시 진료를 받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엔 뜻밖의 명쾌한 답변을 해 주시는게 아닌가. 아이가 장쪽 관련으로 이상소견이 보이니 아이는 태어나면 바로 수술을 해야 하고, 나는 조산 할 위험성이 너무 크다며 조산방지 약을 잘 먹고 몸 관리 잘하라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다운증후군에 관한 질문을 했더니 웃으시며 전혀 그럴 확률은 없다고 하셨다. 다운증후군의 아이들은 특정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고 팔과 다리가 상대적으로 짧다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아이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아픈 아이를 생각하면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매일을 뜬 눈으로 지새며 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아이가 장의 문제로 양수를 섭취 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양수과다증을 겪고 있었고, 그 많은 양수속에 아이가 있다보니 나는 태동도 느껴본적이 없다. 그래서 늘 아이가 안전한지 잘 자라고 있는지 매일 근심 걱정 뿐이었다. 


그러다 35주가 되던날, 정기검진을 다녀왔고, 다행히 잘 자라주고 있다고 조산 할 경우 산모 출혈이 심할 꺼라며 특히 조심하라고 했었다. 양수가 많으니 수분이 많은 음식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진료를 잘 마치고 그날 밤 양수가 터져 버렸다. 


울산에서부터 대구까지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으로 왔다. 그렇게 상황이 급변 할꺼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 했다. 간단하게 소지품만 챙기고 왔는데 나는 바로 분만실로 들어가야 했다. 

이미 양수는 터진 상태였는데 그날이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은 당직선생님들이 계신 상태였으며 특히 중요한 아이 몸무게가 2kg이 되지 않았다. 마취 후 안정적인 몸무게가 2kg이기 때문에 최대한 아이를 더 키워서 월요일에 출산을 하자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진통억제제를 맞으며 엄청난 하혈을 3일동안 계속 하며 분만실에서 버텼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또 위급상황으로 변했다. 

월요일 아침 8시에 수술예정이었으나 전날 저녁 7시부터 진통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새벽 5시쯤 부터는 아기의 맥박도 급상승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자궁이 80% 열린 상태였다. 3일을 분만실에 있으며 하혈과 진통을 하고 12시간에 가까운 진통을 하고 자궁이 80%가 열렸음에도 아이의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해 나는 6시에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아이가 위험 할 수 있다는 고지를 듣고 동의를 하고 그렇게 나는 어느 누구도 곁에 없는 상태에서 혼자 급하게 수술실로 옮겨졌다. 


그렇게 우리아이는 35주 4일만에 2.26kg으로 세상에 나와 엄마품에 한번 안겨보지도 못 한 채 “축하해”라는 말 보다 “아이는 괜찮아?”라는 말을 듣게 한 채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인 아이는 엄마의 눈물속에 주위사람들의 걱정과 안타까움속에 이 세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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