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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20. 2021

외로움 방지

1일 1드로잉, 휴대용 청소기

#126일차

*2021.11.19. 10분 글쓰기*

언니, 언니들


딸 넷에 아들 하나, 넷째 딸인 나는 피를 나눈 언니가 셋이다. 부모님은 함께 일터에 나가셔서 저녁부터 다음 날 이른 아침까지 우리 다섯 남매만 집에 남았다. 어떻게 어린 자식들만 놔두고 나갔을까 겁도 없었다며 엄마는 그 시절을 회상하면 질색하곤 했다. 위아래로 내복만 입은 우리끼리 밥 차려먹고 시시덕거리며 티브이 보는 평범한 일을 해도 어른 없이 우리끼리만 있어서 자유롭고 설렜는데 말이다.


저녁때가 오면 언니들은 말만 하면 다 만들어줄 것처럼 뭐 먹고 싶냐고 물어봤다. 엄마가 넣어둔 밑반찬과 언니들이 만들어준 달걀프라이, 소시지 구이, 볶은 김치가 돌아가며 저녁 밥상에 올라왔다. 전기밥통에서 주걱으로 밥을 퍼서 그릇에 담는 것을 다섯 번을 해야 우리 모두의 밥이 준비되었다. 언니가 주방장을 흉내 내며 곱빼기로 달라고요? 하면서 밥을 고봉으로 담아 짜장면 나오듯 밥그릇을 내주면 나는 종업원이 되어 밥그릇을 날랐다. 밥을 차려주는 언니들이 듬직하고 고마웠던 어느 날 내가 큰언니는 아빠 같고 둘째 언니는 엄마 같다고 했다. 대부분 아이들이 아빠보다 엄마를 좋아하는 것처럼 우리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큰언니가 엄마같다고 하지 않아 삐졌었다.


부모님은 장사가 안 되는 날이 많았고 다음 날 팔아야 할 물건을 단골집에서 외상으로 떼어왔다. '외상'의 뜻을 몰랐던 나와 남동생은 동네 떡볶이집에 가서 떡볶이를 먹고 '외상으로 해주세요.' 하고 돈 안 내고 집에 왔다가 언니들한테 엄청 혼났다. 큰언니는 나보다 고작 여섯 살 많았는데 부모님은 부모가 없을 때 큰 언니가 집안의 어른이라며 큰 언니의 어깨를 무겁게 하셨다. 떡볶이 외상 사건처럼 밖에서 잘못하고 들어오면 먼저 큰 언니한테 불려가 한 소리 듣고 그다음 둘째 언니, 마지막에 셋째 언니가 눈을 흘기면 혼나는 코스가 끝이 났다.


언니들이 하나 둘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공부로 바빠지면서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웃음과 소음으로 시끌벅적했던 집안이 잠잠해졌다. 자기 방을 가질 수 없는 사춘기 고등학생이 얼마나 사납고 위험한 동물이 되는지 가까이서 목격했다. 입시로 예민해진 언니가 발소리가 커서 공부가 안된다며 스트레스와 함께 사자후를 쏟아내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남동생과 나는 발소리와 숨소리를 죽이고 책상에 앉은 언니의 등 뒤에서 몰래 왔다 갔다 하며 놀았다. 사춘기와 입시를 겪으며 언니들이 자신만의 동굴속에서 홀로 지내는 동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니들은 그때의 자신들처럼 입시를 준비하는 조카들의 부모가 되었다. 군에서 보내주는 단체 사진 속 큰 조카는 점점 듬직해지고 있다. 언니들은 조카들의 성장통을 지켜보며 속이 탈 때도 있고 눈물 지을 때도 있다. 사느라 바빠서 함께 놀러다니는 일도 없다. 고독한 대화방처럼 언니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은 살가운 말도 없고 근황을 자주 나누지 않아 조용한 동굴 같다. 서로를 챙기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져도 부담 없다. 기쁜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내편에 서주는 언니들은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평생 같이 늙어갈 친구다.


영국은 외로움 담당 부서가 생겼고 외로움을 맡는 장관이 임용되어 외로움 방지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외로움을 자주 느끼면 면역이 떨어져 성인병 발병률이 높아진다. 외로움으로 뇌기능이 저하되고 수명이 짧아진다. 흡연을 안 해도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핀 정도로 외로움은 해롭다. 국가의 건강보험 부담이 증대되고 고독사 증가, 간병 부담, 자살률이 늘어가고 있다. 외로움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문제가 되었으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관계의 빈곤이 사회적 질병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서 나는 언니들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언니들과 남동생을 세상에 남겨주어 외로움을 대비할 수 있게 한 부모님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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