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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17. 2021

저마다의 빛깔

1일 1드로잉, 충전기

#124일차

*2021.11.17. 10분 글쓰기*

사춘기의 독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고 중앙현관으로 들어가는데 국어 B반 선생님이 다가왔다. "어머 벌써 이런 책을 읽니?" 하며 내 얼굴과 가슴팍에 자수된 이름을 유심히 보았다. 나는 국어 A반이라 그 선생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학교에서 가장 젊은 선생님이고 같은 학교 교사인 엄마 빽으로 정교사가 되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따라다녔다. 읽고 있는 부분에 검지 손가락을 넣어 한 손으로 붙잡고 있던 책은 공지영의 <고등어>였다.


그랬다. 구르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끊이지 않다가 밑도 끝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던 종잡을 수 없는 그런 때였다. 뉴스를 증거 삼아 세상의 부조리함을 한탄하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이 어둡게만 보였다.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하는 농담도 예민하게 받아들였고 선생님들의 실력을 가늠하며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선생님만 따랐다. 선생님들의 도덕성을 판단해서 학생을 체벌하거나 차별대우하지 않는 선생님부터 마음속 순위를 매겼다. 노력한 만큼 올라가 주던 성적의 오름세가 주춤하면서 성취감이 떨어지고 공부에 실증 나서 불만이 쌓여가던 때였다. 불현듯 성장기의 마지막 시기인 고등학생일 때 책을 읽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세계문학전집의 리스트를 독파했다. 현실에서 볼 수 없던 롤모델을 책 속에서 열심히 찾아다녔고 주인공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점점 닮아가서 그런 멋있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하늘 끝까지 높아진 눈에도 감동받은 책이 있었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으며 세 명의 주인공들 중에 혜완에게 마음이 끌렸다. 힘겨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주인공들을 보며 스스로 비혼주의를 선포했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읽을 때는 세상이 썩었고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는 내 생각이 맞아서 반가웠다. 신문에서 이문열 작가가 문하생들과 함께 산다고 들어서 나도 대학을 가지 않고 문하생으로 들어가 글을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을 때는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극기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축축한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을 저 멀리 이상향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햇볕이 따뜻하게 감싸는 기분이었다.    


명랑하고 사교적인 성격은 사춘기를 통과하며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친구들과 수다 떠는 시간보다 어두운 독서실에서 섬처럼 불을 밝힌 칸막이 책상 앞에 웅크리고 책 읽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때 읽은 추리 소설, 판타지 소설 중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이 기억난다. 온갖 고난을 겪는 주인공을 나와 동일시했고 비열한 적들이 우글대는 고립무원에서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것인지 고민했다. 이 세상 고민을 다 끌어안은 것처럼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자신에게 골똘해서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없었다.


돌아보면 사춘기의 나는 되바라지고 사랑스럽지 않았다. 촌스럽고 어설프면서 자신이 대단한 줄 아는 오만함을 부렸다. 불안하고 센티한 그 아이는 매일 마음의 날씨가 변덕스럽고 통제가 안되어 제 자신도 괴로웠다. 그 나름의 독해력과 세상을 보는 눈은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에너지와 함께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살갗의 감각이 가장 예민한 사춘기 때 읽은 책과 그 무렵에 겪는 경험에서 얻는 각자의 철학은 귀하고 소중하다. 사람의 중심을 지키는 단단하고 큰 씨앗이 되고 오래도록 그 사람의 인생 전반에 남아 저마다의 빛깔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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