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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01. 2021

기형도 시인에게

1일 1드로잉, 인덱스 스티커

#137일차

[2021.11.30. 10분 글쓰기]

To. 친구에게 (편지 쓰기)

11월을 보내며...


To. 기형도 시인에게


바람이 거세게 부는 11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아침부터 세찬 비가 내려 겨울을 재촉하는 날씨였어요. 제 생일이기도 하고요. 축하를 많이 받아서 안 먹어도 배부른 날이었어요. 생일이 자동으로 공개되는 기능이 있나 봐요. 알리지 않았는데 카톡방에는 축하의 말들로 가득 찼어요. 주인공이 되는 건 부러우면서 막상 부끄럽습니다. 화면 어딘가에 지나는 행인, 교실 한 모퉁이에 앉은 말없는 학생에 익숙한가 봅니다.  


지난 토요일에 글을 매개로 만난 친구들과 당신을 기념하는 문학관에 다녀왔어요. 당신의 유품과 나란히 놓인 시를 살펴보며 생전의 당신 삶에 가까이 가고자 했어요. 윤동주를 동경해서 같은 대학에 가고자 점수를 낮춰 연세대를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흑백 사진 속 당신의 선하고 맑은 눈빛은 윤동주 시인과 많이 닮아있었어요. 하늘이 내린 재주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처럼 요절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사람처럼 당신이 지은 시는 슬프고 아름다운 정서가 가득합니다.


광명 기형도 문학관에서 만나 뵌 당신의 큰 누님은 곱고 따뜻한 분이셨어요. 당신과 함께 자란 큰 누님은 당신을 존경하고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동생을 잘 아는 누나로서 문학관을 짓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생의 숨결이 드러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셨더군요. 동생은 떠났지만 동생의 시에 대한 열정이 세상에 남아 시인 지망생들의 춥고 시린 손발을 감싸는 사랑이 되도록 애쓰고 있으셨어요. 그렇게 하면 시인이 살아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기형도 문학관이 창작의 샘터로 기능하는 곳이 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하고요.


우리는 큰 누님의 안내를 받으며 문학관 뒤편에 자리한 아름다운 기형도 문학 공원을 지나서 당신이 살았던 동네에 가봤어요. 당신이 상장을 종이배로 접어 띄웠을 안양천변에 다다랐을 때 누님이 말했어요. "우리 형도의 숨결이 여기 다 남아있어요." 당신이 들이마시고 내뱉은 공기가 분자 형태로 공중에, 토양에, 물가에 스며들어있다가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 앞에 피어오르는 상상을 했어요. 그 숨을 들이마시자 196-70년대 시절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어둔 집에서 배춧잎 같은 엄마 발소리를 기다리던 어린 형도,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하고 일찍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고등학생 형도, 어느 겨울 술집에서 일어난 실수로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했던 청년 형도가 보이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들이마신 가난의 고통과 사랑의 상처, 시대의 아픔은 시로 토해져서 <빈집>, <안개>, <엄마 걱정>으로 남았고요.


점심에는 당신의 초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어요. 당신이 살아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자꾸 사장님을 곁눈질하게 됐어요. 11월의 햇볕은 따뜻하지만 코끝을 차갑게 하는 바람이 불어 쌀쌀했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에 두툼하게 썰어 넣은 돼지고기를 건져 먹으면서 속이 뜨끈해지고 함께 모인 글 친구들의 정겨운 대화로 행복했어요. 캄캄한 극장에서 마지막 순간을 혼자 맞이했을 스물아홉 살의 당신이 떠올라 눈물을 참았고요.  


당신이 살았던 집터 앞에서 우리는 둥글게 서서 당신의 시집을 꺼냈어요. 11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청회색으로 그늘진 산자락에서  <정거장의 충고>를 낭독했지요. 희망을 찾아다니느라 고단했던 삶이 담긴 노트의 마지막 장을 덮듯이 말이죠. 시를 읽으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몫의 아픔, 상처, 죄의식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이를 향한 부채감이 든다고 할까요? 시인이나 성직자, 순수학문을 하는 사람을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듭니다. 부정 편향의 시대에서 균형을 맞추느라 무게추의 역할이 힘에 부치는 때라서 그렇습니다.


해마다 11월은 기형도 시인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내게 11월을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만나면 인덱스 스티커를 붙이죠. 언제나 밝고 기쁜 일만이 삶의 영양을 좋게 하는 건 아닙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스티커를 붙여 기억하면 시가 창작되고 영혼이 성숙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슬플 때 밝은 노래를 들으면 비교되서 더 가슴 아프고 슬픈 노래를 들어서 위로를 얻듯이 힘들 때 당신의 시로 힘을 얻어 살아볼게요. 당신의 시를 자양분으로 한 장 남은 달력의 시간 동안 감사한 일을 모으며 삶의 의지를 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추신. 큰 누님은 글 모임에서 종종 만나기로 했어요. 큰 누님에게 안부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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