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책벌레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지만 한때 책벌레였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 관계가 소원해지고 내향적인 성격으로 바뀌며 책으로 도피했었다. 책가방에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책을 2권씩 넣어 다녔다. 학교를 오가며 가방에 넣어놔도 되는 책을 굳이 빼서 팔에 끼고 다녔고 차 없는 길에서는 책을 읽으며 걸었다. 반 아이들은 항상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집 현관을 들어서면 책을 툭 던져놓고 읽지 않는 앙큼한 학생이었다.
책은 나를 빛내주는 아이템이었지 책 자체에 충분히 빠지지 못했다. 책벌레라는 소리를 들으면 스스로 인정할 수 없어 무안했으나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 나를 수식하는 단어가 하나라도 있어야 존재감을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책을 끼고 다닌 건 그런 식으로라도 자의식을 드러내고 싶은 치기였지만 그러면서도 서서히 책에 물들어갔다. 나 혼자 비평가가 되어 작가의 글에 순위를 매기고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런 책을 내가 써야 했는데 하며 밑도 끝도 없이 안타까워했다. 독자로 글을 소비하는 데서 벗어나 글의 생산자가 되고 싶었고 좋은 문장을 필사하며 작가 흉내를 냈다.
자의식 과잉의 습관이 남아서일까? 집보다 바깥에서 책을 읽을 때 집중된다. 카페나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 책 속으로 몰입이 잘 된다. 출퇴근에 꼬박 3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의 학교에 5년간 다닌 적이 있다. 근무 시간과 출퇴근 시간을 합하면 하루가 다 끝난다며 선생님들은 불쌍히 여겼지만 정작 나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힘든지 몰랐다. 서울 북쪽 끝이었던 학교 옆에는 큰 도서관이 있었는데 장서가 제법 갖춰져 있었다. 퇴근하고 도서관에 들려 책을 대출하면 서울의 남쪽 끝에 있는 우리 집까지 독서여행이 시작됐다. 나중에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옮기게 됐을 때 유일한 아쉬움이 지하철 책 읽는 시간이었다.
책 읽기는 쉬운 취미가 아니다. 얇은 책이라도 내용의 밀도가 높아서 TV 드라마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책의 내용을 사유하며 즐기는 수준에 이르려면 상당한 훈련과 시간이 필요하다. 정보처리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적극적으로 뇌를 써야 하는 노동 집약 활동이다. 집중해서 글자를 해독하고 내가 지닌 가치 판단과 비교하고 내 이해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동시다발로 진행된다. 내용의 흐름과 구성을 기억하면서 이어지는 문장과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고도의 정신노동이다.
선생님을 규정하는 세 가지 관점에 노동자, 성직자, 전문직 종사자가 있지만 나를 보면 '봉급생활자'라는 말이 어울린다. 퇴근하면 방바닥에 들러붙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져 저녁밥도 겨우 차려먹는 나는 읽어주길 기다리는 책들이 즐비한 책장을 애틋하게 바라볼 뿐이다. 올해는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책이 생기는 족족 사들이다 보니 온라인 서점의 플래티넘 회원, VIP가 되었다.
여행할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렸다간 여행을 갈 수 없듯이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다는 건 통하지 않는다. 침대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잠들기 전 읽는 습관이 오래되었다. 최근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종이책으로, 후속편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전자책으로 연달아 읽었다. 서울에 남은 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북측과 남측의 전세에 따라 좌우 이데올로기의 사상검증을 받을 때 6.25 전쟁의 비극이 평범한 시민의 삶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감정이입이 되었다. 문장은 짧을수록 좋고 부사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들었는데 만연체로 된 선생님의 글에 용기를 얻어 길이에 구애받지 않고 쓰고 있다.
책벌레들을 만나면 묻고 싶다. 과연 종이책은 사라질 것인가? 공간을 차지하고 질량을 갖는 책이란 물질이 스마트폰 안에서 바이트로 변환되면서 매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면구시대적 착오에 불과할까? 전자책을 읽으면종이책을 손으로 넘기는 감촉과 소리, 책의 두께감을 느낄 수 없어 뭔가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인터넷 기사를 보는 기분이 든다. 책 표지 디자인, 날개에 적힌 저자의 이력이나 뒷면에 강조된 책의 주요 문장 같은 것을 전자책에서는 스킵해서 보게 된다. 책을 읽다가 앞부분을 확인할 일이 있었는데 종이책처럼 금방 찾지 못했다. 손가락을 터치하며 넘기는데 글자 정렬이 일정해서 그런지 모든 페이지가 비슷해 보여 찾기를 포기했다.
지금 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2010년 이후 태어난 일명 알파 세대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었고 AI가 보급되어 이전 세대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특히 챗봇(인간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상당한 수준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되어 내 앞에 있는 미지의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를 못 느낄 수 있다. 정보 습득방식에서도 요즘 아이들은 문자언어를 기반한 책보다 시각화 매체를 통한 동영상을 선호한다. 자료 조사 과제를 내주면 키워드를 검색할 때 포털사이트보다 동영상 플랫폼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진즉에 들었다. 책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기우가 아닐 것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본 시청기록을 토대로 비슷한 영상을 추천해주어 확증 편향적인 사고방식이 고착되기 쉽다. 신문기사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기사만 발췌한다 해도 종이 신문을 넘겨보는 가운데 지면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회 모습을 담은 기사들을 훑어서 보게 되어 있다. 전체 속에서 부분에 속한 기사를 읽는 것과 족집게처럼 필요한 기사만 따서 읽는 것은 총체적인 접근과 맥락적 사고라는 측면에서 다를 것이다.
기후위기와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서 말살된 인디언들이 남긴 자연과 물질에 대한 세계관이 깨달음과 울림을 주듯이 먼 훗날 종이책이 인공지능과 편견의 노예가 된 인간을 구원할 날이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