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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ug 21. 2021

1일1드로잉

이름모를 열매

#36일차  두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살이 급속하게 찐 주인공 미영이 좋아했던 대학 선배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방송국 조연출로 일하는 그가 간곡하게 부탁한 것은 누군가 펑크낸 보조출연자 역할이었다. 불은 체중이 부끄러워 만나기 싫었지만 선배에 대한 흠모하는 마음은 여전해 거절할 수 없었다. 낯선 사람들과 삭막한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시작한 방송에서 자신의 역할이 날씬하고 예쁜 푸드파이터 옆에서 허겁지겁 먹는 뚱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참담해진다. 좋아하는 선배는 카메라에 나오도록 고개를 들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레슬링복을 입은 미영은 창피했다. 시 동아리에서 알게 된 다정했던 선배는 pd에게 쌍욕을 들으며 불쌍하게 일하고 있었다. 좁은 자취방에 돌아온 미영은 2단 행거에 걸린 빨래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오랫동안 울었다. 다행히도 이 글의 화자는 "나"였다. 김애란 소설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미영은 낙오자 같았던 그날 일을 제3의 것으로 바라보고 글로 옮기면서 외면하고 싶은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상처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오전 폭우 속에서 집으로 향하다 길에 떨어진 열매를 주웠다. 주변 나무의 팻말이 없고 검색해봐도 비슷한 모양을 못 찾아 이름도 모른다. 그리는 중에 환공포증이 생길 것 같았다. 바위에 들러붙은 정체불명의 붉은 원생생물처럼 보여 긁어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러자 못나고 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 쓰는 사람은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건널목을 건너고 출근하는 일상적인 첫번째 삶과 모든 것을 다시 곱씹는 두번째 삶이 있다. 작가는 첫번째 삶을 돌아보고 생을 이루는 세부사항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글을 쓰며 두번째 삶을 산다. 신이 허락한 가위가 있다면 그 부분만 잘라내서 없애버리고 싶은 과거도 글에 있어서는 한낱 재료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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