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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Sep 15. 2021

1일1드로잉

블루세이지

#61일차

한참 좋을 때다. 아침저녁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말이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딱 알맞은 온도와 세기로 살며시 들어와 몸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감싼다.  날씨가 위로가 되는구나 싶어 집에 오는 길을 굳이 멀리 잡아 천천히 공기의 흐름을 만끽하며 걸었다. 꽃을 볼 수 있는 인적 드문 산책로를 알고 있다. 그곳엔 흐드러지게 핀 블루 세이지가 집단을 이루고 있다. 연파랑과 짙은 파랑, 보라가 섞인 은은한 꽃잎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무렵과 기막히게 어울린다.


인디언들은 저 멀리 다가오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고 하여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불렀던 무렵. 나는 하루 중 이 무렵을 재즈가 어울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한낮의 소란했던 세상이 블루색으로 필터를 낀 것처럼 차분해진다. 길 위에 보이는 개 주인이 처리하지 못한 반려견의 변조차 블루톤으로 필터 처리되어 보인다. '무슨 급한 사정이었을까' 하며 불쾌함이 절로 누그러지고, 살아있는 모든 것이 측은해 보이고 이해되는 시간, 가로등이 하나 둘 붉게 켜지면 더욱 황홀해지는 시간대. 일본에서는 살아있는 것의 낮시간과 죽음혼의 시간인 밤시간이 만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간대라 하여 "황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늘 아침은 열어놓은 창문으로 가을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매운 고기 볶음 냄새가 들어왔다. 갓 지은 밥 냄새도 은근하게 베어 들었다. 꽤 이른 시간이었는데 새벽부터 뜨신 밥과 고기를 볶는 누군가의 정성과 열정에 느닷없이 나는 눈물이 났다. 연이어 매콤한 고기로 푸른 상추쌈을 싸서 밥을 해준 이가 보는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먹었을 것 같은 다른 누군가도 생각났다. 이른 아침에 서로를 위해 밥을 하고 밥을 먹는 식구가 눈물겹게 고맙고 덩달아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가을은 짧은데 기후위기로 더 짧아졌다.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변하고 여름과 겨울의 혹서와 혹한이 심해질 거라고 한다. 가을이 초겨울에 합류하여 지구과학의 역사 속으로 '가을'이란 이름을 잃을지 모른다. 오늘 그린 블루 세이지의 꽃말은 "이유"다.


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은 시인은 시를 읽을 때 아, 나는 이런 단어에 끌리는구나, 나는 이런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는구나.. 하고 자기를 발견한다고 했다. 또 시를 읽으며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길러지고 일상의 새로운 면, 언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EBS 기획 특강 <우리는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에서 김용희 교수는 시가 순수한 유희이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인간 본성을 일깨우고, 현실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설가 김연수는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고 말했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도종환 시인은 (왜 자주 언급하게 됐을까? 아마도 그가 문체부 장관, 국회의원을 하기 전 국어 교사였다는 것, '스승의 기도'라는 시의 첫 구절에 첫눈에 반해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지 몰라 갈피를 못 잡을 때, 우리가 어느 길로 갈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시는 마음을 다스려주고 길을 찾아준다." 고 했다. 김사인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시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이 영혼과 정신적인 '무엇'이 없이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스스로 알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에 대한 욕구가 시에 대한 욕구라는 점을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중에도 신경림 시인의 "이유"가 오늘 내 마음에 남아 "이유"를 의미하는 블루 세이지 옆에 적었다. "시를 한 편 외운다면 그림 한 폭을 머릿속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그림을 내 몸 안에 담아 어디를 가든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모질고 거친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훌륭한 연료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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