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1드로잉

샤인머스킷

by 혜윰

#69일차

남들 만큼의 어려운 사정이 내게도 있어 추석이 지나서야 부모님 댁을 찾았다. 중학생 때부터 살았던 그곳, 나란 사람의 정서적 토대가 만들어진 곳이다.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내 마음은 희로애락의 온갖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집에 가는 길의 끝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가 보였다.


부모님의 시간은 고집 세고 조그마한 막내딸, 시집보내기 아까운 오진 딸에 멈춰 있다. 얼마 전 아버지가 퇴원하는 날 원무과 가서 퇴원 수속을 밟고 오겠다고 하니 어린 네가 어떻게 그걸 하냐고, 마흔 넘은 나를 고생한다며 말리셨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받을 줄 모르는 부모님이 딸이 온다고 샤인머스킷을 사서 깨끗이 씻어놓고 기다리셨다. 저게 유행인 줄 어찌 아셨을까. 아마 그 동네 과일 중에 가장 크고 싱싱한 포도였을 것이다. 빛깔이 영롱하고 맛이 달수록 목이 메었다.


얼마 앉아있지 못하고 가야 하는 딸에게 말수 적은 아버지가 일어나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비닐로 한번, 신문지로 또 한 번 꽁꽁 싸주셨다. 셋째 외삼촌이 보낸 사과를 접붙인 배, 둘째 언니네가 사 온 화과자, 남동생 내외가 직접 해온 불고기, 구워놓은 생선, 시장에서 사 온 옥수수, 자두 그리고 샤인 머스킷.


추석 연휴에 <내 어머니의 이야기> 만화책과 <달려라 아비> 소설집을 읽었다. 나와 비슷한 유년을 보냈지만 나와 다르게 그 시절을 인식하는 인물들을 보며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멍해졌다. 악착같이 따라다니던 피해의식과 붙들려 다닌 시간들을 생각하니 허탈하게 웃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이해되고 보이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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