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메리골드
가족이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아 오랫동안 해온 일을 접어야 했다. 벌려놓은 일들을 정리하고 폐업 신고를 하고 큰돈이 나갔다. 소중하게 매만지고 닦아온 기계와 장비들을 헐값에 넘기고 우리에게 보물이었던 것들이 폐기물로 처리된 후 푼돈으로 돌아왔다. 경제적 타격은 시작에 불과했고 문제는 심리적 충격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실패의 구덩이는 깊었고 시간이 지나자 자신을 작은 방에서 가두었다. 절망의 터널로 들어가며 몸과 마음의 고통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간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인간관계를 활발히 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붙들어야 했을 때 다른 가족과 지인들이 떠올랐다.
우리 상황을 주변에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객관화가 시작되었다. 가족과 지인은 경청해주고 따뜻한 격려와 진심 어린 안타까움을 표현해주었다. 몸 걱정을 많이 해주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장담해주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 말에 의지하며 하루만 살자고 버텼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분들을 찾아갔다. 고통스러웠던 터널의 초입부터 빠져나오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어 경험한 것을 말씀해주었다. 의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삶의 의외성을 믿어보라고 지금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그것 또한 교만이라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자동차 안에서 그 말이 품은 온기와 희망을 안고 눈물을 닦았다. 유튜브 검색어에 절망, 극복, 재기라는 단어를 넣어 영상을 찾아보고 내일이면 다시 엎어질 다짐을 되뇌며 영영 안 오는 잠을 기다렸다.
눈을 감으면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도무지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조금 차도가 보이는 것 같으면 다음날 어김없이 더 아파했다. 그런 날도 하늘은 맑고 구름은 흘러갔다. 계절은 아무렇지 않게 가을에서 겨울로 봄에서 여름으로 잘도 변했다. 날씨에 따라 따뜻한 옷을 찾고 더울 땐 얇고 가벼운 옷을 골랐다. 아침이면 일어나려고 노력했고 밤에는 자려고 애썼다. 끼니마다 열심히 밥을 챙겼다. 무엇을 먹을지 정하고 장을 봐서 준비하는 것에 정성을 쏟았다. 건강한 음식을 골라서 해 먹는 일을 생활의 중심에 두었다.
그 사이 우리는 단단해졌고 많이 다퉜던 젊은 시절보다 현명해졌다. 서로 틀어지는 일이 생겨도 시간이 아까우니 한 사람이 진심으로 사과하면 바로 풀어주자고 약속했다. 작은 일에서도 의미를 찾으니 별일 아닌 것에 웃음이 많아졌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행복에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각인되었다. 베풀며 살아오지 않았는데 주변 가족과 지인들이 큰 도움을 주었다. 나 혼자 잘나서 살아온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의 은혜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불행이 와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불행은 다른 말로 "안에서 오는 행복"이라는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행복한 날은 행복해서 좋고 불행할 때는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어서 감사할 것이다. 행불행은 밀물과 썰물처럼 언제든 우리 인생에 닥칠 수 있고 그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품어내는 태도를 기르려고 노력할 것이다.
김현수 교수님은 최근 "감사"가 개인과 사회 전체에 미치는 놀라운 영향이 과학적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고 했다. 흔히 들어온 자신의 솔직함을 숨기고 감정노동을 해서까지 감사를 중요시하는 도덕적 명언의 억지 감사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진정 감사할 것을 찾아 "감사하기"를 하면 만성 스트레스를 극복하는데 생물학적인 효과가 증명되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19가 길어지고 만남이 줄어들며 외로움과 우울함이 깊어져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학계 연구자들이 "감사하기"를 중요하게 주목하며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오늘 그가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고 했다. 작은 방에서 지냈던 나날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함께 산책하며 길가에 핀 프렌치 메리골드를 보았다. "만수국"이라고도 하는데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다. 냉장고에 친정 부모님이 비닐로, 신문지로 꽁꽁 싸준 구운 생선을 꺼냈다. 에어 프라이기로 데운 다음 저녁 밥상에 올렸다. 짭조름하게 간이 된 살을 발라 서로 먹으라며 모아주었다. 밥과 생선으로 뱃속이 든든하고 따뜻하게 채워졌다.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