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1드로잉

by 혜윰

#75일차

가족끼리만 통하는 암호 같은, 시간을 나누는 기준이 있다.

궁 안에 살 때, 영철이네 옆집 살 때, 하얀 사다리 집 살 때 그리고 마포구의 그 집.

궁 안에 살 때는 이야기만 들었지 내 기억에 없고 영철이네 옆집 살 때부터 기억이 살아있다. 나는 영철이네 옆집에 네댓 살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부모님이 촘촘하게 자식을 낳아 큰언니부터 남동생까지 8살 터울이 진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한 방에서 자랐으니 조용할 틈이 없었다. 먹을 것도 금방금방 줄어들었다. 귤 한 상자를 사면 며칠을 못 갔다. 형제들끼리 경쟁적으로 귤 까먹다가 손바닥이 주황색이 된 적도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서로 돌봐주는 정다운 모습은 별로 없었다. 누가 더 세 보이나 알고 있는 심한 욕을 한가운데 뱉어놓고 혼란을 구경하는 반사회적 일탈을 벌이는 악동 이미지가 더 어울렸다.


아버지가 거나하게 술에 취한 날 언제나 한 손에 시장 통닭이 담긴 누런 봉투나 양념곱창이 두둑이 담겨 불룩해진 검은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대단한 발표를 앞에 둔 진지한 표정으로 옷을 벗어 벽에 걸린 못에 걸치며 우리들을 호출하셨다. 첫째 큰 언니부터 막내 남동생까지 다섯이 순서대로 무릎을 붙이고 나란히 앉으면 아버지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닭, 향긋한 깻잎 냄새와 고소한 당면, 곱창의 기름내에 정신이 쏙 팔려서 아버지의 말씀은 큰언니의 오른쪽 귀로 들어가 남동생의 왼쪽 귀로 나갔다. 아버지 연설은 항상 "다섯이 하나같이 커라"로 마무리되었다. 그 말이 나오면 연설이 끝났다는 것과 함께 아버지가 시장에서 사 온 음식에 달려들 수 있었으므로 오직 그 말만 기다렸다.


영철이네 옆집 살 때의 '영철이'는 집주인의 아들이다. 큰언니보다 살짝 오빠였던 것 같은데 검은 뿔 테 안경에 교련복을 입고 다니는 수줍은 고등학생이었다. 한 번도 이야기는 안 해봐서 기억나는 게 거의 없는데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시절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다니... 지금 살아있을지 어디서 무얼하는지 모르는 영철이 오빠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떨까? 영철이네 옆집 살 때 있었던 나의 유년은 추억이 방울방울 하다. 그중에 '오토바이 사건'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을 만한 일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매일 뛰어놀았던 나는 그날도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놀고 있었다. 우리 동네로 들어서는 길목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 날은 구멍가게 근처에서 주저앉아 돌멩이로 공기놀이, 소꿉놀이를 했었다. 놀이에 집중하느라 뒤로 뭐가 지나가는지, 무슨 소리가 나는지도 몰랐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들 뒤로 오토바이를 타고 온 남자가 막 시동을 끄고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다른 곳에 가서 놀려고 일어났던 나는 뜨겁게 달궈진 오토바이 배기통에 다리가 닿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화상 자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회색 물집으로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다. 지금도 화상이 남아서 자세히 보면 오백 원 동전만 한 크기로 그 자리만 피부색이 짙다. 그날 울면서 집에 들어갔고 마당에서 빨래하던 엄마가 깜짝 놀라서 이리저리 나를 살폈다. 눈물, 콧물과 흐느낌이 뒤엉켜 꺽꺽대며 문장을 만들어 말하지 못하고 띄엄띄엄 구멍가게, 오토바이, 데었다, 아프다 이런 단어를 나열하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은 엄마가 내 손을 잡고 구멍가게로 뛰었다. 이미 오토바이는 떠나고 없었다.


며칠 지나 시장에 엄마 손을 잡고 가다가 구멍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그 오토바이가 서 있었다. 손을 흔들어 엄마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저 오토바이라고. 엄마는 확실하냐고 재차 물었고 엄마가 여러 번 물을 때마다 내 확신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맞는 것 같다고. 내가 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구멍가게로 쫓아 들어갔다. 젊은 청년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고 엄마가 삿대질하며 뒤따라 나왔다. 그때는 큰 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잽싸게 모여 둥글게 원을 그리고 싸움구경을 했다. 그 싸움판의 주인공이 울 엄마라니... 나는 창피해서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청년은 아니라고 잡아떼고 엄마는 커다란 거즈를 붙인 내 왼쪽 종아리와 오토바이를 번갈아 가리키며 책임지라고 했다. 나는 창피해서 엄마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고 걱정돼서 슬쩍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결국 엄마가 이겼다. 청년은 사과하고 다음부터 과속으로 오토바이를 몰지 않겠으며 시동을 끈 지 얼마 안 된 배기통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으니 이제 조심하겠다고 약속했다. 보험처리나 보상금 없이 청년의 다짐만 단단히 받아낸 엄마와 나는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일로 나는 엄마가 영원히 내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푸르게 젊은 엄마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를 위해 고래고래 소리 질러 싸워주었다. 신기하게도 엄마가 힘껏 싸워준 그날 이후 거즈를 떼어내고 상처를 소독할 때마다 쓰라렸던 고통이 참을 만했다. 엄마가 돈을 안 받고 다짐만 받은 것도 좋았다. 지금도 내 왼쪽 종아리의 동그란 흉터를 들여다보면 강강술래처럼 우릴 둘러쌌던 동네 사람들과 그 한가운데 엄마와 내가 보이는 것 같다. 엄마와 나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결속해준 이름 모를 청년과 오토바이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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