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일차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 아이들에게 약과를 선물해주며 헤어졌다. 하나둘 인사를 나누고 보내는데 한 아이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편지를 주었다.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보라는 말과 함께 내민 조그만 편지에는 야무지게 접힌 작은 종이 두장이 들어 있었다.
얼마 전 2학기를 맞아 학급 임원선거를 치렀다. 요즘은 임원이 되었다고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 학급회장, 부회장은 봉사하는 자리, 친구들을 돕는 역할로 인식되어 힘들고 귀찮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어 선뜻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들이 적을 때도 있다. 그래도 투표로 선출되는 과정이 있어야 임원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후보들이 적절하게 나오는 것이 좋다. 집에서 소견문을 적어온 아이, 재미로 충동적으로 나온 아이, 경험 삼아 도전하는 아이 등 준비하는 모습도, 나오는 이유도 다양하다.
편지를 준 00이는 1학기에 나왔다 떨어졌는데 2학기에 다시 도전했다. 아이는 소견발표를 적어오기만 한 게 아니라 긴 내용을 통째로 외워왔다. 평소에도 친구들을 잘 챙기고 배려심 있게 생활했던 아이다. 학교 과제며 행사가 있으면 정성을 다해 참여해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줌 수업 때도 다르다. 어떤 아이는 자다가 일어나 겨우 눈곱 떼고 컴퓨터 앞에 앉는데 00이는 한결같이 단정한 모습으로 등교했을 때처럼 최선을 다해 화상수업에 참여한다.
2학기 임원선거는 1학기 회장, 부회장들이 진행해주었다. 반 아이들이 접어서 낸 종이 투표지를 한 바구니에 거두면 선거 도우미들이 투표지를 한 장씩 펼치고 남, 녀 후보의 이름을 또박또박 크게 부른다. 다른 도우미들은 칠판에 적어둔 후보들 중 호명된 아이의 이름에 막대기로 5표씩 묶어 표시한다. 강산이 수차례 바뀌는 세월에도 임원선거는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진행된다. 반 아이들 모두의 가슴이 쫄깃한 순간이다. 엎치락뒤치락 끝까지 승부를 알 수 없어 지켜보는 아이들 입에서 "우와 재밌다"는 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00이는 회장 선거 그리고 연이은 부회장 선거에도 떨어졌다. 아이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간절하게 바라고 오랜 시간 소원했던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마음도 아팠다.
선거가 끝나면 나는 떨어진 아이들의 표정을 먼저 살피게 된다. 당선된 아이들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꽃피지만 떨어진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도 마음껏 짓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무마하고 괜찮은 척하기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선거에 나왔더라도 반 아이들의 평가라고 생각하면 결과를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선거를 마치면 당선된 아이들의 소감과 함께 떨어진 아이들의 소감도 묻는다. 어려운 도전에 용기 내서 출마한 아이들이 고맙고, 이 경험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돌아볼 시간을 주고 싶어서다.
이번에도 당선된 임원들 이야기를 들어보고 떨어진 아이들 이야기를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아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패스하도록 했다. 이어서 선거를 마친 선생님의 소감도 발표했다. 선거는 공정했고 아이들은 신중하게 참여했고 여러분의 선택을 믿고 존중한다고, 선생님은 떨어진 친구들의 마음이 괜찮은지 걱정된다고, 00이를 안아주고 싶다고... 1,2학기 모두 도전했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심정이 어떨지 위로해주고 싶다고..
그리고 나도 모르게 00이가 앉은자리로 가서 00이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침착한 표정으로 한 곳만 응시하던 00이가 눈물을 터뜨렸다. 00이를 안아주는 동안 나도 눈물이 났다. 이러다간 당선된 임원들이 민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차! 싶었다.
다음 시간이 영어교과수업이라 교실에서 나와 00어머니께 문자로 집에 가면 00이를 많이 위로해주시라고 보냈다. 그날 늦은 오후, 00어머니께 답장이 왔다. 아이가 걱정돼서 하교시간에 맞춰 교문에서 기다렸는데 아이가 달려와 안기며 "엄마, 나 하나도 안 속상해, 선생님이 위로해주셨고 친구들도 나를 둘러싸고 쪽지에 편지 써주고 하루 종일 내 옆에 있어줬어. 나보다 더 똑똑한 애가 회장 돼서 나도 좋아. 내년에 다시 도전할 거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당선된 것보다 더 값진 경험을 한 것 같다며 아이의 마음을 읽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국회의원선거는 당선된 사람이나 떨어진 사람이나 하나도 안 부럽고 안 불쌍한데 학교에서 아이들의 임원선거는 조심스럽고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마종기 시인이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책에 담긴 가수 루시드폴에게 보낸 편지에서 본 내용이 있다. 미국 국회의원은 보수가 적고 특권이 별로 없어 한번 의원을 한 사람은 두 번은 안 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국회의원 연봉을 깎고 특권을 없애면 사명감으로 해보겠다는 사람만 나올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학급 임원선거도 임명장과 친구를 도와야 한다는 부담감 말고는 아무 특권이 없다. 그래서 좋은 의도로 나왔다가 낙선한 아이들의 마음이 어떤지 살펴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선생님 어렸을 때 선거 나갔다가 보기 좋게 떨어진 일, 친구들 사이에서 망신당했던 일, 부모님께 야단맞은 일 등 솔직하게 이야기해준다. 실패하고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이 내게 어떤 자국을 남겼는지 지금의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해주면서 나는 내 존재를 아이들에게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김현수 교수님 강의에서 "거세된 교사"라는 용어를 접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거쳐온 경험과 내력을 아이들에게 숨기지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교과내용만 전달하며 그 자리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대체해도 아이들에게 전혀 영향이 없다면 그때의 나는 누구란 말인가?
가르침과 배움에 있어 what, how 보다 중요한 것이 who라고 파커 파머는 말했다. 아이들이 자신들 앞에 선 사람의 존재를 알아야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대화가 의미 있어진다. 나를 알려준다는 건 나이, 결혼 유무, 가족관계, 출신 대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살아오며 겪은 실제 경험과 의미, 나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이야기할 때 나는 내 존재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환희와 기쁨의 순간은 사적으로 간직하게 되지만 고통과 시련을 준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주변에 나눌 이야기가 많아진다. 결핍감을 느끼고 실패하고 힘들고 어려웠던 일이 영혼을 성숙하게 해 주고 나라는 존재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고통의 터널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기 위해 "의미"를 끈질기게 붙들었던 것일지 모른다.
과학수업에서 식물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공부를 하며 세상에서 가장 큰 바오바브 나무를 소개했다. 물이 없고 척박한 환경인 사막이 바오바브나무를 굳세고 큰 나무로 성장하게 해 주었다는 자연의 섭리를 잊지 말자고. 그러면 나는 또 반성한다. 앞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계속 이어질 거라는 예견 때문에 미리 아이들을 단속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TV에서 자살예방 공익광고를 보았다. 주변 사람이 무심코 한 말에서 위험신호가 있을 수 있으니 관심 갖고 주의를 기울여주라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로 우울증도 많아지고 자살률도 높아진다는 기사를 보았지만 광고를 보니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아프고 힘들 때 찾아와 안기고 기대어 쉬는 나무가 곳곳에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