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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Sep 28. 2021

1일1드로잉

케이크

#74일차

내가 중학생일 때 영어시간이었다. "디저트는 dessert 에요. 사막 desert 하고 닮았죠? 헷갈리면 안 돼요."  그날 이후 디저트를 생각하면 사막이 함께 떠올랐다. 선생님의 의도와 다르게 나에게 디저트는 데저트와 운명공동체로 묶인 것이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난 뒤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후식, 디저트의 이미지는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귀한 사막과 느낌이 상극이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인물들의 말투가 독특해서 기억에 남았다. 오래전, 밥을 안 먹고 떡볶이만 먹는 20대 딸이 나오는 연속극이 있었다. 집에 예정에 없던 손님이 방문하자 주인 여자가 가사도우미에게 케이크를 대접하자고 말한다. 도우미가 "아이고 마침 떨어졌네요." 하니까 주인 여자가 "무슨 집에 케이크 하나 없어요? " 하는 잠깐 스쳐가는 장면이었다. 드라마 줄거리나 등장인물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그 대사만 남았다. 케이크는 생일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건데 부잣집은 항상 냉장고에 케이크가 있는 건가?


부자는 아니지만 나는 생일이 아닌 날 가끔 홀 사이즈 케이크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빵집 계산대에서 케이크를 포장하며 점원이 "초는 몇 개 드릴까요?" 물을 때 쿨하게 "아뇨, 됐어요." 하는 작은 사치를 부리는 것이다. 일을 많이 했다 싶은 날은 보상으로 케이크를 꺼내 야금야금 잘라먹는다.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면 뇌의 과부하가 진정되는 효과를 느낀다. 뾰족해진 신경줄기의 모서리가 둥글어지는 것 같고 몸이 나른해진다.


케이크 외에도 디저트는 푸딩, 쇼콜라, 티라미수, 파르페, 크렘 브륄레, 아포가토, 크레이프, 토르테, 바클라바, 와인, 아이스크림, 팥빙수, 떡, 수정과, 식혜, 곶감, 한과, 약과, 다식 등 동서양을 망라하고 종류가 다양하다. 나는 밥을 먹고 나면 뭐라도 디저트로 꼭 챙겨 먹는다. 그래야 소화가 잘 되는 것 같고 디저트를 먹어야 다음 끼니까지 머리에서 먹는 일을 미련 없이 지울 수 있어서다.


나와 피를 나눈 아버지와 남동생은 디저트를 쳐다도 안 본다. 본인이 주인공인 생일날에 포크로 떠서 입술에 갖다 대도 입을 안 연다. 남편도 디저트를 혐오하는 같은 종자였는데 나를 만나서 이제는 수저로 밥 퍼먹듯 케이크를 먹는다. 왜 그리 빨리 먹냐고 물으니 좋아서 먹는 게 아니라고 한다. 자기가 안 먹으면 내가 먹으니 나를 못 먹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나는 디저트를 안 먹는 게 좋은 외가 쪽 가족력을 갖고 있다.


엄마가 32년째 당뇨를 앓고 있으시다. 투병기간을 정확히 는 이유는 엄마가 당뇨를 진단받은 그날을 또렷이 기억해서다. 햇살이 발갛게 내려앉은 여름 오후였다. 방에서 나 혼자 TV를 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엄마가 흐느끼면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 이제 어떻게.. 평생 낫지 않는 병이라던데.. 애들도 다섯이나 되는데 얘네들 키워야 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이전과 이후가 나뉘는 중대한 문제가 생긴 것을 감지했다. TV를 끄고 엄마 곁으로 가 등에 기대어 수화기 너머에 귀 기울였다. "괜찮아 순자야, 너는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엄마에게 디저트를 먹는다는 건 투병을 포기하는 자살행위에 가깝다. 엄마는 설탕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것을 철저하게 가려냈다. 손님을 만나도 단 과일은 안 먹었고 물 외에는 어떤 음료수도 사양하셨다. 집에서도 우리가 먹을 것과 자신이 먹는 것을 따로 조리하느라 할 일이 많아지셨다. 잡곡이 들어가지 않은 밥은 안 먹고 항상 밥 양을 정해서 적게 먹어야 했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당수치를 체크하고 매일 당뇨약을 복용하고 있다.


당뇨는 그 자체보다 합병증이 일어날 가능성 때문에 무서운 병이다. 당뇨인이 식단관리를 소홀면 사지의 말단이 썩어 손가락, 발가락을 절단할 수 있다. 면역체계 약해져 다른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의사들은 당뇨를 침묵의 살인자라고 부른다. 엄마는 32년 동안 당뇨합병증의 공포를 되새기며 끼니마다 돌아오는 식욕을 다스려야 했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축에 속하는 먹는 즐거움이 엄마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외삼촌들도 당뇨를 앓은 걸 보면 당과 관련해서 취약한 유전인자가 있나 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멀게 느껴지고 디저트가 주는 만족감은 분명해서 나는 여전히 디저트 타임을 갖는다. 크리스마스니까 기분 내자고, 연말이라 쓸쓸하니까, 눈이 많이 왔으니까 기념으로... 갖가지 어울리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 케이크를 산다. 진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케이크를 먹으면 잠시 동안 천국을 훔쳐본 기분이다.


20대 시절 디저트 맛집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노마드족 행렬에서 벗어나 이제는 당뇨나 성인병을 신경 써야 하는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다. 건강검진 결과지에주의하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보인다. 거울 앞에 앞으로 섰다, 옆으로 섰다 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옷맵시를 가다듬 다짐한다. 최영 장군을 따라 디저트 보기를 데저트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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