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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Sep 30. 2021

1일1드로잉

화이트와인

#76일차

마트에서 와인을 골라 카트에 옮겨 담을 때 쾌감을 느낀다. 내가 나를 파괴하는 쾌감.

술 좋아하고 잘 마시는 사람이 주변에 없고 나도 술맛을 잘 모른다. 가끔 밤에 생각날 때 집에서 와인을 조금 마실 뿐이다.


일몰 시간이 빨라지고 있다. 비가 한 번씩 내릴 때마다 기온이 훅 떨어지며 계절이 깊은 가을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나뭇가지에 걸친 햇빛의 양이 확연하게 줄었다. 한낮에도 햇빛의 농담이 한 톤 낮아지고 가을 공기 속에서 가벼운 슬픔을 느낀다. 9월의 마지막 날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 와인을 따랐다. 소리부터 시작해서 한 모금 입안에 머금다 목에 넘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느껴지는 모든 감각에 주의를 모아 보았다.


잘 나가던 극작가로 살다가 알코올 의존증으로 가족과 일을 잃고 술과 함께 인생을 마감하려는 벤, 그와 사랑에 빠진 매춘부 세라가 나오는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가 생각난다.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벤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미 끝내기로 마음먹은 벤의 마지막 시간은 세라에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시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세라가 아무리 따스하게 감싸 안아도 허무와 황폐의 길로 가는 벤을 돌려세울 수 없었다. 삶의 끝을 향해 망가져가는 벤을 바라보는 세라의 마음은 어땠을까. 


더 이상 넘겨볼 다음 페이지가 없다는 것, 그가 떠나버린 환락가에 홀로 남아 하염없이 지나버린 시간을 돌아보는 것, 막 떠나버린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비에 젖은 짙은 가을밤 어디선가 스팅의 Angel Eyes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9월의 마지막 밤, 소멸의 시간을 갖고 싶다. 지우고 싶은 못난 감정, 없애고 싶은 기억을 불속에 던져 끝내버리고 10월의 첫날 가볍게 다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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